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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Sep 24. 2023

단편소설 <몽중인>

숨쉬듯 쓴 단편소설 #6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엔 좀 특이하게 진행했는데.. 아래 문장을 글에 포함해야 했다. 이번에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글쓰기의 즐거움을 더 많이 알게 된다.


그거 아니? 너네 엄마가 참 재밌는 사람이었어. 근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네. 참 그때가 그리워.




집에 왔다. 익숙한 듯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에 들어서니 고요했다. 나를 반기러 나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집 냄새를 맡기 위해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것은 집 냄새임과 동시에 한 사람의 일생이 담긴 향이었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집에 올 때마다 내 안에 가득 밀어 넣었다.


자취를 하고 있지만 엄마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자취방과 엄마 집은 가까워서 일주일에 두 번은 밥을 먹으러 갔다. 가서 반찬도 많이 얻어 왔다. 그런 나한테 엄마는 종종 너는 어디 가서 독립했다고 하지 말아라라고 얘기했다.


그게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지금 나는 집에서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다. 휴가를 내고 며칠간 엄마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버릴 것을 담을 10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를 여러 개 준비해 왔다. 갑작스레 떠나 유언을 남기진 못했지만 엄마는 웬만하면 버리라고 했을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만 간직해야지 생각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10평 내외의 1.5룸짜리 집, 단촐한 살림이라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정리 첫 번째 날. 시작한 지 단 몇 분만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날이 다 갈 때까지 종량제 봉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봉투를 들어서 흔들면 찰랑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마저도 휴지통을 비우며 채운 거였으니 사실상 첫날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셈이었다.


엄마는 필요한 것만 지니고 살았기에 엄마의 손을 타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 물건 하나를 집으면 그에 깃든 추억도 함께 들렸다. 엄마가 떡볶이를 담았던 그릇, 너무 많이 써서 색이 바랜 은수저. 이런 기억이 떠오르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날. 마음을 굳게 먹고 집에 들어섰다. 전 날 잠자기 전에 어떤 걸 버려야 할지 미리 생각도 해 놓았다. 화장품, 샴푸 같은 소모품 먼저 정리하기로 했다. 엄마의 몇 개 안 되는 화장품은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로션, 리무버의 이름을 휴대폰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평소엔 엄마가 쓰는 화장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달랐다. 내가 쓰는 그 어떤 화장품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내가 메모한 제품이 단종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내 방 화장대에 두고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향을 맡겠지.


종량제 봉투를 가져와 선반 위에 올려진 화장품을 하나씩 담았다. 두 번째 날은 그렇게 엄마의 물건을 조금씩 정리했다. 날이 저물 때쯤 되니 봉투 하나를 다 채웠다. 집에 돌아가서는 메모한 제품 중 몇 가지를 자취방으로 주문했다.


세 번째 날. 전날과 같은 속도로 정리가 될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는 일은 날을 거듭할수록 어려워질 것 같았다. 정리하기 쉬운 것에 먼저 손이 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의 손때가 묻은 그릇, 의자 같은 것들은 도무지 버릴 수 없었다. 다시 구매할 수 있는 것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첫 번째 날과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정리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맸다. 이번엔 더 깊숙한 곳, 보일러실까지 살폈다. 엄마가 평소 잘 안 쓰는 잡동사니를 쌓아 두는 곳이었다. 이곳엔 마음 편히 정리할 게 좀 있겠지 하고.


반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여러 물건이 테트리스처럼 쌓여 있었다. 문 바로 안쪽엔 여름이 지나 넣어둔 선풍기와 샤브샤브용 전기레인지가 보였다. 최근에 넣은 것일수록 겉에 나와 있는 거겠지. 몇 달 전 엄마와 샤브샤브를 끓여 먹은 게 생각났다.


보일러실 안에서 정리하는 건 쉽지 않아 물건을 하나씩 밖으로 꺼냈다. 물건들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려 있어 빼내는 게 쉽지 않았다. 남색 여행용 캐리어가 가장 그랬다. 안이 비어 있는 것 같아 무겁지는 않았지만 부피가 컸다. 각도를 이리저리 틀어 간신히 밖으로 갖고 나왔다.


잠시 쉬는 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캐리어를 열었다. 예상한 것처럼 안은 비어 있었다. 엄마가 남미 여행 갈 때 썼을 캐리어. 어느 날 엄마는 대학교 동창과 함께 파타고니아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여자 둘이 남미 여행이라 걱정되었지만 반대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버킷 리스트 같았다.


