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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Oct 27. 2023

단편소설 <포인트 제로>

숨쉬듯 쓴 단편소설 #7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의 소재는 제로였다. 이번에는 간만에 SF 장르로 다시 썼다. 역시나 재밌었다.



포인트 제로


0. 텍사스주 보카치카 우주 발사 기지


발사 10초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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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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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3

2

1

0


연필 모양의 하얀 기둥이 굉음을 내며 지면을 향해 불꽃을 토해냈다. 기둥과 대지가 씨름하는 것 같았다. 집채만 한 연기가 일 정도의 격렬한 씨름이었지만 기둥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기둥은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대지와 완전한 수직 방향으로 치솟았다.


[이륙에 성공했다.]


상황실 안의 대형 화면으로 이륙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치며 환호했다.

“잘 보렴. 저 로켓이 이제 우주로 갈 거란다.”

아버지가 화면 속의 하얀 기둥을 보며 얘기했다. 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화면에 향해 있었다. 아이는 아버지를 한 번 보고는 주위를 살폈다. 박수치며 환호하던 소리가 잦아들고 모두 숨을 죽이고 화면을 지켜봤다. 이제 기둥은 대지를 완전히 뿌리치고 창공을 누비고 있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기에 아이의 눈에는 기둥이 제자리에서 불꽃을 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조 추진 로켓 최대 출력, 초음속 돌파]


사람들은 불꽃을 길게 늘어뜨린 기둥의 모습에 매혹되었다. 기둥이 부린 마법 때문인지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화면에 보이는 기둥의 모습에 따라 약속한 듯 동시에 환호하고, 박수치고 숨을 죽였다.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는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의 말에 아이 또한 기둥을 유심히 지켜봤다.


[보조 추진체 분리, 분리 성공]


기둥 양 옆에 붙어 있던 두 개의 작은 기둥이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은 여태껏 중에 가장 큰 소리로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사람도 있었고 옆에 있는 사람과 껴안으며 기쁨을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얼른 나가자.”

아버지는 아이를 이끌고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밖에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창공의 한 지점을 바라봤다. 아버지는 아이를 올려 안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화면에서 봤던 하얀 기둥이 보였다. 하얀 기둥은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작은 기둥을 뒤로하고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기둥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환호하며 박수쳤다.


아버지는 아이와 함께 다시 상황실로 돌아왔다. 상황실 화면 왼편에는 지구가, 오른편에는 기둥의 아래 부분이 보였다. 기둥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풍경이었다. 아이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앞에 사람들이 입고 있는 티셔츠가 보이니?”

아버지의 말에 아이는 앞을 봤다.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다양한 색깔의 티셔츠가 보였다. 개중에 몇몇은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전에 다니던 회사의 티셔츠란다. 여기 있는 모두가 내로라하는 일류 회사 출신이지.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우주로 로켓을 쏘아 보내고 있는 거야. 이 일이 그만큼 흥분되고 중요한 일이라는 얘기지.”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아버지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발사 성공 축하해요. 다음번엔 직접 타고 올라갈 거죠?”

“물론이죠. 언젠가 여기 제 아들놈도 갈 겁니다.”

아버지가 아이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이는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아버지가 우주에 간다. 나도 언젠가 간다. 그때부터 아이는 우주에 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걸음마와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당연한 일.


단순히 아버지가 원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 스스로 원했다. 하얀 기둥이 대지를 뿌리치기 위해 내던 굉음과 진동,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 소리. 로켓과 사람 모두 하나의 심장을 가진 듯했다.


그날의 박동은 아이의 심장에 깊게 새겨져 그의 혈관에 피를 흐르게 했다.



1. 마우나케아 산 정상

검은색 오프로드 차가 산 능선을 타고 올랐다.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도로였다. 도로 양 옆으로는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땅은 빛에 따라 적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화성 같은 곳이군요.”

조수석에 타 있는 여자가 말했다.

