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Woo Lee Apr 15. 2023

단편소설 <기일 일기>

숨쉬듯 쓴 단편소설 #4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의 소재는 일기였다. 일기를 거꾸로 하면 기일이길래. 기일(忌日)에 쓰는 일기(日记)로 소설을 한 번 써 보았다. 재밌었다!



기일 일기(忌日日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은 나의 마지막 일기다. 오늘은 내가 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일 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두컴컴한 병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봤다. 커서가 깜빡 깜빡. 무엇인가 계속 써내려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손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쓸 게 없어서라기보다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무엇을 남겨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 그렇다. 모든 색을 다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던데 생각은 다 더하면 흰색이 되나 보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졌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병실을 울린다. 저 소리 때문에 잠이 안 와서 이렇게 노트북을 켜게 된 것이기도 하다. 틱틱 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일까. 생각해 보면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초침이 틱틱 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튀어 올랐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 아니지. 실은 내가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게 맞다. 내가 선택한 죽음이니까.


그런 순간에 잠에 들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 죽으면 평생 잘 텐데. 근데 잠을 못 잘 이유가 있나라는 생각. 애초에 이 생에 아쉬울 게 없어 죽음을 택한 건데 자는 게 아깝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사실 나는 지금 죽어도 된다. 안락사가 내일 예약되어 있기에 그러지 못하는 것뿐이지.


근데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지금 당장 죽는 건 뭔가 아쉽다. 적어도 이 글은 마치고 죽어야 깔끔할 것 같다. 이 글이 내 유작으로써 사람들에게 회자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이유가 어떻든 나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내가 합법적 안락사의 첫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 한창 작가를 할 땐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는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처음엔 인터뷰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어차피 죽을 건데 못 할 게 뭐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에 두면 두려울 게 없다는 말이 맞았다.


그래서 여러 주요 매체와 인터뷰를 연이어 진행했다. 나는 특종이라 그런지 베테랑 기자들이 붙었다. 기자들의 눈에서 기사거리를 갈구하는 용암과도 같은 욕망이 느껴졌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뜨거운 관심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은 결국 500 사건으로 귀결되었다. 500 사건 때문에 자살하려는 것인지 물었다. 인터뷰하는 며칠 동안 오공공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반 정도만 맞다고 얘기했다. 나는 사실 500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500 사건으로 내가 안락하게 죽을 제도가 만들어져서 결심이 섰던 것이고.


반만 맞다는 답변에 기자들은 흥미를 보이며 나머지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인생이 시시해서라는 시시한 답변을 내놓았고 기자들은 실망했다.


그 모습에 뭔가 미안해져 나는 내가 일생에 걸쳐 주장해 왔던 바에 대해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시작에 앞서 나는 자살이라는 말이 싫다고 했다. 죽일 살(杀)이라는 글자가 나의 안락한 마침표를 곡해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부터 나는 정신의 수명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해왔다. 수명이 육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글을 여러 차례 썼다. 당시엔 내 글이 사람들에게 가서 닿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인터뷰 덕분인지 예전에 쓴 책들이 많이 팔린다고 한다.)


정신에도 수명이 있다는 말이 당시 사람들에게 공감받지 못한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육체의 수명이 정신의 수명보다 짧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에도 수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릇이 깨지지만 않는다면 정신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정신이 자연 증발한다는 점을 간과한 결론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이 시대에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서도 메말라 버리곤 한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체적으론 건강하지만 정신적으론 건조하다.


무엇이 정신을 메마르게 하는가. 앞서 기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 원인은 시시함이며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미지(未知)의 고갈이다.


과거엔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삶의 시시함, 즉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설렘은 삶을 다시 촉촉하게 만들어 주었다. 심지어 일상을 떠나지 않더라도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다는 기대감으로 우리의 정신은 수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우리가 발명한 문명의 이기로 우리는 점점 더 압축적으로 이 우주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지구 반대편에 다녀올 수 있으며 심지어 우주 유영까지 경험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우주가 준비해 놓은 콘텐츠를 전에 없는 속도로 소비하게 된 것이다. 최근 10년 간 우리가 한 경험의 총량이 지난 20만 년 간 인류가 해온 경험의 총량보다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음엔 축제와 같았겠지만 문제는 콘텐츠가 슬슬 고갈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지 않을 샘처럼 보였던 미지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가 미지의 고갈로 시시해질수록 우리의 기대 ‘정신’ 수명이 줄어든다는 게 그동안 내가 주장해 온 이야기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고 관리를 하면 어느 정도 수명을 늘릴 수 있겠지만 우리의 정신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사실상 육체 수명과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 인류가 역사상 가장 짧은 정신 수명을 가진 시대가 아닐까 싶다. 진시황도 지금 시대에 살았다면 영생을 꿈꾸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큰 병 없이 육체적 수명이 다해 죽은 것을 우리는 호상(好喪)이라고 한다. 나는 정신적 수명에도 호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저 정신의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것이라 기자들에게 얘기했다.


