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른아침 Jan 09. 2024

꼬마 종지

나다운 모습으로 사는 삶


꼬마 종지서가를 정리하면서 눈길을 잡은 책이다. 선과 색이 부드러운 그림이 먼저 눈에 들었다. “그릇은 크기보다 쓰임새가 중요해요!”, “그릇이 아무리 커도 세상 전부를 담을 수는 없어요. 작은 그릇일지라도 이것저것 경험하다 보면 더 큰 세상을 만날 수 있어요.”라는 띠지 글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기대감으로 첫 책장을 열었다.  


찬장에 많은 그릇이 산다. 그릇들은 자신에게 담긴 요리를 살짝 맛보는 즐거움이 있다. 작디작은 꼬마 종지가 새로 왔다. 큰 그릇들은 스파게티, 닭고기덮밥, 초밥 같은 맛있는 음식을 맛보았다. 꼬마 종지는 어떤 음식을 맛보게 될까 기대한다. 기대와는 달리 고추냉이, 식초, 고추기름, 간장 같이 짜고 시고 매운 양념들만 담긴다. 실망한 꼬마 종지에게 나이 지긋한 국그릇 “인생은 길단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더 기다려 보자꾸나”라고 말한다.  

 

과연 꼬마 종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고 꼬마 종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다음 책장을 넘겼다.


미소와 함께 책을 덮었다.



 

30년 넘게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제 더 일할 수 없는 나이 즉 정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일은 그동안 내게 고결하며 거룩했고 또 사명을 다했던 밥벌이였다. 이제 밥벌이를 위한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밥벌이하고 싶어도 정년이 지난 나를 마땅히 여기며 받아주는 곳도 없다. 나도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그러니 밥벌이를 사회적으로는 못 하게 되었고, 나 스스로는 안 하게 되었다.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서 할 자유를 얻었다. 풀과 나무를 간섭하며 들과 산을 걷고 운동하며 배우는 일처럼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에는 자유로웠으나, 일은 상대가 있으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 경력이 요구되었고 자격도 필요했으며 도서관의 사서 보조도 나름의 기준이 있어서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자유는 얻었으나 마음대로는 아니었다.

 

하루에 2~3시간 짧게 책방에서 일하면서 가끔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구연도 하게 되었다. 책방에서 일하며 1주일이 지났다. 일하는 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잡힌 책이 꼬마 종지다.   

 

나도 지금 꼬마 종지처럼 여러 양념 맛을 보는 중이다. 쓴맛과 신맛도 보게 될 게다. 달콤한 맛을 음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때로 매운맛도 참아낼 수 있겠다. 큰 그릇이 맛보는 근사한 맛이 아니어도 좋고, 소문난 맛집의 평점 높은 맛도 욕심내지 않는다. 이제 꼬마 종지처럼 작아진 내가 맛보고 해낼 수 있는 싱겁고 소소한 일이면 된다.

 

큰 그릇을 꿈꾸며 이를 향해 힘써 나가는 것도 가치 있중요하다. 이런 일은 다른 이들의 몫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내 자리에서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곧 동화구연 교육도 받게 된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웃고 떠들 아이들을 생각하니 벌써 행복하다. 꼬마 종지가 내내 기다리다 맛보았던 그런 다양한 맛을 나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슴이 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