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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y 23. 2023

단편소설 <Lonely Keyboard>

숨쉬듯 쓴 단편소설 #5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의 소재는 키보드였다.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썼다. 이번에도 처음 시도해 보는 것들이 많아 즐거웠다.



-

Lonely Keyboard


우리는 종종 아웃풋을 신경쓰느라 인풋을 멀리 하게 됩니다. 글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민망하면 연신 delete 키를 누르죠. 심할 때는 나 같은 게 무슨 글이야하며 체념하기도 합니다.

저 또한 그런 경험을 많이 했고 지금도 종종 그럽니다. 그럴 때마다 키보드를 멀리 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키보드가 아니라 모니터를 멀리 해야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니 문제는 키보드가 아니라 모니터에 있었습니다.

모니터가 있으니 글을 자꾸 확인하고 부끄러워져 지우는 것입니다. 결국엔 하얀 공백과 재촉이듯 깜빡이는 커서에 질려 키보드와 거리를 두게 되기도 하죠.

잠시 책상에서 모니터를 치우고 키보드만 남겨 보았습니다. 불편했습니다. 아웃풋 없는 인풋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죠. 모니터는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근데 그 짧은 순간에 분명히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마음은 모니터가 없어야 더 잘 해소될 수 있다는 것. 주로 바깥에 꺼내놓기 어려운 날것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그런 마음을 키보드 자판에 흘려보내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이번 파리 리옹역에서의 전시 Lonely Keyboard는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털어놓지 못한 마음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검은 단상 위에 놓인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마음을 연주해 보세요. 작성한 글은 어디에도 저장되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른 참여자 분들을 위해 키보드 사용 전 손 소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고독한 키보드와 함께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만나길 바랍니다.


작가 오르페

-


전시가 시작된 후 오르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lonelykeyboardparis라고 검색했다. 전시에 참여한 사람들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르페의 유명세 덕분에 처음엔 몇 개 되지 않았던 게시글이 빠르게 늘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게시글을 보며 오르페는 실망했다. 그의 전시는 자아를 치장하는 용도로 소비될 뿐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진지하게 키보드에 흘려보내는 사람은 없는 걸까. 애초에 그런 사람을 인스타그램에서 찾으면 안 됐겠지만.

오르페는 전시 녹화본만을 기다렸다. (주최측에선 오르페에게 일주일 간의 전시를 녹화한 영상을 주기로 했다.) 필름의 현상을 기다릴 때처럼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대로 전시에 참여해 준 사람이 있길 바랐다.

마침내 녹화본을 받고 그는 스케줄을 오가며 계속 영상을 봤다. 확실히 인스타그램에서 보지 못한 장면이 보였다. 특히 전시가 시작되고 사람들의 반응이 서서히 변하는 게 흥미로웠다.

평소엔 보지 못한 검은색 단상과 그 위에 올려진 하얀 키보드. 몇몇 행인은 호기심에 기웃거리다 이내 다가와 전시 설명을 읽었다. 설명을 읽은 사람 대부분이 전시에 참여했다. 두 손을 키보드에 올리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판을 두들겼다.

전시를 녹화한 카메라는 단상과 거리가 있어 참여자들이 어떤 자판을 누르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확인하지 못할 날것의 마음은 오르페의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영상에 박힌 시간대와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그들이 어떤 마음을 남겼을지 상상했다.

아침에 캐리어를 끌고 온 여자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설렘을, 오후에 연인의 손을 잡고 온 남자는 애정을, 퇴근길 어깨가 축 쳐져서 온 여자는 직장 상사에 대한 분노를 남겼겠지.

그렇게 첫 번째 날의 녹화본을 보다 보니 어느새 리옹역에 사람의 왕래가 잦아드는 시간이 찾아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리옹역 군데군데 옅은 조명이 비쳤다. 단상에도 미등이 하나 켜졌지만 전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더 이상 없는 듯했다. 스케줄을 마치고 침대에서 영상을 보던 오르페는 이제 그만 노트북을 덮으려 했다.

그때 단상 근처에서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누더기 차림을 해서 리옹역 근처 집시 혹은 노숙자로 보이는 남자. 그는 경계를 하듯 단상을 빙 둘러보다 점차 거리를 좁혀 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오르페는 흥미가 생겨 영상에 다시 집중했다.