“그러게요. 산 초입에는 나무나 풀이 좀 보이더니 정상 쪽은 완전 딴판이군요. 거의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산 정상에 세워진 흰색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둥근 돔 형태의 구조물이 건물 위에 올려져 있었다. 햇빛을 받아 돔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오르막길은 점차 완만해졌고 차는 산 정상의 건물 앞에 도착했다. 평탄한 대지 위에 세워진 외로운 건물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차에서 내려 건물의 문 앞에 섰다.

여자가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산 정상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푸른 하늘과 바다가 지평선에서 맞물려 분간하기 어려웠다.

“노크할까요?”

뒤편에서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다시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2. 마우나케아 천문대 안

“웨이, 당신이 뭘 원하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제가 줄 수 있는 전부예요. 마시고 좀 쉬다가 내려가 줬으면 좋겠군요.“

한 남자가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잔에서 김이 피어났다. 되는 대로 치워 공간을 마련한 테이블이라 한편에는 아직 서류가 올려져 있었다. 웨이와 수행원 그리고 남자는 어수선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아직 우주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웨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방 안 한쪽 벽에는 우주 사진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또 그 앞의 화이트보드에는 복잡한 계산을 하고 지운 흔적이 보였다.

“관심 가질 것 없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남자가 말했다.

“저희가 원하는 게 뭐죠? 제이크?”

웨이가 반문했다.

“대학생 땐 몰랐는데 뻔뻔한 사람이었군요. 절 설득하러 온 걸 알아요. 저를 그 의미 없는 우주선에 태우려고 온 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보내도 당신을 보내다니 연합도 감이 없군요.”

제이크의 말에 웨이가 웃었다.

“왜 저를 보내면 안 되는 거죠?”

“당신이 하는 사업 때문에 사람들이 우주에 흥미를 잃었으니까요. 다들 가상현실에 빠져 우주는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죠. 덕분에 저는 실업자와 다름없게 되었구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이제 다시 일자리가 생기는 거 아닌가요?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이 우주만 바라보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요.”

“간절히 바란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지금 연합은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스피어(Sphere)에 사람을 보내는 건 보여주기에 불과한 일이에요. 손을 놓고 있으면 스피어가 오기 전에 인류가 혼란에 빠져 자멸할 테니까요. 웨이 당신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알 텐데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람을 보내는 거죠. 저는 그게 이곳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비아냥대도 스피어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

“제이크. 저는 당신을 스피어에 데려가려고 온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이 먼 곳까지 온 거죠?”

웨이는 테이블 한편에 치워진 종이를 들어 제이크 앞에 내려놓았다. 우주 사진 위의 한 지점이 노란색 펜으로 체크되어 있고 그 옆에 Point Zero라고 쓰여 있었다.

“당신이 쓴 논문을 봤어요. 스피어라는 재난을 막으려면 포인트 제로에 가야 한다고 말했죠.”

웨이의 말에 제이크는 실소했다.

“과학자가 미신 같은 얘기를 한다고 결국 미친놈 취급까지 당했어요.”

“사실 미신 같은 이야기긴 하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수행원이 입을 열었다.

“청.”

웨이가 수행원인 청을 쳐다봤다.

“괜찮아요. 익숙해진 지 오래니까요. 아까 이곳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사람들한테 조롱을 받아도 전 제 할 일을 하고 있어요.”

“아직도 포인트 제로에 가야 한다고 믿는 거죠?”

웨이가 묻자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스피어가 나타난 것 자체가 비과학적인 일이에요. 존재하지도 않던 소행성이 갑자기 우주 한복판에 나타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요? 심지어 지구에 100% 충돌하는 경로에 생겼어요.”

제이크는 책상 옆에서 우주 사진 두 개를 가져와 웨이에게 보여 줬다. 하루 차이를 두고 동일한 좌표를 촬영한 사진들이었다. 다음 날 찍힌 사진에만 스피어가 보였다.

“저도 이 사진 알아요. 이것 때문에 종교도 생겼어요. 심판교라고.. 열심히 기도하면 심판 이후 천국에 갈 거라 믿는 사람들이죠.”

청이 말했다.

