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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Aug 15. 2024

내 딸년이야~ 반말해도 괜찮아

나는 어느 날 드라마 하이마마 장면 중, 자식 잃은 아버지의 절규 장면을 보았던 적이 있다. 이때, 나는 무심코 궁금했다. 과연 내 아버지라는 사람은 내가 죽으면 나를 위해서 저렇게 울어줄까? 내가 이 세상에 없으면 나한테 못해준 걸 후회하며 미안하다고 생각할까?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이 궁금증은 이제 해결됐다. 아 내 아버지라는 인간은 내가 죽어도 전혀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구나 라는걸 나는 현재는 알게 되었고 그 뒤부터는 나는 더 이상 이 사람한테 무언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인간은 달랐다. 나한테 끊임없이 무언가 바랬다. 이 인간은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바랐고 나에게는 딸로서의 효도를 바랐다.


내가 성인이 되고 아버지가 돌아오면서 처음에는 아버지가 미워도 그래, 미워도 아버지니깐 딸로서 할 도리만 하자. 그래야 엄마나 내가 안 귀찮아지지. 이 마음으로 나름대로 아버지 대접을 해줬다. 또한 비난은 했지만 그래도 나름 가진 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면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아버지를 안쓰럽게 생각하며 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만큼 그리워했고 사랑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래도 나름 행복했던 찰나의 기억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아버지와 함께했던 어린이 대공원의 기억 그리고 거기서 둘이서 맛있게 먹었던 짜장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날도 나는 아버지와 둘이 아니라 다른 여자도 함께 였었다. 그리고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그래도 아버지가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간호해 줬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아버지는 매번 여자를 바꿔가며 데려와서 나에게 소개를 해줬다. 또한, 나를 걱정한다던 아버지는 엄마가 일을 나가야 하는 시간까지 연락이 두절되어 나를 간병할 수 없었고 엄마는 결국 혼자서 내가 퇴원할때까지 그 누구와 교대도 못하고 나를 돌봐야했다. 결국 그렇게 나는 퇴원하는 순간까지도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엄마집에 돌아오면서 자기 멋대로 다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고 어느 날은 집에 며칠 있다가 또, 다시 간단하게 짐가방만 챙겨서 나갔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자꾸 집에 적응을 못하는거 같아 속상하고 그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난 이 모든게 피곤했고 관심도 끊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아버지가 다시 나갔다는 말을 들었을때는 그 사람에 대한 기대도 희망도 없어졌고 피로감만 있었을 뿐이라 딱히 그 사람이 나가든 말든 의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낯선 여자 목소리였고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연락 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앞이 안 보여서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 뒤부터 기억이 잘 안 난다. 어떠한 정신으로 서울대 병원까지 갔는지, 나는 노숙자 같은 아버지 모습을 보고 원망의 소리를 내뱉으면서 엉엉 울었다. "밖에서 그러고 돌아다닐 거면 좀 제대로 돌아다니지, 이게 무슨 꼴이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냥 안 보이는 눈으로 부축을 받으면서 땅만 바라볼 뿐이었다. 의사는 아버지의 뇌에 종양이 눈 시신경을 누르고 있어 눈이 일시적으로 안 보이는 거 같다고 했고 몇 번의 검사 후 아버지는 빠르게 수술을 했다.


나는 항상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깐 그 누구보다 아버지가 살길 바랬고 생각보다 내가 아버지를 많이 사랑한다는걸 느꼈다. 나는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챙겼다. 매일 아버지 병실에 갔고 그 내연녀와 교대로 아버지를 간병했다. 아버지가 수술을 받고 나온 날 에는 수술하는 6시간 정도 되는 시간을 나는 기다리며 기도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수술이 끝나 중환자실로 갔을때, 하루 30분 밖에 면회가 안되도 나는 그 30분 아빠를 보기 위해 매일 병원을 다녀왔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한테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살아서 미안하다. 그날 나는 중환자실을 나오면서 많이 울었다. 드디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고 아버지가 드디어 반성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 사람은 죽을 고비가 와야 바뀌는구나 싶었다. 나는 또 한 번 아버지한테 기대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퇴원하고 몸이 좀 괜찮아지자 나한테 그랬다. 나를 살려준 건 그 내연녀라며 어찌 되었든  자기를 데리고 응급실 가서 살려준 건 이 사람이라며 내 앞에서 내연녀를 칭찬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말도 안 하고 나랑 아버지랑 밥 먹는 자리에 그 여자를 불렀다. 그 여자는 어색해하며 나에게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에요 오리 씨" 이러면서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말했다. "오리 씨는 무슨~ 오리야라고 불러~ 그리고 내 딸년인데 무슨 존댓말을 해~ 반말해 반말~ 오리 너도 인사해야지~ 아버지 살려줘서 고맙다고 해야지~ 허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자리에 더는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를 박 차고 나왔다.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으로 여러 번 부재중을 남겼다. 하지만 난 다시 전화를 안 했다. 그러면서 나는 드디어 내가 아버지한테 가지고 있던 조금의 기대감마저 다 사라졌다. 드디어 나는 아버지를 놓아줄 수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드디어 휴대폰에 아버지 번호를 차단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을 남처럼 대할 수 있었다. 아 드디어 이 사람한테 감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더 이상 이 사람한테 감정을 섞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허무했다. 나는 이걸 깨닫기까지 아버지가 변할거라고 계속 기대했고 바래왔고 내 기대감에 안 맞춰주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하지만 이 기대감이 없어지자 나는 개운함을 느꼈다. 더 이상 나는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쓰리지 않는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오늘 나한테 아버지가 없다는 걸 또 깨닫는다. 하지만 더 이상 속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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