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산국, 가을의 마지막 향기

향기가 남긴 이야기들

by 이른아침

가을은 들국화의 계절이다. 들길이나 산길을 걷다 보면 저마다 다른 모습의 들국화들을 만날 수 있다. 흔히 들국화라 부르지만 사실 식물학술적으로 그런 이름이 붙은 식물은 없다. 들국화란 가을에 피는 국화과의 야생화들을 두루 이르는 통속적 이름이다. 산국,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 개미취 같이 들과 산에서 저절로 나서 자라는 국화류를 통틀어 들국화라 한다. 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을 참나무라 묶어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들 들국화 가운데 내가 으뜸이라 여기는 꽃은 산국이다. 가까운 들이나 산기슭에서 자라고 개체수도 많아 어디서든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깊은 산속에서 살아 일부러 찾아가야 할 만큼 멀리 있지도 않고, 드물고 귀해서 애태우지도 않는다. 언제든 반갑게 맞아주는 고향 친구 같다. 산국은 무릎 높이에서 엉덩이 정도까지 자라 크지도 작지도 않다. 기세가 당당하지 않아 올려다볼 필요도 없고,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어 낮추지 않더라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봄이면 땅속에서 겨울을 견딘 뿌리에서 돋은 잎이 땅 가까이 낮게 퍼져 있어, 작은 봄꽃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초여름이 다가오면 서서히 줄기와 잎을 키우며 주변 식물과 햇빛 경쟁을 벌인다. 이 시기엔 영양을 본격적으로 모으며 가을을 준비한다. 그러다 추분이 지나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기온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작은 꽃봉오리를 키운다. 가을이 깊어지고 찬바람이 불어올 무렵 꽃이 노랗게 피어나며 정체를 드러낸다. 한 해 동안 준비해 온 산국의 얼굴이다. 봄부터 많은 풀들이 자라고 꽃 피우며 하루도 한가롭지 않았던 풀밭이 지금은 산국 차지다.


그토록 오랜 시간 준비해 피어난 산국의 세상인데도 꽃 크기로만 보자면 들국화 가운데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구절초의 하얀 꽃이 가장 크고 그다음으로 쑥부쟁이와 개미취의 연보랏빛 꽃이다. 산국꽃은 작아도 존재감이 있다. 멀리서도 눈길을 끄는 노란빛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볕에 반사된 노란빛은 곤충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알 수 없으나 내게는 순간적으로 하얗게 번져 보이기도 한다. 가을의 청명한 햇살 아래서는 사진을 찍을 때도 하얗게 날아가 버리곤 한다. 햇빛을 머금은 이 작은 꽃은 색을 넘어선 눈부심으로 내 눈을 사로잡는다.


들국화는 대체로 개화기간이 긴 편이지만, 산국은 그중에서도 제법 추위가 느껴지는 늦가을까지 피어 있는 꽃을 자주 본다. 찬바람에도 쉽게 시들지 않는다는 것은 낮은 온도와 짧아진 일조시간에도 견디는 생명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남아 더 이상 경쟁자가 없는 가을 끝자락에서 기회를 독차지한다. 작지만 오래, 늦었으나 서두르지 않으며, 우리 곁에 가을을 더 오래 머물게 하고 겨울의 시간을 잠시나마 미루어둔다.


산국의 매력은 단순히 작고 늦게까지 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향기다. 산국을 대할 때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할 때도 있다.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은 또렷하다. 향은 잎에서 더 강하게 풍긴다. 잎사귀를 손가락으로 비벼보면 숨겨졌던 향이 묻어 나와 손끝에 오래 남는다. 향기는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산국이 살아남기 위해 오래전부터 마련한 생존 전략이다.


겨울을 앞두고 햇빛이 줄고 벌과 나비가 적어지는 시기에 산국은 강한 꽃 향으로 곤충을 불러들인다. 곤충은 향기를 따라와 꿀과 꽃가루를 가져가고 그 과정에서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진다. 그뿐 아니라 잎에서 풍기는 향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은밀한 방어물질이기도 하다. 초식동물이나 해충이 꺼리거나 싫어하는 성분이라 잎을 쉽게 갉아먹지 않는다. 실제로 산국이나 다른 들국화 잎에서 벌레 먹은 흔적이 드물다.


꽃과 잎에서 나오는 향기는 내게는 차이 없이 같은 향처럼 느껴지지만, 그 쓰임은 전혀 다르다. 꽃의 향은 곤충을 유인해 꽃가루받이를 돕는 데 쓰이고, 잎에서 풍기는 향은 곤충이나 초식동물을 쫓아내는 일종의 기피제 역할을 한다. 같은 식물이 품어내는 향기인데도 상황과 대상에 따라 하나는 유혹의 속삭임이 되고 다른 하나는 방어의 고함이 되니, 산국 향기의 선별적 이중성이 흥미롭다.


사람들은 꽃을 말려 차로 우려 마시거나 설탕에 절여 약차처럼 먹기도 한다. 옛사람들은 베개나 이불솜 사이에 넣어 두고 풍기는 향기를 즐기며 잠들었다고도 한다. 나 역시 이 향을 무척 좋아한다. 들에서 산국꽃 몇 송이를 꺾어와 화병에 담아 식탁이나 책상 위에 두면 꽃 향이 집안을 가득 채운다. 밖에서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산국 향이 먼저 반긴다. 오늘도 산국이 향기로 건네는 말들을, 음미해 본다.



* 국화과 식물의 구조


* 국화과 꽃은 수많은 혀꽃과 대롱꽃이 함께 모여 마치 한 송이꽃처럼 보인다. 안쪽의 대롱꽃은 한꺼번에 피지 않고 시간을 달리하여 차례로 피고 진다. 이는 꽃가루받이 기회를 늘리려는 속셈이다.

<개화를 기다리는 대롱꽃><가장자리부터 개화 시작><안쪽만 남고 개화>


* 찾아오는 곤충으로 산국 주변은 늘 분주하다

<암끝검은표범나비 수컷> <암끝검은표범나비 암컷> <네발나비>
<줄점팔랑나비> <남방노랑나비> <납작선두리먼지벌레>
<배짧은꽃등에> <꽃등에> <꼬마꽃등에>
<금파리> <꽃등에류> <파리류>
<볼수록 눈부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마리, 땅속에서도 피는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