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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Jan 19. 2023

단편소설 <0.702>

숨쉬듯 쓴 단편소설 #2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의 소재는 0702이었다. 랜덤하게 4개의 숫자를 뽑아 조합한 정말 아무 숫자다. 그런 만큼 글 쓰는 게 쉽지 않았는데 그래도 완성했다!



0.702


1. 사막에서 바늘 찾기


“이 사람도 입시 - 대학 - 직장인 - 결혼… 전형적인 한국인의 삶이네요. 몇 번째인지..”

내가 말했다.

“앞으로 주구장창 보게 될 거야. 그런 사람들이 차고 넘치니까.”

사수가 원고를 읽으며 말했다. 우리 앞에 놓인 책상 위에는 원고가 끝도 없이 쌓여 있었다. 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사수님은 이 일이 지루하지 않으세요?”

“지루하지. 하지만 우리의 일은 저 종이 더미 속에 숨어있어. 진주를 찾는 일이 그리 쉬운 줄 알았어?”

“말 그대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네요. 근데 사수님은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살아있을 때도 이런 일을 했어. 편집자. 그걸로 평생을 굴러먹었는데 죽어서도 이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사수는 어이없는 듯이 웃었다.

“그래도 엄청 진지해보여요. 직업 의식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래야 빨리 무게를 늘려서 여기를 탈출하지. 그러니까 너도 여유부리지 말고 얼른 마저 읽어.”

사수의 시선은 여전히 원고를 향해 있었다. 무척이나 진지한 모습에 문득 사수가 검토한 원고를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 손을 뻗어 검토가 완료된 원고 중 하나를 집어왔다. 첫 페이지에 빨간색으로 크게 X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어떤 이유로 탈락이 된 건지 궁금해서 읽어보니 내가 1차 검토한 원고였다. 내가 본 원고 중 가장 흥미로웠고 그만큼 책정된 무게도 높았다. 근데 사수는 왜 이걸 제외했을까.

“이건 근데 왜 빨간 줄을 그어놓은 거예요? 책정된 무게도 높고 실제로 재미도 있던데요?”

“그래서 문제인 거야. 아마 그 원고 주인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편집자를 써야 하나? 이 생각을 하겠지. 이 편집자 저 편집자 간만 보다가 결국 혼자할 게 분명해.”

“건드려봤자 시간 낭비라는 말이군요.”

사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사수의 대답에 더 호기심이 생겨 자리에서 일어나 원고 더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사수가 검토한 원고들을 더 자세히 살펴봤다. 사수는 내가 갑자기 일어나자 나를 잠시 쳐다봤다.

“그래. 그렇게 내가 검토한 것들을 보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

사수의 검토를 통과한 원고는 몇 개 안 되었고 그 중에는 내가 1차 검토한 것도 있었다. 내가 봤을 땐 약간 애매해서 불합격을 준 원고였다. 다른 원고도 조금 살펴보니 마찬가지의 느낌이었다.

“약간 애매한..? 애들을 찾아야 하는 거군요.”

“맞아. 그래서 더 어렵지. 애매한 원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삶을 원고에 잘 담아냈는데 애매한 경우, 삶은 실제로 더 재밌는데 원고 주인의 스토리텔링 실력이 형편없어서 애매해진 경우. 이 두 가지 중에 우린 후자를 찾아야 해. 후자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무게도 더 많이 나눠받게 되니까.”

“아하. 결국 긁지 않은 복권 찾기네요. 근데 그럼 제 원고도 그런 기준으로 찾게 된 거예요?”

“그럼. 처음 봤을 때 너의 원고는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었지.”

사수의 말에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쓴 나의 원고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방금 살펴본 원고들처럼 애매했던 것 같다.

“이제 무슨 느낌인지 조금 알 것 같아요.”

“그럼 이제 다시 부지런히 원고를 읽고 1차 검토를 해 봐. 검토한 것들은 내가 한 번 봐줄 테니까.”

“오 이제 저한테 좀 관심이 생긴 것 같네요! 좋아요!”

“관심은 무슨.”

사수는 어이없는 듯 웃으며 다시 원고를 읽었다.



2. 죽은 자는 말이 있다


“귀찮아서 그냥 환생을 할까 생각했는데 연락을 주셨네요.”

