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봄 사이를 걷다

여기엔 성급한 환호도 뒤처진 불안도 없다

by 이른아침

며칠 전 꽃이 피었던 큰개불알풀이 궁금해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더 많은 꽃이 반겨줄 거라 기대되었다. 엊그제 내린 눈이 녹았고 햇살이 좋은 데도 예상과 달리 꽃이 피었던 자리는 조용하다. 두어 발자국 앞에서도 선명하던 꽃이 보이지 않는다. 몸을 낮춰 가까이 보니 꽃잎은 형체도 없이 뭉개져 있다. 한나절 눈이었으나 풀 위에 쌓였고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내렸었다. 섣부른 봄의 기운을 믿고 핀 꽃이 설한(雪寒)을 견디기엔 너무 여렸던 모양이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기 위해 들었던 깃발이 꺾인 흔적 앞에서 한동안 무릎을 펴지 못한다. 시큰한 통증이 번져온다.


하지만 쉽게 일어날 수 없다. 뭉개진 꽃잎을 뒤척여 본다. 잎사귀는 초록빛을 잃지 않았고 꽃봉오리는 도톰하게 부풀었다. 조심스레 흙도 헤쳐본다. 눈 녹은 물이 스며든 흙은 보슬보슬하고 뿌리는 깊다. 햇살 한 줌, 바람 한 줄을 예민하게 살피며 다시 일어설 순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머지않아 지난번보다 더 짙은 보랏빛 꽃을 피울 것이다. 허리를 펴며 일어서는데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봄이 오는 자취를 더 찾아보기로 한다. 방금 마주한 의연한 큰개불알풀이 발걸음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겨울 내내 변함없던 아파트 단지의 화단 곳곳으로 계절의 흐름을 알리는 은밀한 신호들을 찾아 나선다.


메마른 듯 보이던 조팝나무의 갈색 줄기마다 봄기운이 새롭다. 꽃봉오리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르고, 이를 단단히 감싸던 비늘조각 사이로 틈이 보인다. 머지않아 저 좁은 틈을 비집고 꽃망울들이 일제히 터져 나올 것이다. 뜨거움을 참지 못한 튀밥이 튀듯 하얗게 피어날 작은 꽃들의 잔치를 성급하게 그려본다.


작년 이른 봄에 가장 일찍 꽃 소식을 전해주었던 매실나무를 찾아간다. 아파트 단지에서 나무 위치를 찾아가는 일은 이제 어렵지 않다. 조팝나무보다 한 걸음 앞서 비늘조각을 열어두고 있다. 벌어진 틈 사이로 보이는 꽃받침의 색깔이 선명하다. 어떤 나무는 발그레한 붉은빛을 띠고 이웃한 다른 그루는 싱그러운 초록빛을 머금었다. 머지않았다. 몇 차례 봄바람이 가지를 스치면 품고 있던 색깔대로 매화가 피겠다. 진한 매화향을 따라 벌도 하나둘 찾아들겠지.


매실나무 위로 까치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물고 소리 없이 날아오른다. 날아간 자리를 눈으로 쫓는다. 건너편 키 큰 소나무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제법 둥글게 모양을 갖춘 둥지 곁으로 다가서더니 머리를 까닥거리며 물고 온 나뭇가지를 적당한 틈새에 쑤셔 넣는다. 제대로 엮이지 않는지 발돋움을 하거나 꼬리를 구부리며 안간힘을 쓴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와 똑같은 방식으로 온몸을 움직여 둥지에 나뭇가지를 집어넣는 사이 먼저 왔던 녀석은 짝과 눈도 마주칠 틈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새로 짓는 둥지의 위치를 노출하지 않을 심산인지, 평소 '깍깍'대는 소란한 울음 대신 정적이 흐르고 날갯짓조차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둥지에 접근할 때는 늘 조심스럽다>

까치의 경계심을 자극할 셈으로 둥지가 있는 소나무 가까이에 다가선다. 나무 밑동 주변에는 까치가 둥지를 쌓다 떨어뜨린 마른 나뭇가지가 흩어져 있다. 그 잔해 사이로 유럽점나도나물의 어린잎이 제법 푸릇푸릇하다. 토끼풀과 새완두도 지금은 추위의 기세에 눌려 움츠리고 있으나 까치가 둥지를 마무리할 무렵이면 잎은 더 짙어지고 줄기는 왕성하게 뻗어갈 것이다.


까치가 날아가 버린 소나무를 지나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본다. 울타리 삼아 심어진 회양목과 사철나무, 영산홍은 잎에 여전히 붉은빛을 남겨두고 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견뎌온 지난겨울의 모진 바람을 짐작해 본다. 겨울에 잎이 붉게 변하는 것은 자외선과 냉해를 막아내기 위한 이들 나름의 생존 방식이다. 땅에 바짝 붙어있는 달맞이꽃도 잎이 여전히 붉다. 살얼음과 꽃샘추위가 한두 번 더 찾아올 것을 알기에 붉은 옷을 입은 채 서두르지 않는다.


봄은 언제나 한 가지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큰개불알풀은 꽃피는 순간을 누구보다 먼저 맞으려 앞서 달려가는가 하면 누군가는 남은 추위를 끝까지 지켜보며 붉어진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나 역시 겨우내 봄을 기다려온 만큼 먼저 핀 꽃의 화사함에 눈길을 뺏기기도 하고 차츰 견고해지는 까치둥지를 보며 기대를 품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여전히 붉은 잎을 고수하는 회양목의 기다림 앞에서는 앞서가려는 발걸음을 늦추게 된다. 이곳에 성급한 환호나 뒤처진 불안은 없다.


<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있는 조팝나무와 매실나무 >
< 추위에 움츠러든 유럽점나도나물, 토끼풀, 새완두 >
<겨울에 붉어진 잎이 여전한 회양목, 사철나무, 달맞이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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