어느새 단상 바로 앞까지 온 남자는 전시 설명을 읽었다. 어두워서인지, 눈이 침침해서인지 손가락으로 글을 짚어가며 읽었다. 큰 가방을 짊어지고 있어 거동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설명을 다 읽고 눈치를 보듯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잠시 키보드를 쳐다보곤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단상 왼쪽에 내려놓았다.

키보드를 치려 하는구나. 오르페는 남자의 행동에 더 몰입하게 됐다. 자판이 더러워지겠군. 오르페가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남자는 단상에 올려진 소독제를 짜 손에 발랐다. 손마디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바르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 남자는 손을 털고 손목을 돌렸다.

마침내 남자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을 때 그 모습이 꽤 경건했다. 짙게 깔린 어둠 한 가운데에 조명을 받고 서있는 남자와 키보드. 남자는 키보드의 감촉을 느껴 보려는 듯 두 손바닥으로 자판을 어루만졌다. 연주에 앞서 자신만의 의식을 치루는 피아니스트 같았다.

이러한 남자의 행동은 오르페에겐 의외였다. 오르페는 마음 한구석에서 그가 키보드를 훔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했다. 그런데 웬걸 남자는 오르페의 편견이 무색해질 정도로 전시에 진지하게 임했다. 남자만큼 오르페의 의도대로 전시에 참여해 준 사람은 없었다.

남자는 이내 의식이 마무리되었는지 손가락을 자판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녹화본에선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연주가 시작되기 전의 정적이 들려오는 듯했다. 오르페는 숨을 죽이고 그의 시작을 기다렸다.

남자의 손가락은 서서히 움직였고 이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그는 머릿속에 악보가 있는 피아니스트처럼 한순간도 주저하거나 멈칫하지 않았다. 그렇게 연주는 거의 30분 간 이어졌다. 남자의 표정을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오르페는 그가 분명 무아지경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연주를 끝낸 남자는 단상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짊어매고 자리를 떠났다. 첫 번째 날의 마지막 참여자였다.

첫 번째 날의 녹화본에서 대부분의 참여자가 1분을 넘기지 못하고 키보드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그렇기에 오르페가 그 남자에게 강한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오르페는 두 번째 날 녹화본을 빠르게 돌려보며 그가 다시 나타나는지 확인했다.

남자는 그 다음 날에도 비슷한 시간대에 남루한 행색으로 나타났다. 그가 다시 화면에 모습을 보인 순간 오르페는 운명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우주가 자신과 남자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설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전시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 남자뿐이었다.

남자는 전날과 동일하게 가방을 단상 왼쪽에 내려놓고 경건한 의식을 치룬 뒤 연주를 시작했다. 베일에 가려진 관객으로서 무대를 즐기니 묘한 즐거움이 있었다. 두 번째 날의 연주 또한 한순간의 끊김 없이 30분 가량 이어졌다.

그렇게 남자는 전시가 끝나는 날까지 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나타나 연주를 하고 사라졌다. 오르페는 그가 나타난 시간대만 따로 떼어 이어 붙였다. 편집을 다 하고 창을 보니 해가 뜨고 있었다. 새벽 6시였다. 녹화본을 받은 날 바로 밤을 샜지만 오르페에겐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표정엔 생기가 가득했다.

이후 오르페는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편집한 영상을 보았다. 하루 중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일과 중에는 영상을 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겼다. 경건한 연주자에 걸맞는 관객이 될 필요가 있었다.

오르페는 어떠한 간섭도 없는 집 안 감상실에서 프로젝터로 영상을 재생했다. 감상하는 시간대도 남자가 나타난 시간에 맞췄다. 그렇게 하면 연주를 실황으로 듣는 느낌이었다. 또 영상과 함께 카라얀이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재생했다. 영상과 음악 모두 한 차례의 연주가 30분 정도로 비슷해 알맞았다.

오르페는 단독 관객으로 연주를 감상하며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나갔다. 그의 정체는 뭘까. 도대체 키보드에 어떤 마음을 흘려보내는 걸까. 그의 머릿속에 있는 악보를 세상에 내놓을 생각은 없는 걸까. 궁금증은 연주가 거듭될수록 눈덩이 불듯 커졌다.

오르페가 감상을 시작하고 5일 째가 된 날, 그는 모든 스케줄을 비우고 리옹역으로 향했다.




