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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Oct 25. 2024

메밀꽃, 바람 불어도 괜찮아

무리로 함께 하면 바람에 더 빛나

메밀꽃을 보러 왔다. 아침에 불현듯 마음이 들떠 왔다. 며칠 전에 강변을 거닐다 한두 개체씩 자라는 메밀꽃을 보았었다. 그때 본 한두 송이 메밀꽃으론 성이 차지 않아 밭에서 무리 지어 하얗게 빛나는 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메밀꽃 암술과 수술의 길이 차이를 다시 확인하고 또 강변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메밀과 밭에서 재배되는 메밀의 생태적 차이를 비교하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메밀밭 장소를 인터넷 검색하니,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었던 봉평과 메밀 주산지인 제주도 이외 여러 지역에서도 메밀밭을 가꾸고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었다. 지역 관광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노는 땅이나 마을 주변에 심어 농촌의 경관을 아름답게 만드는 ‘경관작물’이라는 이름으로 지원금을 받아 재배될 정도였다. 메밀 작물이면서도 꽃으로 사랑받는 관광자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오래전부터 알려진 메밀밭이 있어 찾아왔다. 동네 뒤로 이어진 오솔길을 걷고 긴 숲길을 올라 메밀꽃을 만난다. 산비탈을 개간한 비스듬한 경사지에 초록과 흰색이 뒤섞인 꽃밭이 펼쳐진다. 아침에 다시 읽은 「메밀꽃 필 무렵」에서 메밀밭을 묘사한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는 대목과 비슷한 풍경이다.


소설에서는 달빛 아래 풍경이었다면 오늘 여기에서는 맑은 햇살과 거센 바람 속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집을 나설 때부터 불던 바람은 여기도 여전해서, 메밀은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크게 흔들리며 물결치듯 일렁거린다. 바람이 시작되고 흩어지는 것에 맞춰 같은 방향으로 누었다가 일어나기를 되풀이한다. 누우면 줄기의 초록이 더 뚜렷해지고 일어서면 하얀 꽃이 더 선명하다. 바람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움직이면서 빛깔을 자유롭게 바꿔 온 밭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다.

메밀꽃을 가까이 보려는데 바람이 쉬질 않는다. 꽃줄기를 잡고 들여다본다. 마치 꽃잎만 있고 꽃받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경우 학술적으로 꽃잎과 꽃받침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고 하며 ‘꽃덮개(꽃덮이)’라는 용어를 쓴다. 꽃덮개는 화려하게 치장하여 곤충을 유인하고 암술과 수술을 에워싸 보호하는 꽃잎과 꽃받침 역할을 모두 수행한다. 꽃덮개는 흰색으로 5장이다. 수술은 8개로 꽃밥이 붉으며, 암술은 1개에 끝부분이 3갈래로 갈라져 있다. 암술과 수술 아래에는 구슬처럼 생긴 노란 꿀샘(밀선)이 있어 꿀을 분비한다. 보통 꿀샘은 꽃에 위치하는데 꽃이 아닌 잎자루 등에도 자리한 꽃밖꿀샘이 있다. 꽃밖꿀샘은 복숭아나무, 벚나무, 참깨, 갈퀴덩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며칠 전에 본 암술과 수술의 다름을 다시 확인하려고 더 자세히 살폈다. 메밀은 두 종류로 꽃이 피는데, 암술 길이가 수술보다 더 긴 장주화(長柱花)와 반대로 암술 길이가 수술보다 짧은 단주화(短柱花)로 구분된다. 강변에서 본 꽃처럼 이 메밀밭에서도 장주화와 단주화가 뚜렷하게 관찰되었고, 이들은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는데 내 관찰에서는 단주화가 더 많았다. 이런 이형화주(異形花柱) 현상이 나타나는 식물은 개나리, 미선나무, 앵초 등이 있다.


같은 길이의 암술과 수술 꽃끼리(장주화+장주화, 단주화+단주화)는 수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나, 다른 형태의 꽃끼리는 수정이 잘 이루어진다. 이처럼 같은 형태의 꽃 사이에 수정이 잘 안 되거나, 한 꽃에 있는 암술과 수술끼리 자기 꽃가루가 자신의 암술머리에 묻어도 수정이 되지 않는 식물도 상당한데 이런 현상을 자가불화합성이라고 한다. 자가불화합성은 딴꽃가루받이를 유도하여 근친교배 확률을 낮춰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좌)장주화, (우)단주화>

식물은 딴꽃가루받이를 위해 자가불화합성 이외 몇 가지 방안을 마련한다. 먼저, 암술과 수술을 물리적으로 분리(암수딴꽃)하는 전략이다. 하나의 꽃 안에 암술만 있는 암꽃과 수술만 있는 수꽃을 피우는 전략으로, 이때 암꽃과 수꽃이 한 그루에 피면 암수한그루(예 : 호박, 옥수수, 밤나무)이고 아예 각기 다른 그루에서 피면 암수딴그루(예 : 시금치, 은행나무)라 다. 또 다른 방안으로, 하나의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이 모두 있지만(암수한꽃) 암술과 수술의 성숙 시기에 차이를 두어 최대한 자기 꽃가루로 수정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한다.


며칠 전 강변에서 본 메밀은 밭을 나와 야생에 적응하여 키도 크고 꽃도 무성해 보였다. 산을 개간한 이 밭에서도 그늘진 숲 가장자리만 생육이 부실할 뿐이지 빽빽하게 심겼어도 웃자람 없이 거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강인해 보인다. 이처럼 들판이든 밭이든 햇살만 잘 들면 척박한 땅에서도 환경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잘 자란다. 이런 이유로 땅이 경사지고 거친 강원도 산간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실컷 꽃을 보고 밭 입구를 막 나서는데, 엄마 손을 잡고 막 밭에 들어오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아휴~ 똥 냄새”라며 코를 잡는다. 냄새의 정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나도 메밀밭에 들어서면서 퇴비에서나 풍기는 구린 냄새를 잔잔하게 느꼈었다. 후각세포는 쉽게 피로해져 같은 냄새에 둔감해졌기 때문에 잊고 있던 냄새였다. 메밀꽃에 코를 가까이하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좌부터, 꽃등에, 꼬마꽃등에, 점박이꽃검정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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