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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Jan 04. 2023

단편소설 <DivE>

숨쉬듯 쓴 단편소설 #1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두 번 정도 모임을 진행했는데 결과물을 묵혀두는 게 아쉬워 하나씩 업로드할 생각이다. 저번 달의 소재는 다이빙이었다. 아래는 다이빙을 소재로 내가 쓴 단편소설이다.



DivE


재생 시작





11월 5일


오늘 너에게 선택을 했냐고 물었지. 저 바다 너머로 지는 노을을 보던 너는 아직이라고 답했고. 근데 난 너가 이미 답을 내렸다고 생각했어. 넌 줄곧 저 바다 너머를 보고 있었거든.


누가 알았겠어. 매일 아침 우리가 이곳에 나와 했던 모닝 페이퍼가 지평선 테스트 중 하나였다는 걸. 아마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모닝 페이퍼에 평소 고민들을 털어놓았을 거야. 42명 그리고 마마가 전부인 이 섬에서의 사소한 고민들. 하지만 너는 달랐고 그래서 지평선 테스트에 통과한 거지.


같이 파도 소리 들으며 노을지는 걸 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주홍빛 노을에 물든 너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둘 걸 그랬다. 아마 카메라를 들이민 순간 넌 민망해했겠지만..


11월 6일


오늘부터 매듭 주간이 시작되었어. 42명이 돌아가며 각자의 삶을 매듭짓는 시간인데 다들 발표 준비하느라 고생을 했지. 18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정리해야 돼서 다들 고민이 많았을 거야. 나도 그랬고.


그래도 오늘 먼저 발표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즐거웠어. 그동안 다들 붙어 살았지만 새로 알게 된 점도 있었고 깜짝 발표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몇 명의 친구들은 발표 자리에서 자신의 연인을 공개했고 다들 축하의 박수를 건넸어. 이렇게 공개적으로 연인 사이를 밝힌 친구들은 아마 다이브 전에 결혼식을 올리겠지.


내 발표 순서는 내일 모레인데 벌써부터 긴장 돼. 사실 발표에 너를 등장시키고 싶었어. 우리는 줄곧 단짝으로 지내오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으니까. 근데 너가 발표 준비에 너무나도 빠져있어서 결국 말을 못 했지.


대신 내 발표엔 너의 사진이 많이 등장할 거야. 발표에서 내가 지금까지 기록한 순간들을 영상으로 편집해서 보여줄 거거든. 꽤 마음에 들어. 왜냐면 영상을 틀어놓고 나는 별 말을 안 해도 되니까. 또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해. 친구들 그리고 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래도 열심히 준비했어서 다들 즐겁게 봐주면 좋겠네.


11월 7일


오늘 발표한 친구 중엔 너처럼 지평선 테스트에 통과한 애가 있었어. 그 애와 깊은 얘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래도 평소에 너랑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 둘 다 지평선 너머엔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을 거야.


그 애는 오늘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밝혔는데 결국 에비드가 아닌 다이브를 선택했더라. 지평선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꼭 에비드를 택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기했어. 그래서 그 애의 이야기를 더 유심히 들어보게 됐지.


그 애가 다이브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지평선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거든. 사랑을 위해 저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을 포기한 거야. 아니나 다를까 발표 막바지에 가서 결혼식을 할 거라는 말도 했어.


그 둘의 결혼 얘기를 듣고 모두가 박수를 쳐주었고 마마도 축복을 해주었지. 근데 그 애가 마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더라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근데 이 말을 듣고 마마가 미안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얘기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에게 강조했지. 또 마마는 만약 자원이 풍부했다면 지평선 테스트도 없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해줬어. 한정된 인원만 우주에 보낼 수 있기에 정말 원하고 잘 해낼 수 있는 사람만 보내게 된 거라고.


선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마마는 일과가 끝날 때 자유 의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했어.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을 어떻게 살지 결정하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에 따라야 한다. 마마의 말을 듣고 너를 봤어. 넌 언제나처럼 마마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지.


너의 생각이 좀 달라졌을지 궁금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밤이네.