그러니 그제야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게 그럼 자살이 아니라 무엇이라 칭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고심했다. 갈 때 가더라도 이 세상에 단어 하나 정도 남기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하려는 것은 완결입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랬더니 한 기자가 진짜 끝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더 살며 이런저런 멘탈 트레이닝을 받으면 정신 수명을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연장된 삶은 사족에 불과할 것이라고 답했다.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지금의 시점에 완결 짓는 게 나에게 더 존엄한 일이라고 얘기했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한 후에 기자들은 마지막으로 나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물었다. 나의 죽음 그리고 내가 쓴 책을 읽고 뒤따라 삶을 완결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은 한다. 하지만 나도 결국 500 사건이 만들어 낸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애초에 내가 안락사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된 것도 500 사건 때문이다.


미지의 고갈을 앞당긴 500 사건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거쳐 결국 안락사가 합법화됐다.


현상은 이미 존재했고 나는 그것에 대해 후술한 것뿐이다. 미지의 고갈과 그로 인한 정신의 메마름은 내가 없었어도 - 개인적으론 500 사건이 없었어도 -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정신에도 수명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얘기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보니 작가와의 만남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써온 책들에서 주장해 온 것들을 정리하는 자리였다. 지금 돌아보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슬슬 아침 해가 뜬다. 마지막 일출이다. 모든 순간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감각이 확장되는 듯하다. 이제 곧 가는 줄도 모르고 감각을 만개한 나의 육체에 연민이 생길 정도다.


500 사건은 나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다. 첫 번째는 합법적으로 안락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되었다는 것이다.


500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죽음 이후의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죽기 전에 신부님을 불러 최후의 고해성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근데 지금은 죽음 이후가 두렵지 않다. 나를 심판할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에 던져졌지만 적어도 마침표 정도는 스스로 찍는구나.


아아 고통도 두려움도 없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가.



각주 및 해설


500(오공공) 사건


본 글에 나온 500 사건은 2048년 발생하여 지금 이 글이 쓰인 시점까지 이어지고 있는 재난이다. 2048년 1월 1일 00시 00분 00초 이후 모든 사람들의 꿈 막바지에서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500 Internal Server Error라는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500 Internal Server Error는 서버측 오류로 클라이언트의 요청이 실패했을 때 확인할 수 있는 에러 코드다.


500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게 되었다.


500 조사 위원회에 따르면 인간은 클라이언트이며, 꿈을 꾸는 것은 기억을 서버에 보내기 전에 전처리하는 과정이다. 꿈의 막바지에서 500 Internal Server Error가 표시되는 것은 서버측에서 발생한 문제로 서버가 클라이언트(인간)에서 보낸 기억을 전달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서버가 고장나서 클라이언트로부터 데이터를 전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버가 고장난 원인에 대해선 클라이언트(인간)쪽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다양한 추측만이 제기될 뿐이다. 대표적 추측은 다음과 같다.


시뮬레이션 운영자의 부재

시뮬레이션 중단 혹은 종료


그런데 어떤 추측이 맞는지와 무관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엔 허무주의가 뿌리내렸다.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전에 없는 허무를 느끼기 시작했다. 종교는 급속도로 쇠락하였고 반대로 신이라고 믿었던 존재, 즉 운영자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분위기가 만연해졌다. 에러 스크립트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시할 정도로 무성의하게 시뮬레이션을 돌렸다는 점에서 피조물들의 배신감은 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허무감과 배신감으로 500 사건 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래서 500 사건은 인간에게 그 어떤 물리적인 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전에 없는 사상자를 낸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되고 있다.


500 사건 후 허무에 대해 논하는 작품이 연이어 발표되었으며 그중 본 글, 기일 일기에서 제시된 정신 수명 개념은 저자의 죽음 이후 널리 받아들여져 사람들의 수명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판도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