의뢰인이 말했다.

“이런 보석을 갖고 그냥 환생하시기엔 아깝죠. 저희가 잘 다듬어서 무게를 더 잘 받게 해드릴게요.”

사수가 말했다.

“그놈의 무게. 영혼의 무게라는 거. 그게 높으면 뭐가 좋은 거죠? 환생했을 때 더 좋은 삶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거? 이것도 근데 진짜인지 아닌지 모른다는데. 뭐 아시는 거 있나요? 그래도 저보다는 여기 오래 계셨으니까.”

“하하. 이곳에 영혼의 무게가 가진 의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다들 환생에 영향이 있을 거다라고 추측할 뿐이죠. 이곳이 워낙 영혼의 무게라는 걸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나는 마치 테니스 경기를 보는 것처럼 사수와 의뢰인의 대화를 구경했다. 이제는 의뢰인이 아닌 입장에서 구경하니 재밌어 보였고 한 마디 거들고 싶어졌다.

“영혼의 무게는 일종의 노잣돈 같아요. 죽은 자가 스스로 챙기는 노잣돈. 다음 행선지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뭐라도 하나 더 쥐고 가는 거죠.”

사수는 내 돌발 행동에 놀랐는지 나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의뢰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노잣돈이라. 우리 가족들은 저한테 챙겨줬을라나 모르겠네요. 다들 저처럼 게으른 사람들이거든요. 뭐 죽어보니 그것도 별 소용없는 것 같지만.”

의뢰인은 가족들을 떠올리는 듯 잠시 허공을 쳐다봤다. 내가 괜히 노잣돈 얘기를 꺼내서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샌 것 같았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전의 이야기를 편하게 저희에게 들려주시면 돼요.”

사수가 말했다. 사수는 의뢰인에게는 제법 친절하게 구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의뢰인이었을 때에도 친절하게 얘기해줬다. 살아있을 시절에 작가를 이렇게 케어했겠지.

“그러면 알아서 재밌게 편집해주신다는 거죠?”

의뢰인이 다시 우리를 보고 물었다. 나는 또 다시 사수와 의뢰인 간의 핑퐁을 구경했다.

“물론이죠.”

“그럼 제 무게를 얼마나 드리면 되는 거죠?”

“지금 바로 주시는 건 아니구요. 나중에 무게 상승분의 20%를 저희에게 주시면 됩니다. 만약 무게가 상승하지 않으면 저희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으셔도 되구요.”

“이것도 휴대전화 살 때처럼 여기저기 둘러봐야 되는 거겠죠? 이 편집자, 저 편집자.”

“물론 다른 편집자하고 얘기하고 오셔도 무방합니다. 자신있거든요. 저희 포트폴리오 보내드린 건 읽어보셨나요?”

“아뇨.”

“아하. 그러시군요. 포트폴리오엔 저희가 지금까지 맡아온 원고들에 대해 쓰여 있긴 한데요. 괜찮으시면 지금 몇 개 설명해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냥 맡길게요. 천성적인 게으름이 저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 뭔지 아세요?”

맡긴다는 말에 사수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오. 무엇이죠?”

“촉이에요. 직관 아니면 감이라고도 하죠. 이것저것 알아보는 게 귀찮아서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해왔는데 이게 쌓이다보니 촉이 되더라구요. 더 안 알아봐도 될 것 같아요. 그냥 제 원고를 맡길게요.”

“신기하네요. 안 그래도 저희가 의뢰인님의 원고를 읽어보며 촉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했거든요. 그걸 중심으로 풀어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사수는 즐거워 보였다.

“제가 그러면 무슨 얘기를 해드리면 될까요?”

“그 천부적인 촉으로 수많은 범인을 잡아오셨죠. 최고의 파트너인 남편과 함께요. 의뢰인님이 범인을 지목하면 남편 분이 연결고리를 찾는 수사 방식이 흥미로웠어요. 근데 원고엔 이 내용이 잘 안 적혀 있어서.. 여기를 좀 더 살리면 좋을 것 같거든요.”

사수는 원고에 한 문단 정도 써있던 이야기를 잘 포착해냈다.