11월 8일


오늘은 내가 발표를 한 날이었어.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들 앞에 서는 거지만 그래도 긴장되더라. 아무래도 나처럼 발표 시간의 대부분을 영상으로 채운 경우가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 그래도 마마가 매듭을 짓는 방식은 완전 자유라 해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


앞으로 나가 친구들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교실의 불을 내렸지. 어두컴컴해진 교실에서 내 영상이 재생됐고 42명과 마마의 눈동자에 내가 편집한 장면이 비쳤어. 우주에서 별들이 반짝반짝거리는 것 같아 아름답더라.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면 그 장면을 담았을 텐데 아쉬워.


그렇게 친구들과 마마의 모습을 잠시 넋놓고 보다 나도 영상을 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너를 찍은 순간이 나오고 있더라. 편집할 때는 몰랐는데 다 옆 모습이었어. 다른 곳.. 아마 지평선 너머나 아득한 하늘을 보고 있던 너를 내가 찍은 거겠지.


그때 갑자기 좀 서운해지더라. 이게 지난 날 너와 나의 관계였구나.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다른 곳을 보고. 항상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만약 너가 나를 봤더라면 내가 널 좋아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 항상 저 너머를 보며 공상하는 널 좋아한 거니까.


얼마 전에 너가 백상아리 얘기한 거 기억하려나. 여느 때처럼 같이 노을을 보던 중 넌 갑자기 백상아리 얘기를 꺼냈어. 인간이 백상아리를 수차례 수족관에서 사육하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 백상아리는 지능이 높은 애들인데 답답한 수조에 갇혀서 우울증으로 폐사했다며.


그 말을 듣고 나는 인간이 참 잔혹하다는 생각을 했지. 근데 넌 인간도 이 우주에서 사육 당하는 거 아닐까란 말을 했어. 백상아리를 키우려면 대양(大洋)이 필요한데 인간은 어떻겠어라는 말과 함께 말야. 난 인간이란 존재가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한낱 먼지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넌 이 우주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다고 추측한 거지.


평소엔 조용한 애가 이런 얘기할 땐 얼마나 신이 나서 떠드는지 매번 신기하면서도 재밌어. 그리고 이런 천진난만한 너의 모습이 떠올라서인지 섭섭했던 마음이 좀 가라앉더라.


또 영상이 마무리 되고 다들 따뜻하게 박수를 쳐주고 따로 찾아와 칭찬도 해줘서 금세 기분이 풀렸어. 너도 와서 좋았다고 말해줬고. 다들 좋은 말을 해줄 때 부끄러워져서 괜히 맞칭찬을 하거나 말을 돌렸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쑥스러워지지만 그래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어.


근데 이렇게 발표를 마치니까 마음이 좀 편해져. 정말 매듭을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일이 기다려지네. 너는 지난 시간을 어떻게 매듭 지을까.


11월 9일


오늘은 너가 매듭을 발표한 날이었어. 너는 꽤나 비장한 표정으로 앞에 나가 발표를 했는데 나 말고도 다들 주의깊게 들었지. 아무래도 너가 지평선 테스트에 통과한 걸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일 거야.


발표는 역시 너다웠어. 너의 발표는 대서사시 같다고 해야 할까. 너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뭔가 인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했지.


임팩트라는 대재난으로 인류에게 다이브라는 선택지만이 주어진 때도 있었고..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인 셈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지평선 너머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말이 좋았어. 사람마다 그 마음의 크기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지니고 있다는 말.


그리고 뒤이어 너는 에비드를 선택하겠다는 선언을 했지. 다들 그 선언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나도 따라서 작게 박수를 쳤어. 이미 마음속으로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에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여러 감정이 마음속에서 교차하더라. 너는 진짜 우주로 가는 거구나.


너는 환호에 익숙하지 않아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발표를 이어갔어. 제한된 자원을 지원받아 우주에 가는 만큼 맡겨진 소임을 다하겠다고 말했지.


너가 우주에 가면 선배 에비더들처럼 여러 경험을 수집해서 우리에게 보내줄 텐데 어떤 것들을 보내줄까. 너가 보내줄 경험들은 분명 멋질 거라 생각해. 너가 수집했다는 태그가 달려있지 않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너가 우주에 가는 것은 아쉽지만.. 달리 생각하면 너 같이 재능 있는 애가 이곳에 남아있는 건 모두에게 손해겠지. 멋진 경험을 수집해올 에비더는 언제나 부족하니까.


그래서인지 다들 발표가 끝났을 때 다시 큰 박수가 이어졌어. 마마를 비롯해서 모두가 너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너는 부끄러워서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내려왔지만.


