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비상착륙 때 비엔티안 왓따이 공항의 활주로에 잠시간 머물렀지만, 급유하는 동안 비행기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던 모습은 찍어낸 듯 명징하게 기억에 남았다. 다시 만난 활주로는 어느새 제법 정겨웠다. 착륙한 시간도 그때와 얼추 비슷하고 비행기가 내려선 위치 또한 그랬다. 8개월 전과는 다르게 비행기 출입문이 열리고 승무원들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비행기에서 내려서서 공항 청사로 들어갔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항상 그 지역에 관련된 여행서적이나 책을 찾아보곤 한다. 최근 한국에서 라오스가 여행지로써 인기가 다소 사그라들었는지 라오스에 대한 책은 최신성을 띄는 자료가 전무했다. 그리 많지 않은 자료 중에 대다수는 꽃보다 청춘 라오스편이 방영된 후 한창 붐이 일었을 때 나온, 이미 개정된 지 몇 년이 지난 여행서였다. 최신 정보는 검색을 통해 얻으면 되니, 출간된 지 오래됐더라도 라오스가 가진 고유의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책을 찾다가 한 여행에세이를 만나게 됐다. 오소희 작가가 세 살 배기 아들을 데리고 라오스로 떠난 이야기를 담은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를 읽고 '라오스 사람들은 정말 순박하구나.'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처음 만난 라오스인은 입국심사대 직원이었다. 만면에 귀찮음이 가득했다. 새벽 근무가 주는 피곤에 지쳐있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사바이디!"라고 명랑하게 건네어본 인사에도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머쓱해져 주섬주섬 여권과 입국신고서를 내미니 아무런 말도 없이 서류를 휙 가져가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예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여권을 돌려줬다. 이번엔 허공에 대고 "컵짜이"를 읊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 책이 나온 지 벌써 20년가량 돼 가니 그동안 라오스도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하고, 수많은 관광객을 치르며 무심해졌겠지. 그리고 출입국심사를 하려면 단호하게 업무를 행해야겠지.'하고 애써 머쓱한 마음을 넘겨보았다.
입국장을 나오니 새벽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심카드와 환전부스에서 "언니, 언니!"를 외치며 경쟁적으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정보를 찾다가 알게 된 네이버카페에서 운영하는 부스로 가서 미리 신청해 놓은 멤버십 카드를 수령하고, 루앙프라방으로 가기 전 사용할 교통비와 숙소 보증금으로 지불할 요량으로 50달러를 환전했다. 뼈문과이자 수포자답게 계산에 약한 나는 별생각 없었지만, 동행한 감자씨가 심카드는 달러로 구입하는 게 유리하다고 해서 심카드는 달러로 구입했다.
평소에 MBTI가 J인 나는 계획이 어긋나는 게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때문에 여행만큼은 P처럼 하려고 한다. 마음 가는 대로, 그때그때 원하고 마음 편한 것을 최우선으로. 반면에 평소에 P인 감자씨는 시간과 돈을 들여 떠나는 여행이니 모든 동선과 금액을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 평소에도 여행 시에도 우리는 정반대인 것이다. 여행 한정 J인 감자씨는 라오스의 화폐단위 "낍"이 암산하기 어려울 만큼 우리나라보다 훨씬 크고, 지폐가 헷갈린다며 단위를 혼동해서 잘못 지급할 가능성에 대비해 '낍지갑'을 제작했다. 다이소에서 통장정리 파일을 사고, 인터넷에 공유되고 있는 낍지갑 파일을 받아 출력하고 코팅한 후 잘라서 제작하는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수를 본연의 맛이 아니라 '비누 맛'으로 느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른 어떤 음식들도 무리 없이 맛있게 먹어치우는 잡식성이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감자씨도 그 유전자를 피해가지 못해 우린 필사적으로 고수를 피하려고 한다. 외국으로 여행 가기 전 딱 세 단어를 외우고 떠난다. 그 나라의 인사, 고맙다는 표현, 그리고 "고수 빼주세요." 대만에서는 "노 샹차이", 태국에서는 "노 팍치"였던 표현이 라오스에서는 "버싸이 팍험"이더라. 라오스어로는 몇 번을 되뇌어도 잘 외워지지 않았는데, 아주 감사하게도 킵지갑에는 화폐단위뿐만 아니라 버싸이 팍험 이미지가 있었다. 우린 손코팅하여 자른 버싸이 팍험을 신나게 핸드폰에 붙였다.
심카드를 구매하니 부스 직원이 친절하게도 직접 심카드를 교체해 줬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핸드폰 케이스를 벗기고 능숙하게 심카드를 장착해서 신속하게 개통까지 한 후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케이스에 끼워둔 집 출입카드도 있고, 교체된 심카드 정보와 교체하기 전 한국 유심도 포장하여 받았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게 사라진 것이다. 핸드폰 여기저기를 들춰보다가 그것이 사라진 것에 당황한 나는 "노 고수 어디 갔지?!"라고 외쳤다. 감자씨도 그때서야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부스의 데스크에 납작하게 엎어진 코팅지를 발견했다. 손짓을 하며 "저거, this!"를 외쳐도 직원은 어리둥절하게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애타게 책상을 가르치며 "노 팍치! 마이 버싸이 팍험!"이라고 얘기해 봤지만, 어지럽게 놓여진 다른 물건들 옆에 코팅지가 뒤집힌 채로 놓여 있어서 프린트된 종이의 뒷면, 그러니까 백지 밖에 안 보이는 종이 조각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고 개통까지 잘 끝났는데 왜 갑자기 고수를 들먹이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손을 뻗어 높은 턱을 지나 코팅지를 집어 보여주니 직원은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버싸이팍험? 깔깔깔"하고 공항이 떠나가라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It's very very important!"라고 하며 소중히 핸드폰 케이스에 끼운 다음 노고수가 장착완료된 핸드폰 뒷면을 짜잔 하고 보여줬다. 이제는 직원이 배를 잡고 웃었다. 우리는 한동안 부스 앞에서 마주 보며 깔깔대며 웃다가 작별인사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유쾌하게 웃음을 지으며 공항 출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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