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 용어 토막 정리] 소비자 금융
앞선 글들에서 정부가 카드 가맹점 수수료를 계속 인하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정부의 조치 덕분에 가맹점들은 좋지만 카드사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대로 가맹점 수수료가 계속 줄면 카드사는 정말 위태롭다. 다른 살 길을 찾아보려 해도 이전에 저지른 실수로 큰 돈줄인 '소비자 금융'의 상당 부분을 놓쳤기 때문이다.
소비자 금융은 뭐고 국내 카드사들은 어쩌다 그 귀한 걸 놓쳤을까? 오늘 한 번 알아보자.
신용카드는 크게 두 가지 이용 방식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판매 신용이다. 말이 어려운데 사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용 방식이다. 김밥천국이든 편의점이든 카드 가맹점에서 카드를 긁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신용을 담보로 외상 구매하는 방식을 얘기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두 번째가 우리가 얘기해볼 소비자 금융이다. 우리에겐 현금 서비스라는 말로 더 많이 알려졌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소비자 금융은 내 신용을 담보로 현금을 대출하는 방식을 이른다.
판매 신용이 내 신용을 통해 물품/서비스(용역)를 구매하는 것이라면 소비자 금융은 돈 그 자체를 빌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는 판매 신용 중심으로 카드 산업이 발달했다. 일단 신용카드 관련 법에서부터 판매 신용을 중심으로 신용카드를 정의하고 있다.
물품의 구입 or 용역의 제공을 받을 수 있는 증표
- 여신전문금융법 2조 3항 요약
국내 것만 봐서는 감이 잘 안 잡힐 수도 있으니 신용카드의 원조 미국에서 신용카드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금전, 재화, 용역을 획득할 수 있는 증표
국내와 달리 미국에선 신용카드의 법적 정의에 '금전'이라는 말이 들어갔다. 이는 국내보단 미국에서 소비자 금융에 더 힘주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차이가 시장에 반영된 걸까? 국내와 미국 카드사는 돈 버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국내 카드사에겐 판매 신용 중심의 가맹점 수수료가 주요 수익인 반면 미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 카드사들도 물론 가맹점 수수료로 돈을 벌긴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리볼빙 결제라는 소비자 금융 서비스를 통해 가장 많은 돈을 번다.
리볼빙 결제가 뭘까?
리볼빙 결제는 지정일에 결제 대금의 일부만 결제하고 잔액을 이월하여 결제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월된 금액에는 이자가 붙는다.
할부 방식과는 달리 정해진 기한은 없다. 하지만 갚지 않으면 점점 이자가 붙으니 고객에겐 최대한 빨리 상환할 동기가 생긴다.
미국 카드사들은 위와 같은 리볼빙 결제를 통해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이미지를 한번 살펴보자.
오래된 자료라 현재는 많은 부분이 바뀌었겠지만 그래도 흐름은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0년 전 미국과 우리나라 카드사는 수익 면에서 위처럼 큰 차이를 갖고 있었다.
미국 카드사는 소비자 금융(리볼빙 이자)으로 돈 벌고 한국 카드사는 가맹점 수수료로 돈 벌고.
물론 현재는 국내 카드사들도 소비자 금융 확대를 꾀하고 있다. 리볼빙 결제 서비스는 물론 현금 서비스/카드론 등도 확대하는 중이다. 리스키하지만 가맹점 수수료가 계속 인하되기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과거에 카드사가 저지른 실수로 형성된 한 가지 요인이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카드사가 저지른 실수는 뭐고 그로 인해 형성된 방해 요인은 뭘까?
2000년대 초 신용카드 업계는 정부 지원에 힘입어 급속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카드사들은 정부도 뒤에서 밀어주겠다 미친 듯이 카드 회원을 모집했다. 고객 신용 평가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카드 사용액은 폭증했다. 98년 63조였던 사용 금액이 2002년엔 622조가 되었다. 4년 만에 10배 가까이 급증한 것이다.