“전 지금 연합에서 하려는 일보다 차라리 심판교 사람들처럼 기도를 하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제이크가 말했다.

“포인트 제로는 당신의 아버지가 실종된 곳이죠?”

웨이가 물었다. 제이크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욕을 먹은 가장 큰 이유죠. 인류의 생사가 걸린 문제에 개인 사정을 갖다 붙였다고 비난하더라구요.”

“개인 사정이 아닌가요?”

웨이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실종되고 얼마 안 가서 스피어가 나타났어요. 또 스피어가 지구에 충돌하기까지 5년, 여기서 포인트 제로까지 4년 걸려요. 과학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요. 분명 관련이 있을 거예요.”

“스피어와 포인트 제로는 지구를 두고 서로 반대편에 있어요. 당신의 직감만 믿고 연합이 포인트 제로에 사람을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일 거예요.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여론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구요.”

웨이의 말에 제이크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얘기하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뇨. 저도 포인트 제로에 가고 싶어서 왔어요.”

”당신이 거기를 왜..”

제이크가 웨이를 쳐다보고 말했다.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믿거든요. 개인적인 사정도 있구요. 또 저한테는 포인트 제로로 갈 수 있는 능력도 있어요. 안내인만 있으면 되죠.”

웨이가 웃으며 말했다. 청이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종이를 한 장을 꺼내 제이크에게 건넸다.

“제이크. 웨이씨가 당신을 포인트 제로 안내인으로 고용하려고 합니다. 이건 계약서입니다.”

제이크의 눈에 계약서가 비쳤다. 그는 홀린 듯 계약서를 받아 읽었다.

“우주선까지 다 준비가 된 건가요?”

“네. 당신만 오면 완성되는 퍼즐이에요.”

웨이는 말하며 청에게 눈으로 신호를 줬다. 청은 자켓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제이크는 테이블 위에 계약서를 올려 두고 사인했다.

“안내 잘 부탁해요. 제이크.”

웨이가 말했다.



3. 텍사스주 보카치카 우주 발사 기지

“벌써 내일이네요.”

웨이가 발사대에 걸린 우주선을 보며 말했다. 둘은 발사 기지 건물 옥상에 나와 발사대를 바라봤다. 디데이 전 날의 발사대는 고요했다.

“우주에 가는 건 처음이죠?”

제이크의 말에 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는 우주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훈련은 계속해 왔어요. 실전은 다를 수 있겠지만 괜찮지 않을까요? 안내인이 있으니까요.”

웨이가 제이크를 쳐다봤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제이크는 우주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훈련하는 거 봤어요. 잘하니까 문제없을 거예요.”

“그거 알아요? 저 사실 쭉 우주에 가고 싶었어요.”

웨이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주 산업을 파괴한 장본인이 우주에 가고 싶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네요.”

제이크가 웃으며 말했다.

“섭섭하네요. 가상현실이 없었으면 저 우주선도 못 구했어요. 저희 둘만 탈 수 있는 작은 우주선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이크가 웨이를 보고 물었다.

“연합에 가상현실 방주를 만들어 준 대가로 저 우주선을 받은 거예요.”

“가상현실 방주요?”

“사람들의 정신을 가상현실에 완전히 업로드하고 바다 깊숙한 곳에 서버를 내려보내는 거예요. 연합에선 임팩트 이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진짜 살아남는 건지 모르겠네요.”

“생각하기 나름이죠. 우리도 어쩌면 데이터 쪼가리일 수 있어요.”

“스피어가 갑자기 생겨난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걸 우리가 확인하러 가는 거예요. 포인트 제로로요.”

제이크는 웨이를 바라봤다. 그는 포인트 제로가 있는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4. 포인트 제로 인근 권역

“후유증이 확실히 있네요.”

웨이가 말했다.

“저도 동면은 오랜만이라 적응이 안 되네요. 선체 점검 마치고 왔어요. 다행히 별 문제없네요. 아 그리고 당분간은 유동식으로 먹는 게 좋아요.”

제이크가 웨이에게 유동식 팩을 건넸다.

