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나스타시아 Nov 23. 2020

'꼰대구' 아버지와 '장남'으로 불리는 딸

왼손 글 4

요 며칠 내용증명을 준비하고 처음으로 '민사소송', '형사고발'과 같은 단어가 남 얘기가 아닌 내 얘기가 되어서였을까?


하지도 않던 아버지께 난데없이 보고 싶다고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평소 성격이라면 '칠칠치 못하게 돈도 없는데 뼈나 부러뜨린다.'라고 하실 아버지가 서울에 오셨다.  몇 년째 본가도 내려가지 않는 (우울증으로 집을 피했었다.) 딸에게 조금이라도 싱싱한 회 한 점 먹이겠다고, 어시장을 다녀오시고 KTX에 익숙지 않은 지하철까지 타가며 서울에 오셨다.


아버지께 나는 늘 아들이었다. 전화를 걸어도, 집엘 가도 늘 '우리 장남 왔나?'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공무직이지만, 문체부 소속기관에 들어간 나를 늘 '국가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하지만 난 이제 국가의 아들도 아니고 조그마한 감정적 자극에도 쉽게 울음을 터뜨리고 동요하는 그저 노후에 짐만 되는 무거운 딸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와 나는 대화가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부드러운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은 "바둑"을 둘 때였다. 둘 때마저도 말이 없다 복기를 하면서 겨우 몇 마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나는 무뚝뚝한 아빠가 어렵고 불편했다.


공부를 시키기보다는 본인이 먼저 솔선수범하면 아이들이 따라 배우겠거니 하면서 아무 말씀 없이 늘 아빠방에서 일하고,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늘 앉아서 공부를 하시던 분이 우리 아버지셨다.


그런 아버지가 처음 나에게 감정을 표현해주신 건 고3 수능 날이었다. 괜히 가는 길 긴장이 돼서 배가 아픈 나에게 "나를 닮아 그렇다"며 몇 년째 그 얘기를 꺼내신다.


퇴사를 하며 차마 웃으며 "국가의 아들 파양 당했습니다."라고 우스갯소리도 한 번 못하고 끙끙거리던 나는 2년 만에 만난, 그새 흰머리가 더 자라신 아버지의 모습에 애교도 못 부리고 그저 "고생하셨지요?" 한 마디를 한 게 전부였다. 못난 장남이다.


정치성향마저 다른 보수 "꼰대구" 아저씨인 아버지와 (아버지 기준 빨갱이) "중도보수"인 딸은 정치 얘기조차 하지 않는다. 목석 둘을 가져다 놔도 이런 딱딱함은 없을 것이다. 그나마 용기를 내 본 것이 몇 해 전부터 KTX를 타러 가는 딸을 배웅 나오는 엄마 아빠를 안아주고 기차에 몸을 싣는 게 나의 가장 큰 애교다. 나는 집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딸을 가장한 장남이었다.


그런데 그런 무뚝뚝한 아버지가 이번엔 내 옷을 입혀주셨다. 내 입에 밥을 떠 먹여 주셨다.


더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할 수 있는데..."라며 얼굴만 붉혔다.


무뚝뚝한 대구 아저씨와 첫째인 게 싫은 (늘 예쁨 받고 싶고 아양 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장녀는 오늘도 팔 부러진 과정을 복기하듯 속마음은 꽁꽁 감춘 채 가벼운 포옹으로 다시 헤어졌다.


장남인 큰 딸이 조금 더 예뻐져 볼게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구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