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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Oct 18. 2024

들깨, 향이 진해질 때마다 나도 진심이다

누구든 들깨향에 취하고 만다

들깨 향이 밭고랑을 넘어왔다. 건너편 밭에서 들깨를 털고 있었다. 깨를 털 때 향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향은 성장 초가엔 희미하게 느껴지다가 한여름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면서 더 짙어진다. 그러다 열매가 영글어갈 때는 바람에 흔들려 실려오기도 하고 옆을 스치기만 해도 옷자락에 묻어 따라온다. 이처럼 향은 들깨가 성장하면서 점차 강해지며 맛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강렬하다. 들깨가 커가면서 향이 진해질 때마다 나도 함께 기뻤고 마음을 다했다.


어릴 때부터 깨 터는 일은 싫어도 후드득 깨 떨어지는 소리와 고소한 향은 좋았다. 참깨와 들깨는 수확하는 방법이 좀 다르다. 잎이 누렇게 변할 무렵에 베는 건 같지만, 참깨는 꼬투리가 있는 윗부분을 하나로 묶고 줄기 밑부분은 세 갈래로 묶어 세워서 말리고, 들깨는 묶지 않고 옆으로 나란히 눕혀 말렸다. 참깨는 꼬투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도록 들고 가볍게 두드려 털고 다시 말리고 털기를 두세 차례 반복한다. 들깨는 한 번에 털어냈다. 요즘이야 건조기나 탈곡기 같은 기계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는데, 예나 지금이나 자연에 맡기고 의존한다.

     

들깨를 털어내면 온갖 곤충들도 함께 떨어진다. 들깨 향은 사람뿐 아니라 곤충에게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유혹이다. 열매 속 즙을 빨아 먹으려고 오고 쉬기 위해서도 온 녀석들일 테다. 바닥에 떨어진 곤충은 느릿느릿 굼실대다가 갈 길을 찾아간다. 베고 옮기고 털면서 흔들린 깻대의 요동이 바람에 흔들리는 자연스러운 움직임과는 분명히 달라 위험을 알아챌만한데 이제야 소란스러운지 모르겠다. 향기에 취했던 걸까? 부드러워진 가을 햇살에 긴장을 늦추고 말았던 까? 내가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빠른 날갯짓과 정지 비행으로 꿀을 따는 꼬리박각시>
<위부터, 줄점팔랑나비, 남방노랑나비, 배짧은꽃등에, 등검은말벌, 황띠배벌, 어리호박벌>

꽃에도 많은 곤충이 찾아온다. 들깨꽃이 한창일 잠시만 지켜봐도 벌, 나비, 꽃등에, 파리 같은 다양한 곤충이 온다. 그만큼 향기가 진하고 가져갈 꿀이 많다는 방증이다. 곤충이 많이 오는 사실을 사마귀도 알아챘다. 꽃 근처에서 꼼짝없이 인내하며 은밀하게 사냥할 기회를 엿본다. 먹이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앞다리를 뻗어 단박에 낚아챌 요량이다. 그 순간을 보고 싶었으나 내 인내심은 금방 바닥이 다.


들깨꽃을 관찰하면서 잎과 꽃을 이리저리 들추다가 손가락에 느껴진 자극에 놀란 소리와 함께 손을 털어냈다. 사마귀도 놀라 저만치 떨어져 나간다. 내가 그놈보다 몸집이 훨씬 크지 않았다면 먹잇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무심코 꽃을 보다 벌에 쏘이거나 뱀을 만나 질겁한 순간도 늘 순식간에 일어났다. 꽃에는 달콤한 꿀 같은 기회가 있으면서도 목숨을 거는 아찔한 위험이 엇갈린다. 꽃이 있는 곳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매복, 사냥 중인 거미와 사마귀>

들깨꽃은 하얀색이며 통꽃으로 가장자리가 4개로 갈라진다. 아래쪽 꽃잎은 다른 꽃잎보다 더 길어 곤충이 내려앉기 편한 장치인 셈이며 위쪽 꽃잎은 심장 모양으로 파여 있다. 위아래 꽃잎이 마치 입술처럼 생겨서 입술모양꽃이라 한다. 나머지 2장은 옆쪽에 위치하며 꽃 전체로 좌우대칭을 이룬다. 꽃잎 안팎으로 털이 나 있는 특징이 있는데, 털의 역할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꽃잎에 난 털의 유무는 식물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요소가 된다.


들깨꽃은 작다. 작은 꽃을 잘 보이기 위해 긴 꽃줄기에 여러 개 꽃이 줄지어 무리로 피며, 피는 순서도 꽃줄기 아래에서 위로 순차적으로 올라가며 10일 정도 차이를 두어 핀다. 꽃받침은 초록색이며 꽃과 씨방을 감싸 보호한다. 꽃이 지고 열매가 커가면 꽃받침은 아랫부분이 부풀어 호리병 모양이 된다. 정상적으로 발육하꼬투리 안에 열매 4개가 들어 있다.


이처럼 꽃가루받이를 위해 향기와 꿀, 꽃 모양과 장식에 많은 에너지와 정성을 쏟았으면서도, 들깨는 꽃 피기 전에 수술이 이미 성숙하여 제꽃가루받이를 주로 한다. 제꽃가루받이를 통한 종족의 번식과 딴꽃가루받이를 통한 유전적 다양성 확보 모두를 위한 전략이다. 딴꽃가루받이를 위한 투자는 우리 사회가 국방, 치안, 소방과 같은 안전에 대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소홀히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꿀풀과 집안 식물로는 꿀풀, 박하, 배초향, 골무꽃, 석잠풀, 익모초, 층층이꽃, 향유, 오리방풀 등이 있으며 향기가 특별히 강한 식물이 많다. 박하와 배초향은 잎을 문지르면 진한 향을 풍기며 배초향은 방아잎이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며 추어탕에 넣기도 한다. 많은 꿀풀과 꽃이 꽃줄기를 돌며 사방을 향해 피는데 비해 향유와 꽃향유는 들깨처럼 꽃이 한쪽을 향해 핀다.

<한쪽 면에 치우쳐 꽃이 피는 들깨, 향유, 꽃향유>

들깨는 다양하게 요리되는 음식 재료이고 재배도 어렵지 않아 텃밭에서 인기 있는 작물이다. 많은 작물이 잎, 열매, 뿌리 중에 먹는 부위가 하나지만 들깨는 잎과 열매를 먹는 몇 안 되는 작물이다. 게다가 깻잎은 쌈으로 장아찌로 김치로 향신료로 쓰임이 다양하고 열매 또한 가루로 기름으로도 맛을 돋우는데 빠지지 않는다.


거기다 들깨는 지난해에 떨어진 씨앗이 자연적으로 발아하므로 주말텃밭이라면 일부러 파종하거나 모종을 심지 않아도 되고, 몇 그루만으로도 충분히 먹을 정도로 잎이 넉넉하다. 녹병 피해가 있지만 병충해에도 강하고 보살피지 않아도 잘 자란다. 그래서 쓸모 많은 작물이면서도 밭 가운데를 차지하지 못하고 가장자리에 심어지기 십상이다. 관심 주지 않아도, 어디에 자리하더라도 들깨 향은 늘 한결같다.


초록잎이 싱그러웠던 여름날들이 지나고 여기 텃밭에서 아낌없이 내주던 작물도 거칠게 자라던 풀들도 잎이 누렇게 변해가는 가을을 맞았다. 나도 인생의 가을을 맞이했다. 아니 이미 겨울에 들어섰을까. 들깨 향이 퍼지는 텃밭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하루가 내게 주어졌다. 주어진 오늘도 한결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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