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로 되돌아간 식물의 선택
지금 지구 생태계에는 대부분의 동식물이 물속보다 땅 위에서 살아간다. 최초의 생명은 물속에서 기원했으며, 진화 과정에서 다수의 종이 육상으로 올라와 적응해 무수한 갈래로 퍼져나가 번성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다시 물로 되돌아가 수생 환경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하고 적응해 왔으며 앞으로도 진화해 나갈 것이다.
오늘은 이렇게 물로 귀향한 식물 하나를 찾아 나선다. 작은 저수지 서너 곳을 후보지로 정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들이라 헛걸음하더라도 부담은 없다. 더구나 오랫동안 보지 못해 환경 변화 등으로 개체수가 예전보다 줄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기에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그래도 출발 전에 차 적재함에서 장화를 꺼내 두드려 보며 물속까지 들어가서 만날 순간을 그려보았다.
두 번째로 들른 저수지에서 물 위를 넓게 덮은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고 예방을 위해 둘러쳐 놓은 철제 울타리가 조급해진 발길을 막아섰다. 오랜만에 만났고 반가워 그냥 돌아서지 못하고 기어이 울타리를 넘었다. 둑을 따라 내려가 확인하니 마름과 개구리밥이었다. 미리 도감을 살펴본 덕분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마름 한 줄기를 잡아당기자 물결만 흔들릴 뿐 쉽사리 따라오지 않았다. 힘을 더하자 길게 늘어진 줄기가 '툭' 끊기며 윗부분만 손에 잡혀 물 밖으로 나왔다. 잎은 표면이 두꺼운 큐티클층으로 맨들거리며 반짝였고, 가장자리에는 작고 뚜렷한 톱니 모양의 결각이 있었다. 잎자루는 제각기 다른 길이로 뻗었고, 중간 부분이 긴 타원형으로 부풀어 있었다. 뒤집어 보니 잎자루의 생김새가 확연하게 보였다.
이런 잎과 줄기의 형태는 마름이 뭍에서 다시 물로 되돌아가며 마주한 여러 어려움을 풀어낸 해법들이다. 첫 번째가 바로 큐티클층이다. 잎은 수면에 바로 떠 있어서 항상 물에 닿는다. 잎 표면이 젖으면 기공이 막히고 제대로 호흡하지 못해 광합성 능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래서 잎을 젖지 않게 지키는 막을 만들어냈다. 그 막이 바로 큐티클층이다. 잎 표면을 아주 얇고 매끈하게 덮고 있는 보호막이다. 이 막은 물을 밀어내는 성질이 강해, 잎에 물이 닿아도 금방 굴러 떨어지도록 하는 방수막이다. 이 덕분에 마름의 잎은 비나 물결 혹은 바람에 튄 물방울에도 쉽게 젖지 않는다. 또한 큐티클층은 곰팡이나 세균이 잎 표면에 붙어 번식하는 것을 억제해 잎의 수명을 늘리고, 잎 조직이 물속의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것도 막아준다. 이 얇은 층 덕분에 마름의 잎은 수면에 떠 있으면서도 기능을 잃지 않고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잎자루 중간 부분이 볼록하게 부푼 공기주머니다. 물속은 조금만 깊어져도 빛이 급격히 줄어들어 잎이 물속에 잠겨 있으면 광합성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잎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장치가 필요했다. 바로 잎자루 속의 공기주머니다. 겉에서 보면 단순히 통통하게 부풀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조직이 스펀지처럼 구멍이 많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크고 작은 방에 공기가 채워지면 부력이 생긴다. 물에 뜨는 구명조끼 원리가 마름의 잎자루 안에서 작동하는 셈이다.
세 번째 해법은 길고 유연한 줄기다. 잎은 물 위에 뜨면서도 뿌리는 물속 바닥의 진흙에 박혀 있어야 하니, 이 둘을 잇는 줄기는 자연스레 길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수지의 수심은 일정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변하며, 물속은 바람과 물결, 들고나는 물의 흐름으로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런 수위 변화와 움직임을 견디려면 줄기가 물살에 맞춰 부드럽게 흔들려야 했다. 그래서 마름의 줄기는 가늘고 유연하게 발달했다. 조금 전에 줄기를 당겼을 때 길게 따라오면서도 쉽게 끊어지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유연한 줄기 덕분에 마름은 바닥에 뿌리를 단단히 고정한 상태에서도 잎을 늘 수면 위에 넓고 둥글게 로제트로 펼쳐 놓고 살아갈 수 있다.
마름의 선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시가 돋은 열매다. 마치 소의 뿔처럼 솟아있다. 이 가시는 물고기나 다른 동물이 쉽게 먹지 못하게 하는 방패이자, 진흙에 내려앉은 열매가 물결에 밀려 쉽게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작은 닻이었을 것이다. 오늘 마름을 찾으러 나온 이유도 이 열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먹을거리가 충분하지 않은 시절에는 물밤이라고도 부르며 간식거리로 즐기고 때로는 허기를 달래는 요깃거리로 삼았다. 껍질을 벗겨 맛을 보니 아삭한 식감이 느껴졌다. 어릴 적에 먹었던 정확한 맛은 잊히고 없으나, 손끝에 느껴지던 날카로운 가시의 감촉과 논밭을 오가면서 보던 마름이 자라던 둠벙의 풍경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 작은 열매 하나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문이 되었다.
* 글벗 라이테 작가님께서 마름을 소개해달라며 남겨주신 댓글이 이 글을 쓰게 한 출발점이었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쓴 이후 처음으로 받은 제안(?)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마름을 찾아다니고 썼습니다. 꽃을 보여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