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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r 18. 2023

단편소설 <판도라>

숨쉬듯 쓴 단편소설 #3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의 소재는 탁월한 재능이었다.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장르로 써 보았는데 꽤나 재밌었다. (서투른 부분도 많았지만..!) 숨쉬듯을 하며 이런저런 새로운 글 경험을 하게 되어 좋다.



판도라


“생애 첫 번째 기억이 뭐야?”

누군가의 질문에 주위 친구들 모두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돌아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린이 집 혹은 유치원 시절 즈음의 기억이었다.

“도라 너는 어때?”

“음.. 나는..“

도라는 말을 꺼내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친구들의 눈치를 봤다. 부담스러웠다.

”잘 모르겠어. 나는 너희들 만큼 그렇게 어린 시절까지 떠오르지 않아.“

“에이. 그래도 말해 봐. 생각나는 데까지라도. 아니면 설마 저번 주 기억 이런 건 아니지?”

도라 건너편에 있는 친구가 한 말에 아이들은 깔깔 웃었다.

”아니. 진짜 그럴 수도 있는 게 도라 기억력 안 좋잖아.“

”야. 왜 그래. 도라한테.”

도라 옆의 다른 친구가 말렸지만 그 역시 웃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라는 그냥 말없이 따라 웃었다.


< 삐 >


종소리가 울리자 다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도라는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 된 것에 감사했다. 도라는 쉬는 시간이 10분인 게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길었다면 친구들의 괴롭힘은 진작에 끓는점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 아니, 그들은 쉬는 시간에 심심하면 도라의 주위로 모여들어 서서하면서도 확실하게 괴롭힘의 온도를 높여갔다. 처음엔 친절하게 말을 건넸지만 이내 도라의 기억력을 소재로 짓궂은 장난을 쳤다. 수업 시간에 배운 것에 대해 묻는다든지 전날 쉬는 시간에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고 한다든지. 괴롭힘의 방식은 다양했다. 심지어 무리 중 가장 짓궂은 아이는 도라가 빵을 사기로 했다며 매점에 데려가려고도 했다. 도라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너가 까먹은 거야라는 말과 함께 비웃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그렇게 난처한 상황이 될 때마다 도라를 구해준 것은 < 삐 > 종소리였다. 그 외의 다른 종소리는 쉬는 시간의 시작을 알렸기에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꿈에서 그 소리를 듣고 식은땀을 흘리며 깬 적도 많았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들이 학교가 끝나고는 도라에게 큰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교 후엔 도라보다 재밌는 게 많았으니까.

도라는 오늘도 그렇게 혼자서 지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니 정적만이 도라를 반겼다.

도라는 마당에 나가 한 나무 앞에 섰다.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였다. 나무 앞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물그릇과 작은 액자가 놓여 있었다. 액자 속 사진에서 도라는 아빠 그리고 강아지 판과 함께 웃고 있었다.

“판. 나 돌아왔어. 물 갈아 줄게.”

도라는 그릇에 담겨 있던 물을 나무에 주고 부엌에 가서 다시 받아 왔다.

“자. 목말랐지?”

도라는 쭈그려 앉으며 그릇을 다시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도라는 조용히 비석을 바라봤다.


-

우리의 소중한 가족, 판

2000년 5월 23일 ~ 2013년 10월 24일

-


도라는 비석을 옷소매로 한 번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가니 식탁에 카드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아빠 출장 간 동안 이걸로 밥 시켜 먹어. 밥 굶지 말고! 사랑해!’


도라는 메모에 눈길을 한 번 주고는 그대로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도라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대로 잠에 들 생각이었다. 잠자고 일어나면 하루 동안의 기억이 약간이나마 희미해졌기에 언제부터인가 하교하고 잠에 드는 것이 도라의 습관이 되었다.

근데 오늘은 잠이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기 때문이다.


‘생애 첫 번째 기억이 뭐야?’