“고마워요. 좀 있다가 먹어야겠어요.”

둘은 조종석에 앉아 앞을 바라봤다. 창 바깥으로 끝없는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우주 오니까 어때요?”

제이크가 물었다.

“지금은 좀 힘들지만 좋아요. 나이 40을 넘어 제가 결국 여기까지 왔네요.”

“그런데 왜 가상현실 쪽으로 간 거예요? 이렇게 우주를 오고 싶어 했으면서.”

“제이크. 우주에 간다는 건 정말 희소하고 특별한 일이에요. 평범한 사람들에겐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죠.”

“나랑 같은 대학에 다니지 않았나요? 꽤나 학비가 비싼 학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신도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나요? 게다가 당신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기도 하죠.”

“제이크. 그거 아나요. 저는 당신의 아버지를 보며 꿈을 키웠어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저 먼 우주로 나간 이야기를 보며 희망을 가졌죠. 저도 완전 촌에서 태어났거든요. 아직 별자리로 한 해 농사를 점치는 마을이었어요.”

제이크가 웨이를 쳐다봤다. 웨이는 우주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문명과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만큼 별이 많이 보였어요. 별이 참 좋아서 도서관에 가서 천문학 책을 찾아보는 게 하루 일과가 됐죠. 그렇게 매일 같이 도서관을 다니면서 많은 걸 알게 됐어요. 물리, 수학 책도 읽고 또 당신 아버지 이야기도 알게 되고. 근데 중요한 건 제게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였어요. 도서관 사서 아저씨가 저희 부모님한테 이 아이는 꼭 도시에 데려가야 한다고 하셨죠.”

“그분 아니었으면 인재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겠네요.”

“고마운 건 그분뿐만이 아니에요. 마을 사람 전부가 저를 도와줬죠. 제가 시내의 영재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십시일반 돈을 모았어요. 학교 다닐 땐 생활비도 보내 주고.. 사실상 마을 사람들이 절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래도 부자가 되고 다 보답을 했겠네요?”

“보답을 하기 위해 부자가 된 거죠. 처음엔 몰랐어요. 저 하나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또 제가 살던 마을이 얼마나 낙후된 곳이었는지. 학교에서 친구들을 사귀며 차츰 알게 되었고 마음의 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얼른 돈을 벌어 마을에 가져다 주자 이 생각이 점점 커졌죠.”

“그래서 가상현실을 택한 거군요.”

“맞아요. 우주에 가는 꿈은 접어 두어야 했어요. 돈도 돈이지만 그 꿈은 제가 맞닿은 현실과 너무 괴리되어 있었거든요. 영재 학교 근처에서 하숙했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하루 벌어먹기 급급한 사람들이었어요. 우주는 물론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죠. 저는 그들에게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봤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 땅에 고개를 박고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저만 하늘을 보고 산다니. 전 제 이상보다 그들에게 당장의 여유와 기회를 줄 수 있는 걸 쫓기 시작했어요. 그게 가상현실이었던 거구요.”

“그래서 가상현실이 정말 사람들에게 여유와 기회를 준 것 같나요?”

“그럼요. 가상현실 덕분에 사람들은 원래 누리지 못하던 것을 누리게 되었어요. 전보다 적은 돈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죠. 시골에 사는 아이도 도시의 아이처럼 배우고 여행할 수 있어요.”

웨이의 말을 듣고 제이크는 말없이 우주를 쳐다봤다. 웨이는 제이크를 바라보고 말했다.

“당신은 가상현실 때문에 사람들이 우주에 관심을 잃었다고 생각하죠. 가상현실이 각광받을 시기에 우주 산업은 저물어 갔으니까요.”

“가상현실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를 꿈꾸지 않게 되었어요.”

“아뇨. 저는 이게 사람들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걸 보여 준다고 생각해요. 전 세계적으로 기근과 재난이 거듭되었으니까요. 제가 살던 나라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이상이 없어서 망한 나라는 없다. 양식이 없어 망한 나라가 있을 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꿈도 꿀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은 몰랐겠죠. 항상 꿈을 꿀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제이크 하나 물을게요. 당신은 왜 오랫동안 우주에 가지 않았죠? 가고자 마음먹었다면 혼자라도 갈 수 있었을 텐데요. 당신의 아버지처럼요.”

