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물에서 사는 식물의 생존전략
고마리는 매력이 많은 풀이다. 논두렁 가장자리나 개울의 얕은 물길을 따라 자란다. 그곳은 물이 쉼 없이 흐르는 거칠고 변화 많은 환경이다. 그렇지만 독특한 전략으로 삶을 이어가는 강한 생존력과 번식력으로 적응해 왔다. 때로는 그 힘으로 좁은 도랑을 뒤덮을 만큼 군락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꽃을 피운다. 강인함 속에 담긴 소박함, 이것이 고마리의 가장 큰 매력이다. 가을이 되면 그 매혹에 이끌려 들판을 가로지르는 논둑길을 걷게 된다.
이번에는 더 가까이에서 만나기 위해 고마리가 자라는 도랑으로 따라 내려간다. 며칠째 이어진 비로 물은 불었지만 여전히 맑다. 맑은 물 위로 비친 초록 잎 사이에서 꽃은 한층 더 선명하다. 꽃잎 전체가 붉은 것도 있고 어떤 꽃은 흰빛으로만 핀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랫부분이 희고 위쪽이 붉은 꽃으로 마치 입술에 연지를 바른 듯하다. 나비와 벌이 다가와 꿀을 빠는 모습은 서로 입을 맞추듯 다정하다. 종을 달리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유혹의 매력이란 이런 것일까.
꽃은 가지 끝에 다섯 개에서 많게는 스무 개에 이를 정도로 모여 핀다. 작은 꽃 한두 개로는 곤충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 가운데 실제로 피어있는 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대부분 차례를 기다리는 꽃봉오리이거나 먼저 피어 시든 꽃들이다. 피고 지는 시기를 엇갈리게 해서 오랫동안 큰 꽃송이처럼 보이게 하는 작은 꽃이 택한 나름의 전략이다. 혼자서는 작지만 함께 모여 밝히는 연대의 힘이다.
고마리의 놀라움은 따로 있다. 겉으로는 아무리 관찰해도 보이지 않지만 놀랍게도 땅속에도 꽃을 피운다. 그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장화까지 준비해 신고 물속으로 들어왔다. 줄기를 한 움큼 잡고 당겼지만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들이 엉키고 개흙 속에 박혀 있어 줄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손을 물속으로 넣어 들어 올리자 몇 줄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줄기 끝에 하얀색의 작고 특이한 꽃이 있다. 꽃잎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완전하지 않아 보인다. 이 꽃이 닫힌 채 자신의 꽃가루로 수정하는 폐쇄화다.
제비꽃, 광대나물, 칡, 물봉선 등 적지 않은 식물에서도 폐쇄화가 나타나지만, 이들은 모두 땅 위의 줄기에서 피운다. 땅속은 언제 닥칠지 모를 기후 변화와 동물의 피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며 수분과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 생식에도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래서 고마리가 땅속에 폐쇄화를 피워 씨앗을 남긴 것은 생존을 위한 지혜이자 선택이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싹을 틔우기 때문에 어미가 자라던 환경에서 같은 조건으로 성장할 수 있다. 폐쇄화에서 얻어진 씨앗은 어미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다. 이 덕분에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가 심한 개울에서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환경에서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 결국 고마리는 땅 위에서 피는 꽃으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고, 땅속 폐쇄화라는 흔치 않은 선택을 통해서 안정적 번식을 꾀하며 적응하고 번식해 왔다. 경쟁자와 차별화된 전략적 매력이다.
고마리 뿌리를 보기 위해 줄기를 손으로 잡아당기는 순간, 줄기에 난 거친 털에 피부가 긁히는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고마리의 줄기에는 아래쪽을 향해 난 짧고 단단한 털이 돋아 까칠한 매력이 있다. 털 덕분에 다른 식물이나 물체에 기대어 오를 때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다. 줄기가 덩굴성으로 가늘고 사방으로 뻗어 혼자 곧게 서기 어려운 약점을 보완하는 장치다. 겉보기에는 가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줄기의 표피가 변형된 것으로 식물학적으로 가시가 아니다. 따라서 초식동물로부터 몸을 지키는 효과는 크지 않으며, 주로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구조라 할 수 있다.
고마리의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자라는 도랑의 수질을 정화하는 능력도 지닌다. 고마리의 뿌리에는 공기의 통로 역할을 하는 통기(通氣) 조직이 발달되어 물속이나 습한 땅에서도 쉽게 숨을 쉴 수 있다. 이 통로를 따라 줄기에서 내려간 산소가 뿌리까지 잘 전달되고 일부는 흙 속으로 배출된다. 그러면 뿌리 근처의 흙에 산소가 풍부해지면서 주변 미생물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 과정에서 오염물질 분해가 촉진된다.
또한 고마리는 물속의 질소와 인, 칼륨 같은 영양분을 흡수하여 줄기와 잎을 키운다. 잎이 많고 성장 속도가 빠르다 보니 그만큼 흙과 물속의 영양분을 많이 흡수한다. 이 물질들은 녹조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지만 고마리에게는 성장을 위한 양식이 된다. 이렇게 고마리는 자신이 사는 물가를 조금 더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간다.
삶의 터전이나 방식에서 고마리와 연꽃은 닮은 점이 있다.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상징으로 여겨져 오래전부터 부처님의 꽃으로 받들어 왔고, 물 위로 길게 줄기를 뻗어 넓은 잎과 크고 당당한 꽃을 피운다. 반면 고마리는 도랑이나 논둑 아래의 낮은 자리에서 몸을 낮춘 채 살아간다. 작고 소박하면서도 연꽃에 견주어 뒤지지 않는 생명의 품격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