그때 엄마를 말렸다면 지금 후회를 하고 있겠지. 그때 엄마가 보내준 파타고니아 사진을 핸드폰에서 찾아봤다. 사진 속의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한국에 와서 나한테 여행 얘기를 해 줄 때에도 이런 표정이었다. 엄마의 추억으로 가득한 이 캐리어를 절대 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캐리어를 닫으려던 중 안쪽 주머니에 살짝 삐져나온 흰색 종이가 보였다. 종이 끄트머리를 잡고 빼냈다. 하나를 빼내니 다른 종이도 딸려 나왔다. 아래쪽에 파타고니아 호텔 로고가 박힌 손바닥 크기의 메모지였다. 메모지에는 엄마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남미 여행에서 엄마가 쓴 글로 보였다. 나는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메모지를 모두 꺼냈다.


다 세어 보니 20장이었다. 메모지 오른쪽 위에 엄마 손글씨로 작게 순번이 적혀 있어 순서대로 나열하고 읽기 시작했다.



오늘 이과수 폭포를 봤다. 악마의 목구멍이라는 별명을 가진 폭포라는데 직접 보니 바로 이해가 되었다. 어디서 흘러오는지 모를 물줄기가 쉼 없이 목구멍에 삼켜졌다. 물보라에 가려진 폭포 아래 어디쯤 심연이 있을 것 같았다.


가이드가 하늘에서 찍은 이과수 폭포 영상을 보여 줬다. 하늘에서 보니 더 악마의 목구멍처럼 생겼다. 영상에선 폭포의 상류 쪽도 보였다. 폭포의 위쪽에는 넓고 푸른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얼마 후 닥칠 일을 알지 못하고 평원에서 평화로이 흐르는 물줄기가 순진무구해 보였다.


물줄기는 발원하고 언젠가 해수에 닿아야 한다. 어느 책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다. 어쩌면 저 물줄기는 평원을 흘렀기에 폭포를 만난 걸지도 모른다. 스스로 급류를 이루지 못한 업보로 산산조각 나 악마의 목구멍에 삼켜지는 것이다.


이과수 폭포를 볼 때만큼은 경희와의 대화가 줄었다. 폭포는 경희와 나 모두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각자 했겠지.


나 또한 평원을 흐르길 택했다. 언젠가 닥칠 악마의 목구멍을 생각하지 못하고 순진무구하게 흘러왔다.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준서에게 사과를 깎아 주고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었다. 남편은 소파에 누워 언제나처럼 TV를 보며 준서에게 시덥잖은 농담을 던졌다. 사춘기가 오기 전 준서는 아빠의 농담에 잘 웃어 줬다.


그날이 내가 악마의 목구멍에 삼켜지는 날일 거라 생각도 못 했다. 어떤 프로그램을 보다가 남편이 준서에게 얘기했다.


"그거 아니? 너네 엄마가 참 재밌는 사람이었어. 근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네. 참 그때가 그리워."


남편이 툭 던진 말에 내 마음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갑작스레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준서는 날 보더니 눈이 땡그래졌다. 남편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미궁에 빠졌다. 남편은 갑작스레 눈물을 흘리고 무기력해진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무너진 이유를 감추기 위해 무너지지 않은 척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없는 일처럼 행동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은 나 자신을 기괴하게 만들었다. 억지스럽게 괜찮은 척하는 내 모습에 지친 남편은 나를 떠났다. 텅 빈 껍데기 같은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을 테니까.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재밌는 사람이었나. 사실 그때 난 안정을 찾고 있었다. 원래부터 안정을 추구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불안의 반작용으로 안정을 찾게 되었을 뿐이다.


그때 내 마음은 한 여자에 대한 집착으로 얼룩져 있었다. 대학 졸업 직후 친구를 따라 들어간 바에서 만난 재경이. 그는 나와 동갑에다가 대학도 같았다.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바라 재경이는 나와 친구의 대화에 곧잘 끼어들었다. 우리 셋은 바 테이블에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안 가 나는 다시 그 바를 찾았다. 친구 없이 혼자서. 재경이와 대화하는 시간이 좋았다. 재경이는 재밌는 아이였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취직 길을 걸은 나와 달리 그는 대학 시절부터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극단에서 스탭을 하며 배우에 도전해 보거나,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기도 했다.