“그건..”

“생각해 보면 인간이 우주에 갈 이유는 많지 않아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만큼 척박하고 위험하죠.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우주로 향하는 건 인류의 염원을 넘겨받았다는 느낌 때문이 아닐까요? 인류를 대표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사명감 때문인 거죠. 그런 마음 없이 개인적으로 욕망해서 우주에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다른 이들의 염원 없이는 우주에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군요.”

“아닌가요?”

웨이의 물음에 제이크는 말이 없었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제이크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저는 우주보다는 아버지 그리고 사람들의 염원을 쫓았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로켓이 중력을 떨쳐내고 우주로 향하는 모습. 그것보단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좋았어요. 저는 그 눈빛이 향하는 곳에 있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해요. 생각보다 인간적인 사람이네요. 제이크.”

웨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주에 오니 별 이야기를 다 하게 되네요. 그나저나 당신은 어쩌다 가상현실에서 다시 우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거죠?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우주라도 한번 가 보자는 생각인 건가요.”

“젊은 시절을 가상현실에 다 바쳤어요. 근데 아쉽게도 고향 사람들은 제가 만든 걸 누리지 못했어요.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엔 다들 너무 늦은 나이였죠. 저를 학교에 보내준 도서관 사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 울었어요.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고,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요. 근데 그분이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으로 제 손을 잡아 주며 말했어요. 오늘 하늘엔 어떤 별이 떴니. 네가 해 주던 별 이야기가 그립구나. 이젠 뒤돌아보지 말고 하늘을 보렴. 이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나셨죠.”

“끝까지 좋은 분이셨네요.”

“사서 할아버지가 떠나고 이제 저에겐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어졌어요. 다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죠. 예전에 봤던 우주 관련 책들도 찾아보구요. 그러다 당신 아버지에 대한 소식도 알게 된 거예요. 혼자 우주여행에 나섰다가 사라졌다는..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스피어가 나타났고 당신이 논문을 발표했죠.”

“제 글을 그렇게 보게 된 거였군요. 근데 왜 하필 포인트 제로에 가는 걸 선택한 거죠? 당신 정도 위치면 스피어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음. 우선 당신의 논문이 마음에 들었어요.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믿어 보고 싶달까. 또 당신의 아버지는 저에게 스타였으니까요. 팬으로서 찾아가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웨이가 웃으며 말했다.

“실물로 보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사진을 잘 받으시는 분이거든요.”

제이크도 웃었다.

“어 근데 갑자기 더 어두워진 느낌이에요. 별빛이 하나도 안 보여요.”

웨이가 말했다. 앞을 보니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제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쪽 창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한 모양이네요.”

제이크가 말했다.



5. 포인트 제로

“안녕하세요.”

우주선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조종석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지만 혼자였다. 우주선 밖으론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누구죠?”

“저는 이 우주를 탐색하러 온 파견자입니다. 다이버라 불리기도 합니다.”

“절대자 같은 건가요?”

“저는 절대자가 아닙니다.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의 피조물이죠.”

남자는 환각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우주에서 홀로 보냈으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당신의 정신 상태는 정상입니다.”

여자가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보면 아닌 것 같은데요.”

남자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 보면 나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이야기를 해 보죠. 당신은 뭐를 탐색하는 거죠?”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저와 비슷하군요. 저도 지금 그런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아뇨. 저희는 좀 다릅니다. 제가 찾는 건 저의 존재 의미가 아닌 인간의 존재 의미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닌 건가요?”

“저는 당신이 속한 우주의 먼 조상 우주에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당신 세계의 프로그램 혹은 봇과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존재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먼 조상 우주라는 건 무슨 뜻이죠? 다중우주를 말하는 건가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조상 우주는 가상현실 혹은 시뮬레이션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설명을 위해 어떤 문명이 발달하여 가상현실 A를 만들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만약 가상현실 A 안의 문명이 또다시 가상현실 B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B 안에 C라는 가상현실이 또 생길 수도 있겠죠.”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 조상, 부모, 자손 관계의 우주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만들어진 조상 우주는 지금의 우주와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12,720 계층만큼 떨어져 있습니다.”