당시는 외환위기 직후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 카드사로부터 돈을 빌렸다.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는 이율이 높긴 했지만 은행보다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어서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활용되었다.
그래서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 카드사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던 것이 소비자 금융 서비스였다. 2002년 카드 이용 금액 중 현금 서비스 비중이 약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대란이 터졌다. 제대로 된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카드를 발급 받은 사람들이 카드값을 못 갚기 시작한 것이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카드사들은 그제야 위기를 알아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서 그들은 자체적으로 위기를 수습하지 못했다. 카드값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 즉 신용불량자가 전례 없이 폭증했다. 97년 말 143만 명이었던 신불자 수가 2004년 말에 3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는 곧 카드사의 재정 파탄을 의미했다. 카드사들은 '여신 전문' 즉 돈을 빌려만 줄 수 있는 금융 회사였기에 은행처럼 대규모의 자금을 확보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엔 정부가 나섰다.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소위 ‘빚잔치’를 무마하려 했다. 국민/우리 등 은행계 카드사들은 모(母) 은행과 합병하는 방식을 택했다.
삼성/LG 등 사기업 카드사들은 모(母) 기업의 자본을 투입해 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워낙에 큰 사건이었기에 웬만한 자본 투입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카드 대란이 전부 카드사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카드사의 합작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드사는 사건의 주체로서 책임이 크고 사회 또한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잠잠해진 현재에도 카드사는 여전히 카드 대란의 망령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 실존하는 망령은 카드사에 붙어 금전적인 방식으로 채근하고 있다.
2002년의 카드 대란 후 카드사에겐 정부 규제라는 망령이 들러붙었다. 그리고 그 망령은 카드사가 소비자 금융이라는 돈줄을 잡는 것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는 기존에 신용카드를 부흥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카드 대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2002년 카드사에게 현금 대출 위주의 영업 행태를 개선하도록 요구했다. 현금 서비스와 카드 대출을 포함한 소비자 금융 업무 비중을 단계적으로 줄이라 한 것이다.
위의 그래프를 보면 알겠지만 2002년을 기점으로 현금 서비스가 많이 축소되었다. 정부는 2007년 말까지 소비자 금융의 업무 비중을 50% 이하로 줄이도록 주문했다.
또 정부는 카드사가 레버리지 비율을 6배 내로 맞추도록 법을 만들었다. 레버리지 비율은 총자산을 자기 자본으로 나눈 값인데 부채 의존도라고도 한다.
레버리지 비율(부채 의존도).. 참으로 어려운 말이니 일단 여기선 한 가지만 알고 가자. 카드사가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는 소비자 금융을 하면 레버리지 비율이 높아진다.
그래서 카드사는 쉽사리 소비자 금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함부로 했다가는 레버리지 비율의 합법 기준을 넘기게 될 테니 말이다.
카드사는 규제 완화를 꾸준히 주장하고 있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왜냐면 정부가 아직까지 카드 대란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카드사 입장에선 억울할 만하다. 어찌 보면 자신들이 경주마처럼 달리게 된 건 정부에서 부추긴 탓도 있을 텐데 이제 와서 모르쇠로 일관이다.
오히려 현재 정부는 카드사하고는 등 돌리고 서서 핀테크 간편 결제 회사들과 짝짜꿍하고 있다. 간편 결제 업체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사업에 카드사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결국 가맹점 수수료도 계속 내려가는 상황에서 소비자 금융이나 새로운 사업을 할 수도 없는 사면초가 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카드사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호시절은 다 갔구나
살펴보면 카드사가 정부에게 토사구팽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카드사도 분명 맹목적으로 자신의 사업을 확장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마지막 정리를 한번 해보도록 하자.
1. 정부의 지속적인 가맹점 수수료 인하
2. 카드사가 살 길은 소비자 금융
3. But 카드 대란 후 강화된 규제
4. + 이젠 간편 결제 밀어주는 정부
5. 카드사, 어디로 가야 하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신용카드 업계가 사면초가처럼 보이는 현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한번 지켜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