재경이가 만들어 준 칵테일을 마시며 이야기를 듣는 게 하루 중에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재경이는 하루 동안의 내 푸념을 듣고는 딱 알맞은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다. 오늘은 어떤 칵테일을 타 줄까. 또 그 칵테일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재경이의 이야기엔 천일야화처럼 빠져드는 마력이 있었다.


어느 날 재경이는 내게 브랜디 알렉산더를 만들어 줬다. 크리미하고 달콤한 맛에 여러 잔 마셨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재경이에게 만나자는 얘기를 들었다. 여자에게 고백받은 건 처음이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이성에게 고백받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어차피 가게에는 둘만 있었지만 그날은 가게를 일찍 닫았다. 우리는 함께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며 늦은 시간까지 함께 했다. 서투른 나를 보며 재경이는 웃었다. 붉은 조명에 비친 재경이의 모습. 재경이의 뒤편에서 I'm not for everyone이라는 글자의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우리 둘만의 세상이었다. 재경이에게 느낀 감정은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그다음, 또 그다음에 만났을 때에도 설렜다. 바 밖에서 만났을 때에도 재경이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페에선 커피 이야기, 공원에선 지나가는 사람 이야기. 우리는 많은 것을 나눴고 점차 하나로 섞여갔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 나는 사회에서 말하는 아홉수라는 나이가 되었다. 괜찮은 애가 여태 남자친구가 없다는 얘기가 이리저리 돌았다. 부모님은 물론 대학 동창, 회사 동료까지 나를 걱정했다. 내게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나선 사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애인이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보여달라고 할 게 분명하니까. 그저 아직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없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재경이는 밀려드는 아홉수의 압박에 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재경이의 눈엔 내가 갈림길에 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랬다. 우리의 관계는 두터웠지만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그마저도 모두 재경이의 친구였다.


아홉수 언저리에 살펴보니 재경이는 더더욱이 나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재경이의 세계엔 곁에 남자가 없다고 걱정하는 사람, 철새마냥 약속한 듯 한 계절에 신혼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이 없었다. 재경이의 세계에서 재경이는 정상이었지만 나는 내 세계에서 정상이 아니었다. 재경이가 이런 내 처지를 알기는 할까. 아홉수가 없는 세상에 사는 애가 내 마음을 이해할까.


가장 가까운 동창인 경희가 내게 청첩장을 준 날. 갑자기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재경이의 연락을 받지 않다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전화를 걸었다.


우리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라고 재경이에게 물었다. 재경이는 너만 마음을 정하면 되는 거라고,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미련을 버리고 자신의 세계로 완전히 넘어오라는 얘기였다. 답답했다. 재경이와 나 사이에 거대한 벽이 생긴 듯한 느낌이었다. 그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크게 다퉜다. 자기 말만 하느라 서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몰랐다.


재경이가 한 마지막 말만이 기억에 남았다. 재경이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가 저울에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자기한테는 나밖에 없는데 나에겐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끝으로 재경이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여자에게 처음 받아보는 이별 통보였다. 낯설었다. 내가 겪은 어떤 이별보다도 가슴이 아렸다. 전화가 끊어지고 다시 걸었지만 소용없었다. 그 후로 여러 차례 다시 전화를 걸고 바에 찾아가기도 했다. 몇 주 간의 집착이 이어졌지만 끝내 재경이에게 닿지 못했다.


내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고 결국 경희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게 되었다. 경희는 내게 끝맺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남자를 소개해 줬다.


남자는 첫인상부터 괜찮았다. 자상한 사람이고 믿음직스러웠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 올바른 길을 걸어온 사람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한 마디로 그는 내가 속한 세계의 정석 같은 사람이었다. 세 번째 만남에서 그는 내게 고백했고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모두가 천생연분, 선남선녀라고 했다. 부모를 비롯한 주위의 모두가 우리를 지지해 줬다. 우리는 한낮에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할 수 있었고, 친구들에게 서로를 소개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만난 지 일 년 만에 결혼했다. 주위에선 이런 사람이랑 결혼하려고 여태 미룬 거였구나 하며 축하해 줬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재경이의 세계와 끝을 맺었다. 돌아보지 않도록 애썼다. 직장 일에 힘쓰면서도 준서를 가졌다. 준서가 나올 때즘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로는 정말 뒤 돌아볼 새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남편의 농담에 무너지기 며칠 전 대학 동창을 만났다. 연말 모임이라 한남동의 한 바에서 만났다. 다들 오랜만의 외출이라 기분을 냈다. 오늘만큼은 주부라는 사실을 잊고 놀자고 했다. 우리는 4명이라 바 테이블이 아닌 홀 쪽의 다인석 테이블에 앉았다.


