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들녘, 도시 그리고 밥상에서
바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지나간 흔적을 보며 느낄 뿐이다. 풀밭에는 그 흔적들로 가득하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나는 풀밭으로 나가 바람이 남긴 자취를 찾는다. 잎사귀가 살짝이라도 흔들리면 바람이 가까이 다가온 듯 반갑고, 줄기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다시 서면 순간 바람이 지나가 버린 듯 아쉽지만 곧 저편 풀들이 허리를 숙이며 바람의 존재를 알린다. 바람은 언제나 곁에 있어 친숙하고 보이지 않는 바람의 흔적을 읽어내는 일은 늘 즐겁다.
왕고들빼기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바람은 더 또렷해진다. 왕고들빼기는 국화과의 한두해살이풀로, 겨울에 앞서 싹을 틔워 로제트로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부터 왕성하게 자란다. 다 자라면 어깨높이 정도에 이르고 때로는 사람 키를 넘기도 한다. 줄기는 곧고 가늘며, 윗부분에서 가지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가늘고 유연한 줄기 덕분에 부드러운 바람에도 금세 흔들리고, 다른 풀보다 키가 커서 멀리서도 움직임이 뚜렷해 바람의 움직임을 바로 느낄 수 있다.
꽃은 연노란색이다. 눈부시게 노랗지도, 붉게 타오르지도, 새하얗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절제하며 그저 풀밭 속에 섞인다. 그러다 바람에 흔들릴 때면 그 은근한 색으로도 지나던 곤충의 눈길을 붙잡을 수 있다. 아마 흔들림이 없었다면 꽃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내려앉은 나비는 꽃이 바람에 휘청이면 천적에 쫓기듯 놀라 솟구쳐 날아오른다. 바람은 이렇듯 꽃을 흔들어 곤충을 불러들이고 달아나게도 한다. 그러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꽃은 다시 침묵 속에 빠지고 나비는 다른 꽃을 찾아 날갯짓한다.
그렇게 여름에서 가을로 이어지는 동안 바람은 쉼 없이 왕고들빼기를 흔들고, 나비들은 바람 따라 거듭 꽃을 찾아다닌다. 바람과 나비가 다녀가면 이제 꽃들의 시간이다. 먼저 핀 꽃은 이내 열매를 맺어 씨앗이 여물어간다. 갓털(冠毛)을 단 씨앗은 가벼운 바람에도 하나둘 하늘로 떠오른다. 바람이 거세질 땐 줄기가 크게 휘청이면서 씨앗은 한꺼번에 흩날려 더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오후의 햇살이 더해지면 갓털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풀밭을 밝힌다.
바람을 타고 씨앗은 들판과 산자락을 넘어 도시의 빈터나 길가에도 내려앉아 뿌리를 내린다. 덕분에 왕고들빼기는 우리 곁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풀로 살아가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와 꽃, 이리저리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 그리고 바람 타고 날아가는 씨앗을 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가 왕고들빼기를 즐기는 첫 번째 방법이다.
벼가 익어갈 무렵이면 논둑을 따라 고마리, 며느리밑씻개가 작은 꽃을 피우고 왕고들빼기도 환하다. 작물과 잡초가 만나는 경계에서 다른 풀보다 큰 키와 연노랑 꽃송이로 돋보인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 들판은 배경이 되고, 바람에 흔들리는 왕고들빼기가 가을 풍경을 완성한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두 번째 방법이다.
세 번째는 도시에서 왕고들빼기를 마주하는 일이다. 오래된 담벼락 옆, 돌 사이의 좁은 틈, 버려진 빈터처럼 척박한 땅과 좁은 틈새에서도 왕고들빼기는 자란다. 거친 환경에 적응하느라 덩치도 작달막하고 작은 꽃을 피우면서도 열매까지 맺으며 제 몫을 다한다. 바람이 스친 곳이라면 어디든 삶터로 삼는 강한 생명력을 발견하는 것, 왕고들빼기를 만나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네 번째 즐거움은 잎에서 느껴지는 쌉싸름한 맛이다. 왕고들빼기는 먼저 뿌리에서 잎(뿌리잎)이 돋고, 이어서 자란 줄기에서 잎(줄기잎)이 나온다. 잎 모양은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가 아주 깊게 파여 마치 창날을 닮았다. 이 잎사귀를 쌈으로 싸거나 싹싹 비벼 먹으면 특유의 쌉싸래함 뒤에 향긋함이 남아 별미다. 잎은 서너 차례 뜯어내도 다시 돋아나고, 다른 나물들이 질겨져 못 먹게 되는 한여름에도 보들보들해서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
쌈으로 먹든, 비빔이든 왕고들빼기와 잘 어울리는 채소가 있다. 상추다. 왕고들빼기의 쓴맛과 상추의 아삭함이 조화를 이루어 식감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왕고들빼기와 상추는 생물분류체계상 둘 다 “국화과”와 그 하위단계인 “왕고들빼기속”에 속하여 생물학적으로도 유연관계가 깊다. 지금껏 보아온 상추를 떠올리면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가을에 꽃이 핀 상추를 보면 둘의 연관성을 느낄 수 있다.
곧 추석이다. 고향이나 성묘 길에 들판을 걷다 보면 어렵지 않게 왕고들빼기를 만날 것이다. 왕고들빼기가 어떻게 바람을 맞이하는지, 황금 들녘과 얼마나 얼마나 어울리는지, 그리고 그 너머에서 어떤 풍경을 만들어낼지 잠시 그려보자. 상상 속 풍경을 맞이하는 순간, 가을은 더 빛나고 가슴은 뛰게 될 것이다.
* 꽃이 핀 상추가 보고 싶다면
* 고들빼기가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