“지긋지긋한 남편. 그 사람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그의 탐정으로서의 명예를 위해 살인 현장이나 심문실에 얼마나 많이 끌려다녔는지 몰라요.”

“이번에 의뢰인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다시 써보는 겁니다. 꽤 잘 나올 것 같아요.”

사수의 상체는 이제 완전 의뢰인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음 생엔 그런 남편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음.. 그럼 우선 남편 분과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볼까요?”

사수가 소매를 걷고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3. 꿈보다 해몽


“금방 오실 거예요. 지금 막바지 편집 중일 거라서요. 죄송합니다.”

내가 의뢰인에게 말했다. 근데 의뢰인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근데 웃기네요. 죽은 사람들끼리 시간 약속을 한다는 게.”

“그러네요. 다들 근데 여기를 그냥 거쳐가는 곳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들 여길 플랫폼이라고도 하더라구요.”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정류장이죠.”

“그렇기에 영혼의 무게라는 거에 더 매달리는 거 아닐까요. 불확실하니까 종교처럼 의지할 게 필요한 거죠. 뭐 그냥 포기하고 바로 환생을 택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도 만약 무게가 별볼일 없었다면 바로 환생하는 걸 선택했을 거예요. 그건 편집자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편집자라는 말을 듣고 신기했다. 죽고나서 새로운 정체성이 생기다니. 기분이 묘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사명감이 생기기도 했다.

“음.. 처음엔 저도 그랬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얼마 전에는 의뢰인이었거든요. 지금 약속에 늦고 있는 양반이 제 편집자였고.”

“오 그렇군요. 몰랐어요. 근데 아직 여기 머무르고 계신 거 보면 편집이 아직 안 끝난 건가요?”

“아뇨. 편집도 잘 끝났고 전보다 훨씬 더 높은 무게를 책정 받았어요. 0.702를 받았죠. 원래는 0.2 정도였는데..”

“꽤나 실력좋은 편집자이신가 보군요. 역시 제 촉이 맞았어요. 근데 그렇다면 더더욱이 왜 여기 머무르고 계신 거죠? 아직 무게가 모자르다고 생각해서?”

“아뇨. 저는 이제 무게의 문제로 여기 남아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곤 의뢰인의 표정을 살폈다. 나름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낯간지러운 말인데. 전 이곳에서 편집이라는 게 삶에 빛을 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낯간지럽다뇨. 꽤나 근사한 말인데요?”

“저는 제가 꽤나 지루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죽고 여기 와서 처음 원고를 쓸 때도 참 별볼일 없는 인생이었구나 다시금 느끼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원고를 쓰니 무게도 형편없게 나왔죠.”

“근데 지금 제 편집자 분이 연락을 주신 거군요.”

“맞아요. 사실 저도 바로 환생을 하려고 했어요. 근데 그렇게 연락이 오니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만나봤죠. 그리고 처음 만나서 들은 얘기가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들의 작법에 대한 얘기.”

“작법이요?”

“어떤 작가들은 심상이라고도 하는, 마음속에 맺힌 하나의 이미지를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데요. 하나의 장면을 그리기 위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거죠. 예를 들어 흰 눈밭 위에 나뒹굴고 있는 한 남자 아이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이런 느낌으로.”

“그럼 그 아이가 왜 눈밭 위에 나뒹굴게 되었는지에 대해 쓰는 건가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 장면이 꼭 이야기의 결말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장면을 위해 이야기의 모든 장면이 존재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해요. 심지어 그 장면과 무관해보이는 장면들도 포함해서요.”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이 작법에 대한 얘기를 듣고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제 31년 인생이 단 몇 분 혹은 몇 초의 순간을 위해 존재했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편집자 분이 그 순간을 찾아준 거군요.”

“맞아요. 이번에 의뢰인 분에게 그런 지점을 찾아준 것처럼 저에게도 그랬던 거죠. 제가 원고에 써놓은 단 몇 문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다시 쓰여졌어요.”

“그렇게 원고의 무게가 0.702로 바뀌었나보네요.”

“무게가 올라서 좋은 것도 있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제 삶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었어요.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던 제 삶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짐처럼 질질 끌고 왔다고 생각한 제 삶이 사실은 선물이었어요. 웃기죠? 죽고 나서야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게.”