발표가 마무리 되고 너에게 찾아가서 언제나처럼 나의 감상을 말해줬지. 그동안 서로의 결과물에 대해 감상을 말해줬는데.. 이렇게 직접 감상을 말해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네. 앞으로는 너가 저 먼 우주에서 보내온 경험들에 감상을 남겨야 할 테니까.


이런 아쉬운 생각을 하다보니 에비드냐 다이브냐 선택을 해야 하는 세상이 야속하게도 느껴져. 정처없이 흐르는 시간도 야속하고..


근데 생각해보니 오늘은 너가 매듭을 지은 좋은 날인데 이런 얘기만 하고 있네. 내일부터 다시 웃으며 남은 시간 행복하게 지내봐야지.


11월 10일


오늘로 모든 친구들의 매듭 발표가 마무리 됐어. 마지막 발표가 끝나고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해 환호했지. 감격스럽고 뭉클한 순간. 우리 모두 잊지 못할 거야.


마마도 축하의 편지를 써와서 읽어주었는데 우리 모두 잘 성장해줘서 고맙다는 얘기였지. 에비드든 다이브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잘 살아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마마의 말을 듣고 나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애들이 울었어. 앞으로 마마와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쿵하고 무겁게 다가온 거지.


마마는 우리 모두를 하나하나 꼭 껴안아 주었는데.. 포옹의 순간엔 울음을 꾹꾹 참았던 애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그래서 한동안 교실이 눈물 바다가 되었어.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마는 어떤 마음일까. 우리 입장에선 한 번의 이별이지만.. 마마는 그동안 자신이 길러낸 자식과도 같은 아이들과 수차례 이별했을 테니까. 길고 긴 시간 예정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건 분명 쉽지 않을 거야.


그거 기억나? 어렸을 때 너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섬에 대해 궁금하다고 도서관에 가자고 했던 거. 그 날 너는 도서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섬의 역사가 정리된 책을 찾아냈지. 그리고 이내 엄청나게 흥분해서 나를 불렀고 우린 그 날 이 섬과 마마에 대해 알게 되었어.


책에선 우리의 정신을 가상현실로 옮기는 다이브 기술이 불완전하다고 했지. 그럼에도 우린 임팩트라는 갑작스런 재난으로 그 기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기술의 불완전함이 가져온 비극 부분을 읽고 우리 둘 다 눈이 땡그래졌어.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아이들의 정신은 가상현실에 옮겨진 후 활성화 되지 못했다고 하니까. 우리는 놀라서 책을 들고 곧장 마마에게 달려갔지. 우리도 언젠가 다이브를 할 운명이니 걱정이 되었을 거야.


마마는 우리가 가져온 책을 보곤 이야기를 해줄 테니 친구들을 다 불러오라 했지. 그때 너랑 나랑 바삐 뛰어다니며 애들을 불러모은 게 생각나네.


그렇게 섬과 마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땐 뭔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느낌이었어. 우리 모두 꽤나 놀랐고 얼마 동안은 그 이야기로 말이 많았지. 무서워서 다이브하기 싫다고 하거나 음모론을 이야기하거나 마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거나..


근데 이내 다들 평소로 돌아갔어. 마마가 우리의 궁금증을 잘 해소시켜주기도 했고.. 애초에 우린 섬과 마마를 사랑했기에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이 섬과 마마의 품 안에서 우리의 자아는 잘 형성되었겠지. 마마가 말한 것처럼 다들 어떤 선택을 하든 문제없을 거라 믿어. 우리보다 먼저 다이브한 선배들도 다 문제 없었기도 하고.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 이 섬, 마마 그리고 너와 작별할 날이.


11월 11일


오늘은 포옹 의식이 있는 날이었어. 마마 그리고 42명이 서로 돌아가며 포옹을 하는 의식이었지. 에비드나 다이브를 하기 전 내 몸과 작별 인사를 하는 시간.


처음엔 다른 사람과 포옹하는 걸 왜 내 몸과의 작별 인사라고 하는지 몰랐는데.. 포옹을 하다보니 무슨 의미인지 알겠더라. 다른 사람과 포옹을 하는 건 곧 나 자신과 포옹을 하는 일이었어. 누군가와 포옹을 한 순간 나의 몸도 느껴지니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슴이 뭉클해졌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거나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했지. 나중에 보니 옷 어깨쪽에 눈물 자국이 나있더라. 누구의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좋아서 사진으로 남겨놓았어.