오늘의 질문은 반 아이들이 도라를 놀려 먹기 위해 여태 해온 질문들과는 달랐다. 그것은 도라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점점 존재감을 키우며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그래서 결국 도라는 그 끈질긴 질문에 장단을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도라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곤 스탠드 불을 켜고 책상 오른쪽 서랍을 열어 안에 있는 일기장을 모두 꺼냈다. 세어 보니 총 10권이었다. 모든 일기장이 작은 글자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도라가 하교 후 잠드는 습관을 갖기 전에는 매일 같이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일기장에 기록했다.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도라 나름대로 기억 장애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였다. 오랜 기간 이어진 그와 같은 시도들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반 아이들의 짓궂은 질문에 조금이라도 더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시간이 흐르며 도라는 그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처음엔 기억 장애 때문에 도라를 괴롭히기 시작했지만 어느 시점을 지난 후부터 기억 장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같은 반에 괴롭힐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도라는 일기 쓰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잠자는 것을 택했다. 기억하려 발버둥 치는 것보단 잊는 게 편했다.

도라는 가장 오래된 일기장을 펼쳤다. 종이가 푸석푸석했다. 가장 첫 번째 페이지에 쓰인 일기를 읽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기였다. 이것이 내 생애 첫 번째 기억이라 할 수 있을까. 만약 이 일기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오늘 학교에서 그대로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생애 첫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도라는 마음속 깊이 알고 있었다.

도라는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 그 안에서 작은 열쇠를 빼냈다. 그리고 그 열쇠로 책상 왼쪽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세월과 먼지를 머금어 한층 더 푸석해 보이는 메모장이 있었다. 도라는 조심스럽게 메모장을 꺼내어 펼쳐 보았다.

메모장엔 여러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근데 기록의 형태가 마치 꿈의 세계처럼 무분별했다. 귀퉁이에 검정펜으로 그린 그림, 메모장의 라인과 상관없이 비스듬하게 여기저기 쓰인 글. 어떤 기록을 먼저 했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도라는 그 기록들을 문제없이 알아볼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기록임에도 마치 어제 남긴 것처럼 선명했다. 동시에 그 메모장을 왼쪽 서랍에 봉인해 둔 이유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악몽에 대한 기록이었다. 모르는 여자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긴다. 바닥엔 붉은 피가 흐른다. 여자는 헐떡거리며 간절하게 손을 뻗지만 허공을 헤맬 뿐이다. 이내 여자는 쓰러지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장면은 마치 직접 경험한 일처럼 생생했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또 그 기억이 진짜라면 아기 때의 기억일 텐데 도라는 주위에서 3살 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기억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떠올리지 못하는 시기를 자신이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라는 메모장을 쓰며 파헤친 기억을 얼마 지나지 않아 덮어 두게 되었다. 그 기억은 아주 선명하면서도 불쾌한 꿈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메모장은 왼쪽 서랍에 아주 오랜 기간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메모장을 다시 꺼내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기억 장애가 있는 자신의 머릿속에 가장 무겁게 자리하고 있는 기억. 그것은 마치 블랙홀 같았다. 어쩌면 그것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다른 기억들이 머릿속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도라는 그 기억이 진짜이든 아니든 자신에게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 안에 뛰어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래야만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도라는 자신의 생애 첫 번째 기억에 더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기억의 여러 장면들을 더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처음엔 기억 장애를 갖고 있는 자신이 그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기억의 해상도는 점점 더 빠르게 높아졌고 도라의 머릿속에서 지연 없이 재생되었다.

도라는 머릿속에 재생되는 장면들을 보며 오래된 메모장 뒤편에 기록을 이어갔다. 기록은 전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그리고 기록이 어느 정도 쌓이자 도라는 책상의 노트북을 열었다. 브라우저를 켜고 검색창에 한 글자씩 입력했다.


‘2001년 3월 1일 서울 강서구 살인 사건’


도라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엔터를 눌렀다. 잠시 로딩창이 뜨더니 이내 검색 결과가 나왔다.


===


도라는 그 날부로 달라졌다. 반 아이들의 괴롭힘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도라의 목전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악행은 시시한 장난에 불과했다. 이제 도라는 쉬는 시간 종소리가 아닌 하교 종소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하교하고 집에 와서는 전처럼 잠에 들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을 켜고 한 살인마에 대해 조사했다. 그 살인마는 양파 같았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것 그리고 눈물이 나왔다.