“신문지 아저씨네요.”

집시 소년이 오르페가 보여 준 사진을 보고 말했다.

오르페는 며칠 간 리옹역 근처를 살폈을 때 자주 눈에 띈 집시 소년에게 다가갔다. 근방에 대해 잘 알 것 같았고 10대 중반 정도로 보여 그나마 편하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집시에게 누군가 먼저 다가오는 경우는 드물어 처음에 소년은 경계했다. 근데 여자가 뭔가 감추는 기색이 있어 호기심이 생겼다. 여자는 눈에 띄고 싶지 않은지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걸로 모자라 외투에 달린 후드까지 뒤집어썼다. 소년은 이 정도면 경찰은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여자 그러니까 오르페의 말을 들어 보았다. 오르페는 영상을 캡처한 사진과 10유로를 건네며 남자에 대해 물었다.

단숨에 나온 대답에 오르페의 눈이 커졌다. 신문지 아저씨라니. 별칭이 있을 정도면 꽤나 알려진 사람이려나.

“밥은 먹었니?”

“아뇨.”

“밥 사줄 테니까. 그 신문지 아저씨라는 사람에 대해 알려 줄래?“

”좋아요.“

둘은 리옹역 근처의 케밥집으로 갔다. 소년은 양고기 케밥 세트를, 오르페는 커피를 시켰다.

“여기 근처에 사니?”

“네. 근처 살아요. 근처 사세요?“

”아니. 나는 다른 곳 살아.“

”그래 보여요. 여기 말고 좋은 동네 살죠? 16구 이런 곳이요.“

”어떻게 알았니?“

”말투도 그렇고 이런 싸구려 케밥 식당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요.“

“이 식당을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 동네에 익숙하지 않은 건 맞아.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거고.“

그때 케밥 세트와 커피가 나왔다. 소년은 바로 케밥을 입에 넣었다.

”그래도 여기 맛있어요. 다음에 와서 한번 먹어 봐요. 또 올 거잖아요. 그 아저씨 찾으러. 지금 얼굴 보니까 기억나요. 최근에 리옹역 자주 왔죠?”

“내가 그렇게 눈에 띄었니.”

“그렇다기 보다는 저희가 관찰을 잘하는 거겠죠. 역을 오고 가는 사람한테는 여기가 잠시 거쳐가는 곳이겠지만 저희한테는 터전이니까요.”

“저희라 하는 거면 무리가 있는 건가?”

“그렇죠. 혼자면 힘들어요. 같이 다니면서 정보 공유도 하고.. 뭐 그러는 거죠.“

”그러면 이 근처는 훤하겠구나. 그래서 그 남자도 아는 거고. 신문지 아저씨라 한다고?“

”맞아요. 저희는 신문지 아저씨라고 불러요. 신문지를 엄청 수집하고 다니거든요. 사진에서 큰 가방을 보고 바로 그 아저씨라 생각했어요. 거기 안에 신문지가 엄청 들어가 있어요.”

“왜 그런지 아니?“

”모르죠. 단지 그걸 엄청 소중히 여긴다는 건 알아요. 아저씨가 어딜 가나 그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다른 무리 애들이 귀한 게 들었나 하고 한 번 훔친 적이 있거든요. 나쁜 놈들이죠.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노리다니. 어쨌든 아저씨가 잠깐 잠들었을 때 훔쳐서 도망갔는데.. 그때 얼마나 울부짖던지. 점잖은 아저씨라 생각했는데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다행인 건 애들이 가방 안에 거의 신문지만 있으니까 그냥 길거리에 버리고 간 거였죠. 저희가 주워서 아저씨한테 돌려 줬어요.“

”기특하네. 그럼 그 사람이랑 좀 친한가?”

“그냥 길가다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예요.”

“이미 알겠지만 그 남자에 대해 좀 알아야 되거든. 근데 내가 대놓고 가서 묻기 어려운 상황이라. 그 남자에 대해 아는 게 더 있니? 조금이라도. 직업이라든지, 사는 곳이라든지.”

“직업이 없으니까 여기서 돌아다니는 거겠죠? 베르시쪽이라든지 드 골 다리 아래라든지 여기 근처에서 옮겨다니는 것 같더라구요.”

