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차이, 여행자의 차이
13년 전에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 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빈 종이에 유럽 대륙을 대충 따라 그렸다. 가고자 하는 곳을 점으로 표시한 뒤 색연필로 동선을 연결해 루트를 짜고 각 도시의 특징, 해야 할 것들, 중요사항 등을 그 안에 채워 넣었다. 각각의 내용마다 다른 색의 볼펜을 사용했음은 물론이다. 스팟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고 휴무일, 대표메뉴와 함께 곳곳에서 주워 읽은 여행팁도 빠짐없이 적었다. 나만의 가이드북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틈날 때마다 만들어 완성하는데는 7개월 가량이 걸렸다. 떠나기도 전인데 만들어 놓은 가이드북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신나고 온 몸에 에너지가 도는 일이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여행지에서는 종이 지도만이 유일했다. 지도를 펼쳐서 이쪽이 동쪽인가, 여기가 북쪽인가 하며 뱅뱅 돌았다. 그럼에도 타고나길 길치인 이 몸은 늘 길을 잘못 들어 원치 않게 만보 이만보씩 걸었다. 비가 죽죽 내리는 날은 겨드랑이로 우산을 겨우 받치고 고개를 비틀어 있는 힘을 다해 지도를 지켰다. 숙소에 돌아가면 반쯤 젖은 지도를 조심스레 펴 말리곤 했다. 가방 속에는 지도의 복사본도 있었다.
지도를 아무리 봐도 길을 모르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했는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10초 후 당황스러울 만한 경우의 수가 백 갈래 쯤 뻗쳐 나갔다. 한걸음 다가가다 다시 뒤로, 또 한 발짝 내딛다 멈칫, 그렇게 네다섯 명쯤을 보내고 겨우 물어도 영어로 되돌아오는 대답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떠나오기 전 열심히 휴무일을 체크했지만 막상 갔을 때 문이 닫혀있는 경우도 많았고, 한국에 있는 누군가와 연락이라도 할라치면 해외 전화가 가능한 전화카드를 들고서 공중전화를 찾아 헤맸다. 꼬부랑 영어로 온종일 고생을 하다 수화기 너머 “여보세요”를 들었을 때의 기쁨이란.
불편했겠다 싶어도 나름의 추억이다. 편리했다 불편해진 것이 아니라 그 때는 그게 최선 이었는데 불편하고 할 게 뭐가 있겠나. 여행이 참 쉬워졌다. 스마트폰은 실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한다. 더 이상 뒤통수에 “니하오! 콘니찌와!”가 꽃히지 않는 여행길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시절에 여행을 몇 번 한 것이 참 다행이다 싶다. 이미 맛을 들인 이상 다시는 하지 않을 스타일의 여행이니까.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 여행 참 스릴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는 만큼 손가락대신 사람과 눈을 맞추고 입을 놀려가며 정보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그 때의 나보다 10살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로마는 한 달 유럽여행 여정의 딱 중간쯤이었다. 여행의 중간 중간 한인민박 숙박을 넣어주면 주인장에게서 생생한 현지 여행정보를 들을 수 있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으며, 그립던 한식을 먹을 수 있어 좋다고 가이드북이 알려줬다. 가이드북 말 잘 듣는 나는 정확히 3도시 중 한 도시 꼴로 한인민박을 넣었고 가져온 컵라면에 물을 부으러 내려간 키친에서 그들을 만났다.
유럽에 장기여행을 왔고 돌아가는 표는 끊지 않았다며, 로마가 지겨워져 이제 다른 도시로 옮겨야 하지만 귀찮아서 추가금을 내고 계속 이 곳에 머물고 있다 했다. 이곳을 거쳐 가는 여행자들을 만나는 것도 나름 재미있고 3일 째 민박집 안에서 새로 온 여행자들에게 시설을 안내하느라 반 직원이 되었다고.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여행 동안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른셋.
어리다. 퇴사를 하든 휴가를 내든 유럽 장기여행 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그런데 그 때는 이상했다. 서른셋이면 모든 게 안정되고 한참 회사를 다닐 나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들은 여기에 있는가? 돌아갈 직장도 없는가? 왜 일정 따라 여행하지 않는 걸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가.? 인생에 멈춤이란 게 없었던 23살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오래전 여행이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때의 내게 서른셋은 자유로운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나이였던 걸까. 얼굴 생김새, 그 이상의 대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호흡 느린 여행 이야기를 하며 서로 웃으며 마주보던 옆모습만 그림자같이 생각난다.
그 때의 그들보다 과거의 내가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지금이다.
같은 여행자라는 이유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던 능청스러움도, 스스로를 믿고 앞날을 진두지휘한 활어 같은 개척정신도. 나 되게 멋있었구나. 잠깐의 장면이 13년이 지나 머리에 전구를 켜게 한다는 게 놀랍다. 순간은 강력했지만 이내 여행의 다른 추억들에 묻혀 작은 점이 된 일화일 뿐인데.
그리고 부럽다. 그들에게는 3일 째 밖을 나가지 않아도 괜찮은 친구가 있었구나. 그래서 그 낯선 도시에서, 그렇게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거구나. 두렵지 않았겠구나.
10년의 시간만큼 삶의 포인트도 바뀌었다.
또 10년이 흐르기 전에 그 때 떠났던 루트 그대로의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그리고 그 땐 10년 전의나와 지금의 내가 적절히 섞인 사람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