“근데 얘기를 듣다보니 우리가 죽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이것도 삶의 연장선일지도 모르죠.”

“오. 맞아요. 저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누군가는 이곳이 거쳐가는 곳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그 중요한 해몽을 하는 곳이니까요. 이곳이 실제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기도 하구요. 죽은 자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원고를 쓰면 그것에 무게가 달리는 식으로요. 만약 책정된 무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고를 직접 손 보거나 편집자에게 맡겨서 다시 도전할 수 있죠.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고 저처럼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저는 이곳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처음에 와서 원고를 쓸 땐 참 귀찮고 이해가 안 되는 구조라 생각했는데.. 그러네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따라서 편집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건가요?”

“제 삶을 사랑하게 해준 편집자에게 정말 고맙더라구요. 그리고 편집이라는 일이 굉장히 멋지게 보였어요. 그래서 저도 편집자가 하고 싶습니다, 하는 법을 알려주세요라고 말하게 된 거죠.”

“다행히도 받아주셨네요. 지금 같이 일하고 계시니까요.”

“맞아요. 사실 그동안 편집 일을 배우겠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다들 영혼의 무게를 목적으로 하는 게 보여서 거절했대요. 영혼의 무게가 모자르다 생각해서 편집을 하는 사람이 여기 많거든요.”

“제자를 가려서 받는 걸 보니 진짜 장인 같네요.”

“실제로도 장인이에요. 원고를 읽는 걸 보면 정말 허투루 하는 게 없어요. 아직 저에겐 그런 자세는 없지만 배워가야죠. 많이 보고 배워서 저도 사람들의 삶에 빛을 내주고 싶어요.”

“잘 하실 것 같아요. 제 촉이 그렇게 말하네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든든하네요. 저도 의뢰인 분의 원고를 읽고 정말 신통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제 원고가 어떻게 편집이 되었을지 궁금해지네요.”

의뢰인이 말을 꺼내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편집 막바지 작업이 조금 늦어지는 바람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네요.”

내가 말하자 의뢰인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제자를 두셨네요.”



4.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


“다시 읽어봐도 뿌듯해요. 이번 건은 특히…”

내가 직접 편집한 원고를 다시 읽으며 말했다. 편집이 다 된 원고는 내가 봐도 꽤나 만족스러웠고 무게도 꽤 많이 올랐다.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원고를 품 안에 꽉 안았다.

“고생했어. 처음엔 어떻게 가르칠지 막막했는데 이제 보니 많이 성장했군.”

“서당개 3년이면 풍월도 읊는다고 하잖아요. 저도 그런가봐요.”

“그렇다면 확실히 개보다는 낫군. 같이 일한 지 그 정도는 안 되었으니까.”

나는 사수를 한 번 째려보았지만 사수는 미소를 지으며 원고를 읽고 있었다.

“이럴 땐 순순히 칭찬해주는 게 맞는 거예요. 근데 시간이 진짜 빨리 가요. 이곳에서 시간이란 개념이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 원고 저 원고 편집하다 보면 그렇게 되지. 나도 그러고 보면 여기 참 오래 있었어. 이제 떠날 때가 된 거지.”

“무슨 그런 다 죽어가는 노인처럼 말을 하세요.”

“그럼 내가 계속 여기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나도 이제 슬슬 정리를 해야지.”

사수의 말을 듣고 난 놀라서 다시 사수를 쳐다봤다.

“진심이세요?”

“그럼. 내가 허튼 말하는 거 봤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건데요? 편집하는 게 재밌어서 여기 계속 있는 거 아니었어요?”

“편집하는 건 고통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일이야. 그래서 사는 동안에도 계속 해왔고 죽고 나서도 하고 있지. 근데 여기 와서 수많은 삶의 원고를 읽으며 든 생각이 하나 있어.”

사수가 들고 있던 원고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뭔데요?”

“나도 다시 한 번 내 삶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 아니 어쩌면 지금은 열망일지도 몰라.”

사수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몰랐어요.”

“나도 그랬지. 사실 나는 살아있을 때 그리 행복하지 않았거든. 즐거운 일은 때때로 있었지만 삶 전반적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했어. 스스로가 의미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 적도 적지 않았고.”

