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풍경으로, 마음은 그 풍경으로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이 왔다. 아침에 창문을 여는 순간마다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커진 일교차만큼이나 피부에 와닿는 기운이 다르다. 밤새 방 안에 갇혔던 공기가 빠져나가면 열린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한층 서늘하고 빠르게 밀려들어온다. 그 바람결에서 새로운 계절의 기운이 느껴진다.
햇빛도 달라졌다. 여름엔 창문을 열어두어도 거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던 볕이 이제는 창틀을 넘어 들어와 제법 긴 그림자를 남기기도 한다. 한낮에는 여전히 강해 그늘로 몸을 피하지만 이른 오전엔 등에 닿는 따뜻한 기운이 오히려 반갑다.
귓가에 스치는 소리도 변했다. 나무 아래를 가득 채우던 매미 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밤마다 이어지던 풀벌레의 합창도 귀를 기울여야 들릴 정도로 낮은 음으로 잦아들었다. 작은 바람에도 너울대던 나뭇잎은 생기를 잃고 메마른 소리를 내기도 하고 이른 낙엽이 되어 땅으로 내려앉아 부스럭거린다.
이렇게 가을은 절기와 함께 몸의 감각으로도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창문을 연다. 그 짧은 순간에 달라진 공기와 빛과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 변화가 늘 달갑지만 않다. 새로운 변화에 몸과 마음이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예민하게 살핀다.
창문으로 가을이 느껴진다면 이미 들판은 한창이다. 한때는 단풍이 물드는 숲에서 가을을 맞았다면 이제는 벼 이삭이 노랗게 여물어가는 논이나 바람 부는 들판에서 계절의 변화를 더 또렷이 느낀다. 오늘도 들로 나가 논길을 걸었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이어져 한동안 밖으로 나서지 못했는데, 마침내 구름이 걷히고 들녘엔 햇빛이 눈 부시다. 점심 먹고 나와 잠깐 돌아다녔는데도 벌써 햇살이 부드럽다.
길에서 만나는 나비들이 분주하다. 한 송이 꽃에 잠시 머물다가 금세 다른 꽃으로 옮겨 다닌다. 날갯짓만 바쁠 뿐 마주할 꽃은 이제 많지 않다. 모아둔 꿀로는 겨울을 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듯 그 움직임이 초조해 보인다. 여름에는 너울너울 살랑거리며 여유롭게 보이더니 지금은 팔랑팔랑 나풀거린다. 바람의 온기가 달라진 탓일까. 짧아진 해와 저녁의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나비도 곧 다가올 추위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떨리듯 급한 날갯짓이 어쩐지 이별의 몸짓처럼 보인다.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도 나비들처럼 바쁘긴 마찬가지다. 봄이나 여름처럼 꽃이 넘치지 않아 경쟁은 덜하더라도 주어진 시간이 훨씬 짧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곤충을 불러들여 꽃가루받이하고 씨앗까지 남기려면 충분히 준비해야 하고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 된다. 여름 내내 광합성으로 모아놓은 양분으로 온 힘을 다해 피어나, 더 화려한 빛깔과 더 진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찾아온 나비에게 더 달콤한 꿀로 답한다. 그 몸짓에는 살아 있으려는 의지와 함께 곧 시들어질 것을 아는 슬픔이 묻어 있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겨울을 앞두고 생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꽃의 절정은 어쩐지 인생의 황혼에 서서 가을을 맞이하는 마음 같아 애틋하다.
이미 벼를 수확한 논도 있고 많은 논에서는 여전히 벼가 여물어가고 있다. 물이 잘 빠지지 않은 논에는 비바람에 쓰러졌던 벼를 한 다발씩 묶어 세워 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고개 숙인 이삭들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릴 뿐 벌판엔 별다른 기척이 없다. 사람의 손길이 멈춘 자리마다 고요가 내려앉고, 들판 한가운데 낡은 옷을 걸친 허수아비가 외로이 서 있다.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옷자락이 나를 향해 곧 해가 질 테니 돌아가라고 작별 인사를 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대로 서 있다. 어제 밤에도 혼자였다면서.
이렇듯 계절은 풍경으로 다가오고 마음은 그 풍경을 따라 변한다. 올봄에는 설렘으로, 여름은 눈부심으로 다가왔다. 가을은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큼 빨리 지나갈 것 같아서 오늘처럼 햇살이 머문 들길 위에서 자주 뒤를 돌아본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좋아하면서도 조심스럽다. 이번 겨울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 나를 두드릴까.
* 가을엔, 꽃도 나비도 머무는 시간이 짧다.
* 가을 들판은 풍요 속에서도 겨울을 예감한다.
* 다른 식물은 이미 씨앗 보낼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