“그렇구나. 평범한 노숙자는 아닐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궁금하면 제가 더 알아볼 수도 있구요. 물론 맨입으로는 못 하겠지만.“

”뭘 해 주면 되지?“

”매주 금요일 이 시간에 여기 케밥집에서 만나요. 100유로랑 지금처럼 케밥 세트 하나 사 주세요. 케밥 먹으면서 일주일 동안 알아본 거 말해 줄게요.”

”좋아. 대신 지금 100유로를 주지는 않을 거야. 너가 돈만 받고 사라질 수 있으니까. 다음 주에 봤을 때 줄게.“

”알았어요. 주변에도 좀 물어볼게요. 오늘 케밥은 잘 먹었어요. 다음엔 한번 먹어 보세요.”

집시 소년이 휴지로 손과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그만 일어나자.“

둘은 가게 앞에서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 뒤로 몇 주 동안 오르페는 금요일마다 집시 소년을 만났다. 100유로를 건네고 케밥을 사 주며 남자를 조사한 내용을 들었다. 충분한 정보를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집시 소년이 주위에 수소문한 결과 남자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금시초문인 듯 반응했다고 말해 주었다. 또 그의 정체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르페가 와서 남자에 대해 묻기 전까지 그는 투명 인간처럼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돈 받은 값을 하기 위해 집시 소년은 남자와 직접 이야기도 나눴다고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남자의 입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얻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소년이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남자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남자의 신상에 대해 물을 때마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연륜이 있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캐내기엔 소년은 너무 어렸다. 소년은 더 물었다간 남자가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래도 남자를 가까이서 대하며 그가 검은 공책을 늘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년의 말에 따르면 남자는 그 낡은 공책을 꽤나 아끼는 듯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뒤 검은 공책이 오르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밤에 연주 영상을 볼 때마다 공책 내용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남자가 연주한 악보가 그 안에 적혀 있을 게 분명했다.

오르페는 검은 공책을 직접 보고 싶어 소년에게 남자의 위치를 물었다. 소년은 얘기해 줘도 모를 것이라 말하며 직접 안내를 해 주었다. 그날 오르페는 처음으로 남자를 육안으로 보았다. 먼 발치에서 보았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베르시 공원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소년은 남자가 주로 리옹역에 버려진 신문을 수집한다고 말해 줬다. 오르페와 소년은 남자를 중심으로 360도를 돌며 관찰했다. 영상에서만 보던 남자를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노숙자가 아닌 귀인처럼 느껴졌다.

더 지켜보니 남자가 품 안에서 검은 공책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보고 오르페는 멈춰 서서 남자를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저 공책이구나. 소년은 오르페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직접 가서 물으면 안 되냐고 얘기했다.

“그럴 수는 없어.”

“왜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거든.“

오르페도 직접 가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당신의 연주를 봤다는 사실을, 그래서 당신의 글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마음을 털어놓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 남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대뜸 나타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하는 거니까. 오르페와 소년은 그렇게 거리를 두고 남자를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면 더 알아보기 어려울 거 같은데요.“

소년이 말했다.

“다음 주까지만 더 알아봐 줄 수 있겠어?”

“저야 좋죠. 그럼 다음 주에도 케밥 집에서 봐요.”

집시 소년과 헤어진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검은 공책이 오르페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닿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와 같은 인연이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왜 창작물을 머릿속에만 두고 밖으로 꺼내놓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르페는 예술은 세상에 나와야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오르페가 괜한 불만을 토로하며 공원에서 리옹역으로 돌아가던 중 한 집시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 집시는 오르페를 도와주던 소년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웠다. 오르페가 놀라 쳐다보자 집시 청년이 입을 열었다.

“검은 공책이 필요하죠?”

갑자기 청년이 뱉은 말에 오르페는 얼어붙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죠?”

“그쪽이 신문지 아저씨의 검은 공책을 찾고 있잖아요. 꼬맹이 무리한테 들었어요. 어떤 여자가 100유로씩 주면서 그 아저씨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이런.”

“맞죠? 검은 공책의 내용이 궁금하면 제가 훔쳐 줄게요. 아무런 뒤탈 없이. 300유로만 주세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

”훔쳐서 내용만 얼른 확인하고 돌려주는 건 어때요. 저번에도 그런 적 있어요. 그 아저씨 가방을 훔쳤다가 별 거 없어서 돌려줬죠.“

“직접 돌려준 거 아니라 들었는데.“

”어쨌든 주인한테 다시 돌아갔고 아무 문제 없었어요. 어때요. 저희가 깔끔하게 할게요.“

“괜찮아요.“

오르페는 집시 청년 옆으로 지나쳤다. 그러자 청년이 옆으로 따라붙으며 말을 이어갔다.