“정말요? 편집자로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은데..”

“만약 내가 편집만을 꿈꿨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나는 편집 이전에 창작을 추구했어. 내 영혼이 담긴 글을 쓰고 싶었지. 근데 재주가 여의치 않아 편집을 하게 된 거야. 내 글 재주로는 먹고 살 수 없었고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내겐 글을 알아보는 재주, 글을 손보는 재주는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편집자로 먹고 살 수는 있었지.”

“근데 그렇게 어쩔 수 없이 편집자로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믿기지 않아요. 그렇게나 진지하게 원고를 읽는데..”

“살리에르를 알고 있나?”

“그게 뭐죠?”

“그게 아니고 사람이야. 모차르트의 곁에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시기, 질투한 음악가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동경하기도 했어. 모차르트가 만들어낸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즐겼지. 나는 내 삶이 살리에르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재능이 차고 넘치는 작가들의 편집자 노릇을 하며 시기와 질투를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즐겁기도 했어. 멋진 글을 알아보고 다듬는 즐거움이 있었지.”

“근데 그걸로는 부족했던 거죠?”

“그렇지. 편집은 나를 먹여 살리고 내 마음을 어느 정도 데워준 고마운 일이지만.. 내 마음을 끓어오르게 한 적은 없었어. 내 마음은 평생토록 끓는 점에 도달한 적이 없었던 거야. 죽음을 맞이하고 이곳에 와서 내 삶을 원고로 쓸 때 난 조연에 불과했구나, 재밌는 이야기에 둘러쌓여 살았지만 정작 나는 지루한 삶을 살았구나 생각했지.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갖고 원고를 써서인지 형편없는 무게를 받았어.”

“얼마인지 물어봐도 돼요?”

“0.201 받았어. 무게를 처음 듣고 충격 받았지. 아무리 내가 지루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0.201은 심한 거 아닌가 하면서. 그래서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원고를 봤는데 이내 납득을 하게 됐지.”

“사수님 삶이 겨우 0.201 밖에 안 나오다니.. 원고를 이상하게 썼을 리는 없을 테고.”

“결국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 문제겠지.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본인이 쓰고 싶지 않은 주제로 써야 한다면 좋은 글이 나오기 어려울 테니까. 게다가 나는 그리 뛰어난 작가도 아니었고. 어쨌든 그렇게 받은 무게도 적겠다, 원래 하던 일도 편집이었으니 관성처럼 여기서도 편집자를 하게 된 거야.”

“근데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거죠?”

“아까 말한 것처럼 다시 내 삶을 써보고 싶다는 열망을 느껴. 좋은 글을 보면 글이 쓰고 싶어지는 것처럼, 이곳에서 멋진 삶들을 보다 보니 나도 살아보고 싶어진 거야. 너가 말한 노잣돈이라는 것도 이제 모을 만큼 모은 것 같고. 이 노잣돈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겠지만.. 환생했을 때 내 재능으로 환원되면 좋겠네. 이번엔 나도 모차르트로 한번 살아보게.”

사수가 웃으며 말했다.

“진짜 가는 거군요. 너무 진심으로 말해서 말리기도 어렵네요.”

“말린다고 내가 안 갈 것 같아? 근데 사실 지금 바로 떠나는 것도 아니야. 마지막으로 맡겨야 할 일이 있거든.”

사수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책상 서랍을 열어 원고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내 원고야. 괜찮다면 너에게 편집을 맡기려고 해.”

“아니. 어떻게 이걸 저한테.. 직접 하지 않고.”

나는 부담이 되어 두 손으로 원고를 잡았다. 페이지를 넘기니 정말 사수의 원고였다.

“너가 평소에 하는 것처럼 나도 빗대서 말하자면..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 법이니까. 이미 여러 차례 실력을 바로 옆에서 봐서 맡기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고. 의뢰인으로서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얘기도 할 거야.”

사수의 원고를 받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수가 내게 해준 일을 이제 반대로 내가 사수에게 해줘야 하는 거니까. 사수가 자신의 삶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부담스러우면서도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이 생겼다.

“해볼게요. 저한테 맡겨주세요. 최고의 은퇴 선물을 준비해볼게요.”

내 말에 사수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두 손의 원고를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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