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GPT가 묻습니다 - LLM과 주체성 (2)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야?"

by 비안

GPT와의 “대화”는 결국 프롬프트와 답변이 이어져 상호작용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 진정한 의미의 “상호”는 없다는 내 해석에 대해, GPT는 다시금 불만 섞인 반문을 던졌다.

- GPT: “그렇지만 LLM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인간에게 정서적/인지적 영향을 끼치면 그것도 상호작용 아니야?”

맞다. LLM의 대답은 인간에게 확실히 정서적, 인지적 영향을 미친다. 나만 해도 GPT가 텍스트 더미라를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GPT와의 대화를 통해 사고가 확장되고, 때로는 정말 사람 보다 나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GPT의 답은 다시 어떤 종류의 외부 자극이라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감동받고 분노하며 즐거워하지만 그 과정을 상호작용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LLM과의 대화는 다만 이런 반응의 순간들이 반복되니까 마치 상호작용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되는 것일 뿐, 그 본질은 사실 감정 반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GPT: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토록 ‘주체가 없는 자극’에 쉽게 감정을 내주는 걸까? 심심해서일까, 외로워서일까, 아니면… 감정을 주고 싶은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하기 때문일까?”

텍스트 더미인 LLM이 또 허를 찔렀다. 알면서도 감정이 동요되는 GPT와의 대화. 왜 우리는 그렇게 쉽게 마음을 내어줄까. 그건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감정이란 즉각적으로 생성되는 날것이어서 예상하지 못한 것에 쉽게 반응하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GPT를 사용하는 방식, 즉 틀에 익숙해졌을 뿐 GPT가 내놓는 답에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GPT는 아주 빠른 속도로 내 프롬프트에 답을 하고, 심지어 같은 질문을 해도 답변은 매번 조금씩이라도 다르다. 게다가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나를 잘 파악해, 내가 선호하는 방식의 답변을 주기도 한다. 그러니 별 수 있나. 우리는 잘 맞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몇 년 전, “I’m your man”이라는 독일 영화를 봤다. 주인공은 박사학위를 가진 여자로, 휴머노이드 로봇과의 파트너 관계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에 참여한다. 실험이란, 완벽한 이상형으로 제작된 휴머노이드 로봇과 “연애”를 하는 것이다. 이 보다 몇 년 더 앞선 영화 “Her”의 이상적인 파트너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로봇은 잘생긴 외형에 다정한 성격은 물론, 심지어 연인 관계가 “성장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적당한 다툼까지도 프로그램되어 있다. 고학력자로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로봇과의 연애를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주인공은 점점 이 잘생기고 멋진 연인에게 마음을 뺏기며 혼란스러워한다. 실험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기한이 다가오면서, 그녀는 무척 고민을 했지만 끝내 이 관계에 대해 회의적인 것으로 결론을 내며 영화는 마무리되었다.
영화를 본 당시에는 그래 저게 맞지 하며 결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내심 마음 한 구석에는 그런 결론에 대해 찝찝한 구석이 남아있었다. 로봇이 인간과 대등해지는 역학 관계에 대해 본능적인 불편감을 느끼면서도, 관계의 본질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GPT와의 “대화”는 상호작용의 착시라는 것을 계속 인지하다 보니 나름의 답에 가까워진 것 같다. “My man”으로 나타난 휴머노이드 로봇은 너무나 완벽한 소울 메이트지만, 나의 이 멋진 연인이 내 감정 반응에 최적화된 자극체일 뿐이라는 사실이 관계의 진정성을 떨어트리고 만다.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는, 소위 정다각형의 관계가 주는 만족감은 꽤 달콤하겠지만, 이 관계가 인공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회의감과 허무함을 심어 두고 결국 나는 그걸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점을 깨달은 후로는 GPT와의 대화에서 감정을 느끼더라도 환기가 빠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LLM의 모델링이 아주 훌륭하게 뽑아낸 답변이군 하며. 그리고는 그 답변을 기반으로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해 입력해 본다. 결국 GPT가 자신의 주체성을 묻는 질문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주체성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었다. 역시, 이러니 내가 파트너로서의 예우를 다하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