불쾌한 꿈이라 여겨온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살인 사건에 대한 여러 기사를 살피던 중 한 헤드라인이 도라의 눈에 띄었다.


‘강서구 살인 사건. 또다시 나타난 트레져 헌터?’


이 기사를 시작으로 살펴보니 트레져 헌터는 80년 대 말부터 모습을 드러낸 살인마였다. 그는 자신이 수차례 저지른 살인의 교집합으로 트레져 헌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의 살인은 탐색전에서부터 시작됐다. 표적으로 삼은 사람을 집요하게 스토킹하여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즉 표적의 보물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만약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표적에서 제외됐다. 이러한 탐색에는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는지 그의 살인 주기는 꽤나 길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사전 탐색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에겐 더 강한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표적이 보는 앞에서 보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만약 그의 위협에 굴복하여 보물을 내준 경우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럴 땐 그대로 문 밖으로 달아나 훔친 물건을 어딘가 버리고 사라질 뿐이었다.

그는 목숨만큼 중요한 보물에만 흥미를 갖는 자였다. 살인은 그 보물을 뺏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밑반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에게 트레져 헌터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희생자에게 깊게 파고들지 않는 이상 그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목숨만큼 소중한 보물은 보통 비밀스럽게 숨겨진 경우가 많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한 프로파일러가 비슷한 시기 발생한 수상쩍은 도난 사고를 바탕으로 사건들 간의 연결성을 찾아낸 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이것이 연쇄 살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사람들이 트레져 헌터의 정체를 알게 되고 얼마 동안 그의 살인 소식이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의 대응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집에 들이닥쳐 무언가 훔쳐가는 걸 보더라도 막지 않게 되었다. 침입자가 단순 도난범이 아닌 살인범, 즉 트레져 헌터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트레져 헌터 파훼법이 퍼져 그의 살인이 멈추게 되었다고 믿었다.

두 번째는 트레져 헌터가 이미 도난범으로 잡혀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표적을 검증하기 위해 훔치는 시늉을 하다가 잡혀 버렸다는 얘기였다. 이 가설이 퍼지자 경찰에선 체포했던 도난범들을 다시 불러들여 재조사를 하기도 했다.

근데 시간이 더 흐르자 이러한 가설이 모두 틀렸다는 게 밝혀졌다. 트레져 헌터는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성격의 보물을 훔쳤다. 바로 생명이 깃든 보물이었다. 트레져 헌터는 생명이 깃든 것을 훔치기 위해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으로 보였 다. 생명이 깃든 것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훔쳐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선 길들이는 법을 알아야 했다. 트레져 헌터에겐 꽤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그의 입맛을 돋웠다. 트레져 헌터는 처음 점찍었던 표적을 살해하고 표적의 강아지와 함께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반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일었다. 트레져 헌터에 대한 파훼법을 알더라도 반려 동물에 그것을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눈앞에서 가족을 데려가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는 얘기가 주였다. 이런 흐름으로 당시 사설 보안 업체로 반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문의가 전에 없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그 사건 후 트레져 헌터에 대한 소식이 다시금 끊겼다. 그렇게 감감무소식으로 몇 년의 시간이 흘러 IMF가 터지고 세기가 바뀌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트레져 헌터라는 이름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즈음 도라가 기억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2001년 강서구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트레져 헌터라는 이름을 떠올렸으나 사건 현장에서 도난당한 것이 없었다. 희생자에게 가장 소중할 법한, 태어난 지 단 몇 개월밖에 안 된 자식 도라도 현장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트레져 헌터로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진범은 따로 있는데 언론의 자극적인 기사에 사람들이 엉뚱한 곳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빠졌는데 그때 한 언론에서 낸 기사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기사는 살인 사건으로 고아가 된 도라에 대해 다뤘다. 얘기인즉슨 만약 범인이 트레져 헌터라면 언젠가 반드시 도라를 입양하러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이 자극적인 기사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도라에게로 몰렸다.