”생각 바뀌면 다음 주 꼬맹이 보는 시간에 리옹역 맥도날드로 와요. 기다릴게요.“

집시 청년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오르페의 곁을 떠났다. 오르페는 발을 재촉해 서둘러 리옹역으로 돌아갔다.




처음엔 맥도날드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범죄 행위였다. 하지만 생각이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마다 그 방법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점차 고개가 돌아갔다.

오르페는 그들의 사회에서 그 정도는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신문에서 집시가 물건을 훔쳤다는 뉴스를 수도 없이 보았다. 또 공책의 내용만 확인하고 금방 돌려줄 거니 더더욱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까. 실제로 집시 무리가 남자의 가방을 훔쳤다가 돌려준 일은 지역 신문에도 나지 않았다.

또 이 모든 일이 오르페에겐 게임 같았다. 그는 그저 맥도날드에 가서 300유로를 줄지 케밥집에 가서 100유로를 줄지 선택하면 됐다. 오르페는 점점 자신의 선택이 초래할 결과에 무감각해졌다.

반대로 그의 검은 공책에 대한 관심은 집착으로 이어졌다. 남자의 연주를 볼 때마다 오르페는 숭고함을 느꼈다. 남자는 뽐내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오롯이 본인의 만족을 위해 키보드를 연주했다. 무아지경의 상태가 될 정도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이 더 숭고한 것처럼, 예술도 그런 게 아닐까. 남자의 연주는 오르페를 돌아보게 했다.

오르페는 남자가 자신과 다른 차원에 있다고 느꼈다. 오르페는 그럴듯한 예술을 했지만 남자는 진짜 예술을 했다. 그런 그가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의 머릿속 악보뿐만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검은 공책에 대한 관심이 집착으로 거듭난 이유였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오르페의 마음속에선 치열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맥도날드냐 케밥이냐. 금요일 리옹역에 내린 오르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르페와 검은 공책

2050년 4월 20일 기사


2023년의 Lonely Keyboard 전시 이후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유명 작가 오르페. 그는 독신자로 살다 204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품 전시회가 기일 1주년을 맞아 2050년 4월 1일에 열렸습니다.

전시회에선 2023년 이후의 미발표작 108점이 공개 되었습니다. 예술계에선 새로이 공개된 작품에 대해 그 전의 것들보다 발전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 외에 오르페의 유품 전시회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오르페의 유언과 함께 공개된 검은 공책 때문입니다. 그는 검은 공책에 얽힌 자신의 사연을 소개하고 아래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3주의 전시 기간 동안 검은 공책의 내용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를 진행한다.  

투표는 전시 웹사이트를 통해 누구나 익명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투표 결과는 전시 기간이 끝난 직후 발표한다.

공개를 원하는 투표 수가 과반을 넘으면 검은 공책의 내용 전문이 웹사이트에 공개되며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투표 결과가 반대면 파리에 전시된 검은 공책 원본이자 유일본을 즉시 소각 처리한다.  


사연이 공개되고 범죄자다, 죽고 나서 죄를 고백하다니 비겁하다 등 오르페를 향한 비판이 줄을 이었습니다. 또 자신을 공책의 주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아무도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주인의 행방이 묘연하니 오르페가 자신의 마지막 전시를 위해 사연을 지어낸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습니다.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건 역시 오르페의 유언이었습니다. 그의 유언을 두고 사람들의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사생활을 지켜 줘야 한다, 훔친 공책의 내용을 보고 싶다니 관음증이다 등의 의견이 공개적인 장소에선 우세했으나 익명 게시판에선 달랐습니다. 검은 공책의 내용을 추측하며 얼른 공개되면 좋겠다는 글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양상에 투표 결과를 두고 베팅을 하는 도박 사이트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 투표 결과는 내일 파리 시간 기준 오후 5:00에 전시가 종료된 직후 발표됩니다. 투표는 전시 종료 직전까지 할 수 있으며 기존에 투표했던 사람도 선택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오르페는 지금도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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