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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 꽃을 피운다고?

어쩌다 찾아온 선물 같은

by 이른아침

무심히 큰 잎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고라니 발자국을 뒤늦게 쫓아가던 참이었다. 그곳에 꽃이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작은 기대라도 있었다면 이런 놀라운 반가움은 없었을 것이다. 잎 그늘 속에 숨어 있던 노란 꽃이 불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으로도 본 기억이 없고 처음 만나는 꽃이었지만 만남을 기다려 왔기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꽃도 오래전부터 여기서 나를 기다려 온 것만 같았다.


꽃은 모두 네 송이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미 갈색으로 변해 말라 있었고, 또 하나는 아직 노란색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시들어가면서 축 처진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다 지쳐 기운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곁에는 이제 막 피어난 꽃이 빗물을 머금고 생기 넘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상태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피어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꽃들은 서로 다른 시간에 차례로 피어나며 나를 기다려준 것이 아닐까.


사흘 만에 다시 가보았다. 예전 같으면 무와 배추가 자라는 모습을 살피고 애벌레를 잡으러 수시로 드나들었겠지만, 이제는 고라니가 다 뜯어 먹어버린 뒤라 부추와 대파를 거두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만 가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꽃 모양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고,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꽃봉오리였던 하나는 마침내 활짝 피어있었고 나머지 세 송이는 시들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틀이 지나 또 가보았더니 모두 시들어 있었다. 짧고 뜻밖의 만남이었던 만큼 강렬했다. 이렇게 토란꽃이 내 곁에 잠시 머물다 갔다.


작은 텃밭에 해 년마다 심어 기르면서도 꽃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토란의 생태적 습성 때문이었다. 토란은 인도나 동남아시아 같은 열대 지역이 원산지로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개화가 촉진된다. 반면에 온대지방인 우리나라와 같은 기후에서는 조건이 충분히 충족되지 않아 꽃을 보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는 토란꽃이 피면 언론에 진귀한 현상으로 소개되고, 우리나라가 아열대성 기후로 변하면서 꽃이 피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돌아보면 올여름은 무더위가 유난히 오래 지속되었고 비 또한 잦아 토양의 수분 상태가 높게 유지되었다. 이런 환경은 원산지의 기후 상황과 비슷해 꽃이 피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토란은 천남성과에 속하며 독특한 꽃을 피운다. 노란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은 꽃잎이 아니라 잎이 변형된 것으로 '부처님 광배의 불꽃같이 생긴 꽃싸개'라는 의미로 불염포(佛焰苞)라 불린다. 불염포는 꽃을 감싸 보호하고 꽃가루받이 동물을 유인하는 역할을 한다. 내 눈에는 그것이 광배이면서도 동시에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아무리 종횡무진 달려도 벗어날 수 없었던 부처님 손바닥처럼 느껴졌다.


불염포 속에는 긴 꽃대에 꽃잎이 없는 작은 꽃들이 빽빽하게 모여 핀단다. 맨 윗부분은 암술과 수술이 모두 퇴화하여 성기능이 없는 무성화이며, 그 아래는 수꽃이 자리하고 맨 밑부분에는 암꽃이 핀다. 꽃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겉으로 보기에는 꽃의 형상을 구분하거나 알아볼 수 없었다. 책과 도감에서 그렇다고 설명하니 그렇게 이해할 뿐이다. 다만, 꽃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퍼졌고, 암꽃에는 투명한 액체 방울이 맺혀 있었고 약간의 단맛이 느껴져 꿀일 듯하다.

<하나의 잎집에서 나온 네 개의 꽃줄기><토란꽃의 부위별 명칭><아랫쪽 불염포 속의 암꽃>

우리가 즐겨 먹는 토란은 감자처럼 덩이줄기다. 덩이줄기는 영양소를 저장하기 위해 줄기를 부풀린 것이다. 감자와 비슷하면서도 토란은 끈적이는 점액질 덕분에 미끌거리고 물컹한 식감을 동시에 가진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리는 식재료이지만 나는 그 미끌 물렁한 맛이 좋다. 아삭하게 씹히는 줄기 또한 나물로, 육개장으로 즐긴다.


그러나 토란 껍질을 벗기거나 줄기 요리를 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토란뿐 아니라 반하, 천남성 등 같은 집안의 천남성과 식물들은 모두 독성을 지닌다. 반하는 예로부터 한약 재료로 쓰였고 천남성은 강한 독성으로 인해 사약의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독성 때문인지, 토란 줄기와 잎에는 곤충이 접근하지 않는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텃밭을 휘졌고 지나갔어도 토란만은 멀쩡히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드디어 드문 꽃을 만날 수 있었다.


<대반하><두루미천남성><섬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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