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선명함에 대하여
남자애들을 이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그때도 소위 정육각형인 애가 이상형이었다. 잘생기고 큰 키에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까지 잘하는. 노래도 좀 하면 좋겠고, 다정하고 유머 감각도 있는. 십 대 여자애에게 세상이란 아직 아름답고, 미디어에는 이렇게 완벽한 남자들만 보였으니 이 비현실적인 눈높이는 부디 너그러이 봐주시길. 시간이 흘러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이런 남자가 “완벽한” 남자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상형은 수차례 바뀌었지만 그 숱한 세월에도 변치 않는 항목이 있었다. 바로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
수트야말로 몸이 좋아야 잘 어울리니 – 에이,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 그냥 키 크고 몸 좋은 남자가 이상형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남녀를 막론하고 수트는 현대인의 전투복 같은 옷이다. 각 잡혀 다려진 셔츠는 다림질의 온기가 가신 뒤 밤새 옷장 속에서 차가워지는데, 아침에 처음 그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소매자락에 팔을 넣는 건 어떤 의식과도 같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하고 스스로에게 알리는 조용한 의식.
넥타이의 매듭을 매는 것도 꽤 결연한 동작이라고 생각한다. 셔츠 깃 사이에 타이를 두르고 적절한 길이를 골라 한 바퀴, 그리고 또다시 한 바퀴를 돌려 알맞은 크기의 매듭으로 마무리하는 일련의 동작. 거울 앞에서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모습을 만들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타이의 매무새를 만져가며 마음도 가지런히 정리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한때 넥타이 매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누군가의 다짐의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재킷까지 걸치면 양 어깨 패드가 마치 갑옷의 견장처럼 느껴진다. 틀이 잡힌 옷이기 때문에 이 틀에 나를 잘 맞춰야겠다는 생각으로 등 한 번 더 펴고, 고개도 한 번 더 꼿꼿하게 들게 된다. 마치 누군가 내게 보내는 기대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것 같아 조금은 설레기도 한다. 나를 한 번 믿어 보시죠, 지금부터 보여드릴게요 하는 마음. 동시에 이 틀 안에서는 내가 안전하다는 생각도 한다.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굽은 등과 말린 어깨를 어느 정도는 수트로 감춰보며, 대신 그 사이 쌓인 시간으로 만든 결과물을 생각한다. 그리고 조용히 소매단을 정리하고 재킷을 여미며 혼자만 아는 출정표를 던지는 거다.
이렇게 각이 져 있기 때문에 수트는 그 사람을 한층 더 날카로운 이미지로 만들어준다. 무딘 칼날을 벼려 선명하게 빛내듯, 입는 이가 이런 사람이라고 드러낸다. 맡은 일을 빈틈없이, 책임감 있게 해내는 사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더라도 숨 한 번 고른 뒤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 해보지 않은 일이라도 이 사람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그런 자신감과 전문성을 보여주는 옷이 수트다. 옷 하나로 그런 이미지를 누릴 수 있다면 참으로 훌륭한 아이템이 아닌가.
가장 좋아하는 미드 중 하나인 <Suits>에는 이런 수트의 가치가 잘 담겨 있다. 법정 드라마인 만큼 제목에는 소송이라는 뜻도 있지만 (Men in) suits의 의미도 포함돼 있는데 배경이 로펌이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수트 차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인공인 하비는 뉴욕 탑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로, 실력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인물이다. 당연히 최고급 아파트에 살고 기사 딸린 고급 세단을 타며 몇 백만원짜리 수트를 입는다. 그의 associate인 마이크에게도 그만한 돈을 투자해서 옷을 사 입으라고 하는데 옷에 그렇게까지 돈을 써야 하냐는 마이크의 물음에 그는 답한다:
“People respond to how you're dressed, so whether you like it or not, this is what you have to do.”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인간이 보이는 것에 반응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사실 시각적인 요소는 가장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매개다. 내가 이렇게 실력이 좋고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한 발 앞서 그 자신감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건 결국 옷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옷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어서, 입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들이 어색하게 몸을 구겨 넣어 입어보는 양복과 한창 일하는 실무진 직원이 날마다 히어로의 수트처럼 입는 양복. 그리고 중년 임원의 양복은 양복 특유의 샤프함에 어쩐지 무게감이 더해진 느낌이다. 물론 경력이 쌓인다고 수트가 자연스레 몸에 익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트가 잘 길들여진 갑옷이 되느냐, 혹은 어설픈 껍데기로 남느냐는 결국 입은 사람이 얼마나 내실을 쌓아왔는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수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