자리에 앉았을 때 놀랐다. 칵테일 코스터에 익숙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I'm not for everyone.


자리에서 바 테이블 쳐다보니 재경이가 서 있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와 금방 시선을 거두긴 했지만 찰나의 순간, 그곳에 우리 둘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직원에게 바의 마스터가 타 주는 칵테일을 먹고 싶다고 했다. 직원은 그 뒤로 재경이에게 가 말을 전했고 얼마 뒤 살구색의 칵테일이 나왔다. 골든 드림이었다. 친구들은 색깔도 이름도 근사한 칵테일이라고 얘기했다.


재경이를 한 번 보고는 칵테일을 마셨다. 크리미하고 달콤한 맛이었다. 칵테일을 연이어 주문한 친구들과 달리 나는 더 주문하지 않았다. 골든 드림을 머금고 재경이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처음 만난 날 새벽까지 수다를 떤 일, 재경이에게 고백을 받고 함께 칵테일을 만든 일 그리고 재경이가 해 준 이야기들. 돌아보니 수많은 기억이 등불을 켜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날 바에서 나온 후에도 나는 꿈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잠자기 전, 새벽에 일어나서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에도 재경이 생각을 했다. 남편이 날 꿈에서 깨우기 전까지는.


남편이 내게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을 때 난 꿈에서 깼다. 낙차가 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제 재경이에게 everyone이라는 사실을.


골든 드림. 재경이가 내게 선사한 것은 황금빛 꿈이었다.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결국엔 꿈. 바 테이블 너머 재경이의 세계는 아득했다. 이젠 내가 건너갈 수 없는 꿈같은 곳이었다.


재경이와의 관계가 끝난 후의 반작용으로 나는 너무 먼 곳까지 와 버렸다. 나는 평원에서 흐르기를 택했고 긴 시간 낙차 없는 삶을 살아왔다.


재경이와 달리 내게는 선택지가 있었고 그건 곧 후회할 일도 생긴다는 거였다. 그때 내가 재경이의 세계로 넘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동안 나는 나로 살아온 걸까. 순간 내가 어느 세계에도 제대로 속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무너졌다. 만약 준서가 아니었다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겠지.


내려둘 것은 내려두고 남길 것은 남기려 이번 여행을 왔다. 경희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함께 오게 됐다. 이 나이가 되면 다 그런 마음이 드나 보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여행을 하며 돌아보니 남길 것은 두 가지면 충분한 것 같다.

재경이와 준서.


내 삶은 이 둘을 위한 것이었다.



엄마의 글을 읽고 하루 뒤 집 정리를 마무리했다. 나는 엄마가 남긴 메모지 20장만 남기기로 했다.


그 뒤로 나는 엄마가 갔던 바를 찾았다. 재경이라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여러 칵테일 바를 다녔고 많은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금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분은 꽤나 유명한 바텐더였던 모양이다. 지금은 아현동에서 작은 바를 운영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메모지를 챙겨 아현역으로 향했다. 바는 아현동 고갯길 위 마을버스 종착점 바로 근처에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낡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2층에 오르니 X.Y.Z라는 문패가 붙어 있는 문이 보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스피크이지 바를 이미 여럿 다닌 터라 문제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갔다. 찰랑하고 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은 켜져 있어 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잠시 뒤 백바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짧은 백발의 여자가 나왔다. 흰 셔츠에 검은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말랐지만 기품이 있는 사람이었다. 칵테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바에 왔다는 생각이 들 게 분명했다.


나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어서 오세요라는 말을 하며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나는 칵테일을 마실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그럼요 여긴 바인 걸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라고 답했다. 나는 브랜디 알렉산더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브랜디, 크렘 드 카카오, 우유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하나씩 얼음을 넣은 셰이커에 흘려 넣었다. 그다음엔 뚜껑을 닫고 셰이킹을 했다.


브랜디 알렉산더입니다. 여자가 잔이 올려진 코스터를 손끝으로 밀며 말했다. 코스터에는 익숙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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