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이름을 묻다 Ⅴ

이름에 고향을 새긴 식물들

by 이른아침

“이름에 우리 지역의 지명이 들어있는 식물을 다섯 개만 말하세요?”

십여 년 전에 산과 들로 야생화 탐사를 다니면서 동호인들끼리 묻고 답하던 퀴즈 가운데 하나다. 맞히면 소소한 선물까지 준비되어 있어 나름 경쟁적이었다. “변산바람꽃, 전주물꼬리풀, 모데미풀, 위도상사화...... ” 손가락을 꼽아가며 답을 내놓다가 다섯 번째에서 말문이 막혔다. 때로는 산이나 섬 이름이 포함된 식물을 대보라는 문제도 냈다. 이처럼 식물 이름에는 지명이 포함된 경우가 제법 많고 그 유래를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사람들은 왜 식물 이름에 지명을 넣어 불렀을까? 거기엔 어떤 발견의 이야기와 생태적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따라가 보자.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서 해당 식물을 처음 발견했기 때문이다. 변산바람꽃은 1993년에 전북대 선병윤 교수에 의해 전북 변산에서 관찰되어 세상에 알려진 식물이다. 처음 발견된 장소를 기념하고 알리기 위해 그곳 지명을 가져와 이름을 지었다. 막 식물에 관심 가질 무렵에 이 꽃을 만나러 무작정 변산으로 갔다. 정확한 개화 시기와 장소를 모른 채 떠난 첫걸음에서는 허탕을 쳤다. 다음엔 내변산탐방지원센터 문을 두드렸다.

“다리 건너 길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 왼쪽 길로 가보세요. 지정된 등산로를 벗어나진 말고요.”

직원의 도움받고서야 낙엽 틈새로 고개를 내민 작은 꽃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변산에만 사는 줄 알았던 이 꽃을 진안 마이산, 아산 망경산, 군포 수리산에서도 만났다. 한라산 계곡에서도 이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봄이 가까이 왔음을 실감했다. 그렇다고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아니라서 상당한 발품을 팔아야 한다.


남산제비꽃도 처음 발견된 곳이 남산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산이라면 보통 서울 남산을 떠올리기에 이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남산은 그곳에만 있지 않다. 경주에도 있고 순천 등 곳곳에 있다. 우리 선조들은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을 그냥 ‘남산’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산제비꽃은 야산 기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웃 같은 꽃이다. 이런 이유로 최초 발견 장소를 서울 남산으로만 특정하기 어렵다는 설명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동강할미꽃도 마찬가지다. 1997년 동강 주변 절벽에서 한 생태 사진가의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알려졌다. 이후 식물학자들의 연구를 거쳐 신종으로 확인되어 2000년에 이영노 박사에 의해 발견지인 동강을 붙여 명명되었다. 정선과 평창, 영월 일대 석회암 지대에서만 서식하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당시 추진되던 동강댐 건설 계획이 환경보호를 이유로 2000년 6월 백지화되는 데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 식물로 알려졌다.


변산바람꽃과 동강할미꽃은 비교적 최근에 명명되고,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다. 변산바람꽃이 변산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넓게 분포한다면, 동강할미꽃은 석회암 지대만을 고집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까다로운 성미 탓에 삶터가 제한되어 서식지 교란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수년 전에 찾아간 동강 주변 절벽에서도 작은 틈에 매달려 살아가는 모습이 위태롭기도 했다. 다행히 주민들의 보존 노력으로 서식지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돌 틈에 자리잡은 변산바람꽃> <절벽에 사는 동강할미꽃>

지명이 들어간 식물 가운데에는 먼 곳에서 온 이들도 있다. 붉게 물드는 중국단풍이나 길쭉한 솔방울이 매력인 독일가문비는 도로변이나 공원에 심기 위해 관상수로 데려왔다. 반면에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들어와 자리 잡은 이들도 있다. 미국쑥부쟁이나 유럽점나도나물은 근대 무렵 외국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전파되었다. 지금은 낯선 환경에 적응을 끝내고 우리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식탁에 자주 오르는 채소에도 먼 고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당근이다. 익숙한 채소라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토종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이름 속의 당(唐)은 당나라를 가리킨다. 당근은 원산지인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16세기 경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당나라에서 온 뿌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호박 역시 마찬가지다. 이름의 호(胡)는 북쪽 지역의 이민족을 일컫던 말로 ‘오랑캐 땅에서 온 박’이라는 뜻이다. 원산지 아메리카 대륙을 떠나 먼 길을 돌고 돌아 우리 곁에 온 것을 이름으로 증명하고 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식물 이름은 퀴즈에서 맞춰야 할 대상이거나 외워야 할 목록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조금 달리 보인다. 이름에 담긴 지명 하나하나가 우리와 식물이 만난 첫 장소의 기억이며 높은 산과 먼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온 여정이 떠오른다.


오늘 낮에 산책길에서 만난 제비꽃에게, 저녁 식탁에 오른 당근에게 고향을 물어보면 어떨까. 이미 알고 있다면 아는 체해도 좋겠다. 아니면 그들의 고향으로 찾아가도 된다. 매년 3월 하순 경에 동강 일원에서 동강할미꽃 축제가 열린다. 절벽을 지킨 그들을 직접 눈으로 볼 기회다. 당장 떠나기 어렵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서 내가 사는 지명을 넣어 검색해 보자. 운이 따른다면 우리 동네의 이름을 품은 식물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찾은 해당 식물을 자연활동 공유 플랫폼 ‘네이처링’ 검색창에 넣어 보자. 어디에서 관찰되었는지 실시간 기록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내일은 그들을 만나러 가볼까.


< 이름에 지명이 들어있는 식물 >
• 도시 : 서울제비꽃, 부산꼬리풀, 수원잔대, 울산도깨비바늘, 포천구절초
• 마을 : 회양목, 광릉요강꽃, 광릉골무꽃, 완산제비꽃, 풍산가문비, 의성개나리, 정선바위솔
• 산 : 한라부추, 태백제비꽃, 금강초롱꽃, 설악눈주목, 지리고들빼기, 가야산잔대, 한계령풀
• 섬 : 제주황기, 제주조릿대, 울릉국화, 완도현호색, 우산제비꽃, 풍도바람꽃
• 절 : 백양더부살이, 대흥란, 내장고사리, 화엄제비꽃
• 해외 : 일본목련, 미국쑥부쟁이, 미국능소화, 인도고무나무, 시베리아살구, 만주바람꽃, 호밀, 호두, 당아욱, 당단풍나무, 양파, 양배추, 양버들, 서양측백



* 한 편으로 끝내려고 했던 식물 이름에 대한 글에 관심도 많이 가져주시고 저 또한 이 글을 쓰면서 고민하고 배우면서 다섯 편까지 길어졌습니다.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또 이야기가 될만한 생각이 떠오르면 식물명에 대해 추가로 써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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