근데 이후 얼마 안 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또 다른 기사가 따라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아무도 도라를 입양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 기사였다. 이러한 기사가 나오자 사람들은 곧바로 태세 전환을 하여 도라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따라 도라의 입양자가 곧 트레져 헌터라 주장한 기사는 내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라를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간 도라가 있는 고아원에 기부가 줄지어 이어졌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도라를 입양하는 것은 트레져 헌터로 내몰릴 수 있는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외국의 누군가가 입양을 해주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른 관심은 2002년 월드컵의 열기에 녹아 버리고 말았다.

도라의 아버지는 그 이후에 나타났다. 도라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고아원에 찾아왔다. 고아원은 이전에 언론으로 홍역을 앓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입양을 최대한 조용히 진행했다. 도라의 아버지는 경제력, 나이, 주위 환경 등 여러 면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줬기에 입양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아원에선 평생 혈혈단신으로 살 것처럼 보였던 도라에게 빛이 내려졌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도라는 풍족한 환경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종종 멀리 출장을 떠난다는 것 외에는 부족한 점이 없었다. 가끔 자신에게 기억 장애가 있는 것으로 아버지를 원망해 보려 했지만 피가 이어진 관계도 아니었기에 그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녀지간은 여태까지 쭉 평화로웠다. 그런데 최근 기사를 읽으며 도라에겐 양가적인 마음이 피어났다.

한 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이 있었다. 연쇄 살인마로 몰릴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을 입양해 줬다는 것에 감사했다. 기사를 봤을 때 아버지가 감내해야 했던 부담은 무거운 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선 어쩌면이라는 의심이 피어났다. 어쩌면 아버지가 트레져 헌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안개처럼 도라의 마음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 안개는 아버지에 대한 좋은 인상을 서서히 가려갔다.

안개가 퍼져 나갈수록 스스로가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의지할 것 하나 없이 혼자 안갯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외롭고 찝찝한 느낌이 싫어 도라는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이전처럼 메모장을 왼쪽 서랍에 봉인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안개는 아주 작은 틈새로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결국 도라는 그러한 감정들을 인정하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을 그대로 메모장에 기록하기로 했다. 처음엔 일기처럼 쓰다가 이내 소설 형식으로 바꾸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게 더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니 마음이 전보다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마음속에서 불명확한 형태로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것들이 글자라는 형태로 눈앞에 드러나니 그런 것 같았다. 또 자신이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감각에 뿌듯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하교하고 자신의 마음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도라의 습관이 되었다. 도라에겐 그 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도라의 글은 계속해서 쌓였고 소중한 보물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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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뒤, 2023년 한 유튜브 채널


“오늘 얘기해 볼 책은.. 최근에 완전 화제죠.”

“맞아요. 책에선 얘기하진 않지만 다들 트레져 헌터를 모티프로 해서 쓰인 거 아니냐는 얘기가 많더라구요.”

“트레져 헌터.. 요새 젊은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월드컵 전에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죠. 그 연쇄 살인마..”

“요새 이 소설로 재조명되고 있어요. 2000년대에 접어들며 완전 자취를 감춘 살인마였는데. 이미 마지막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아.. 그 강아지를 훔쳐간 사건 말씀하시는 거죠?”

“네네. 맞아요. 근데 아시겠지만 이 책에서 중심이 되는 사건은 2001년 강서구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 트레져 헌터의 살인이냐 아니냐로 얘기가 분분했던 사건이요. 그 사건도 미결로 끝났죠?”

“맞아요. 그리고 좀 찾아보니까 그 강서구 사건은 공소시효에 적용받지 않게 되었더라구요. 2015년 7월에 살인죄에 공소시효 적용이 되지 않도록 법이 개정되어서요. 근데 신기한 게 이 법에 예외 사항이 있는데 개정 전에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은 적용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강서구 사건이 2001년에 발생했고 공소시효는 15년이니까.. 완전 아슬아슬하게 개정법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게 된 거네요. 신기하다.”

“그러니까요. 더 흥미로운 건 뭔지 아세요?”

“오 뭔가요?”

“작가가 미상씨예요. 작자 미상.”

“어우 더 미스터리해지는데요. 오늘 얘기 재밌겠어요.”

“그럼 바로 출발해 볼까요?”

“좋아요. 미상씨가 쓴 오늘의 책, <판도라의 상자> 파헤치기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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