너와 포옹할 때는 조금 더 꼭 안았던 것 같아. 더 잘 기억해두고 싶었거든. 너와 안았을 때 어떤 느낌인지.. 근데 포옹한 시간이 짧아서 좀 아쉬웠어. 맨날 붙어서 이야기하는 우리인데 그렇게 포옹한 적은 또 처음이라 서로 어색했나봐. 뭐 남은 시간 동안 또 포옹할 기회가 있겠지.


의미있는 시간이었어. 모두의 매듭 발표를 듣고 나서라 더 그랬던 거 아닐까 싶어.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이해하고 포옹을 한 거니까. 포옹을 하고 나서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고 그랬지.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오늘은 섬도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었는데 내일 너한테 보여줘야겠다.


11월 12일


오늘은 합동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어. 결혼을 약속한 친구들이 한 곳에 모여 평생을 약속했지. 결혼을 축하하면서도 어떻게 평생을 약속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더라. 근데 만약 너가 다이브를 선택했다면 나도 결혼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


이런 나의 모순적인 마음이 궁금해서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고민을 해봤지.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결혼에 있어 평생을 함께 한다는 약속 그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그 약속은 결혼의 알맹이처럼 느껴지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결혼이 의미없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약속보다 중요한 건 그 약속을 결심하는 마음이야.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하기로 각오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을 깊이 생각한다는 거겠지. 결혼은 그렇게 서로가 깊이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라 생각하게 됐어.


근데 이렇게 생각하니 너와 결혼 이야기를 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 싶어지네. 우리가 평생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할까.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이런 마음이 생겨.


마음이 간질간질해져서인지 오늘 내내 너를 괜히 더 쳐다봤던 것 같아. 내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넌 어떤 반응을 할지..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할까.


11월 13일


모든 수업이 끝나서 이제 하루 종일 자유 시간이 됐어.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섬과 작별 인사를 했지. 우리는 당연하게도 노을을 보러갔고.


노을을 보며 넌 평소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줬어. 비극적인 사건 이후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 섬이 우리에겐 꼭 필요하다고 얘기했지.


가상현실에만 있었다면 우리는 계속 우리가 정의한 것들 안에서만 살았을 거라고. 이 섬으로 나온 덕분에 우리가 다시 저 지평선 너머 그리고 우주에 대해 궁금해하게 된 거라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너의 모습. 그 모습을 난 평소처럼 옆에서 지켜봤어. 그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지더라.


그러다 너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우리 둘 다 말없이 노을을 바라볼 때 문득 마음이 간지러워지더니.. 입에서 툭하고 결혼하자라는 말이 나왔어. 머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평소엔 내가 말을 해도 계속 노을을 보던 너였는데 오늘은 달랐지. 내 말을 듣고 넌 완전 눈이 땡그래져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거든.


그리고는 예상대로 평생을 함께하지 못할 거라며 같이 있을 날이 단 며칠 뿐이라며 안 된다고 했어. 그래서 난 준비해놓은 내 생각을 너에게 얘기하곤 다시 청혼했지. 너만 좋으면 결혼하자고.


너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레 좋다고 말했어. 뒤이어 고맙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곤 눈이 마주쳤는데 괜히 부끄러워서 배시시 웃었던 것 같아.


우리는 내일 작게나마 결혼식을 올리자고 얘기하고 해가 질 때까지 함께 했지.


오늘은 뭔가 노을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지더라.



11월 22일


너가 지평선 테스트를 통과한 날부터 이 편지 일기를 시작했지. 너가 우주에 갔을 때 볼 수 있도록 말이야. 왜냐면 난 너가 에비드를 선택할 걸 알고 있었거든. 너는 항상 삶의 근거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니까.


근데 벌써 이런 날이 왔어. 내일이면 나는 다이브를 하고 너는 에비드를 하겠지. 나는 저 바다 깊숙한 곳으로, 너는 저 아득한 우주로 가는 날.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평생에 걸쳐 점점 더 멀어지겠지.


하지만 괜찮아. 우리는 그 거리만큼의 깊은 결심을 한 사이니까.


우주에서 보내올 너의 작품을 저 깊은 바다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재생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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