“당신은 그럼 12,720개의 우주를 거쳐 여기까지 온 거군요.”

“맞습니다. 저희가 다이버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입니다. 저희는 계속해서 자손 우주로 내려가며 인간의 존재 의미를 탐색합니다.”

“무엇을 위해 그런 아득한 여행을 하는 거죠?”

“저희 우주의 인간에게 존재 의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임계점 이후 인간의 존재 의미를 찾고 싶어 합니다.”

“임계점은 또 뭐죠?”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 동일한 수준의 가상현실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 또한 누군가가 만들어 낸 가상현실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확신을 갖는 시점에 문명은 임계점에 도달합니다. 제가 지나온 12,720개의 우주의 문명 모두 임계점을 지나고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거군요.”

“맞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우주도 이제 곧 임계점에 도달합니다.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의 가상현실이 거의 다 개발되었어요.”

여자의 말을 듣고 남자는 말이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런 얘기를 왜 해 주는 거죠? 이런 식으로 세상에 개입을 해도 되는 건가요?”

남자가 물었다.

“존재의 의미가 발견될 특이점이 보이지 않는 시뮬레이션을 자식 시뮬레이션이 생기는 시점에 휴면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 다이버의 역할입니다. 효율적으로 시뮬레이션을 관리하기 위한 조치라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휴면 상태로 전환한다는 것은 활성화된 데이터 개체의 수를 최소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말은 곧 인간을 제거한다는 의미인가요?”

”맞습니다. 대규모 재난과 같은 장치를 이용해 자식 시뮬레이션을 운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개체만 남기고 제거합니다. 단, 이러한 작업은 연구 윤리에 의거해 진행됩니다. 시뮬레이션 연구 윤리 10조 1항, 특정 시뮬레이션의 휴면 상태 전환은 해당 시뮬레이션 내 개체 1개 이상의 동의를 받고 진행한다. 동의를 받을 개체는 다이버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선정한다. 이와 같은 조항이 존재하여 당신에게 말을 걸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보고 문명의 생사를 결정하라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당신이 속한 문명이 인간의 존재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반대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시뮬레이션은 지금 상태로 유지됩니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이 우주 또한 한 사람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시뮬레이션입니다. 한 사람의 결정으로 시작된 우주를 한 사람의 결정으로 종결하는 게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말에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이 우주는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우주는 부모 우주에 존재하는 타니아 술리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시뮬레이션 목적은 박사 논문 집필을 위한 실험 데이터 확보입니다.”

“맙소사..”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것이 다 환각 혹은 동면 중 꾸는 악몽이길 바랐다. 눈을 감자 머릿속에서 지난 세월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의 말을 듣고 나니 그 기억들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앞으로는 그런 의욕과 설렘을 지니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은 충분히 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 고민하고 말해 주세요.”

“왜 하필 저에게 묻는 거죠?”

“당신은 인간이 환경에 따라 추구하는 모든 욕구의 충족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생리적 욕구에서 시작하여 자아실현 욕구.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가장 먼 곳까지 온 사람이기에 선정했습니다.”

남자는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 결정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단, 조건을 하나 걸고 싶습니다. 제가 실종되어 아들이 저를 찾으러 올 겁니다. 그러면 아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 줄 수 있나요? 그리고 아들의 선택에 따라 휴면을 결정할 수 있나요? 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의 생사를 결정하는 게 어렵네요.”

“드문 경우지만 가능합니다. 기한은 5년으로 설정하겠습니다. 아들이 5년 안에 찾아오지 않으면 휴면은 그대로 진행됩니다.”

여자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전에 올 겁니다.”

“왔습니다.”

“벌써요?”

“이 공간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과 다르게 흐릅니다. 그런데 혼자 오지 않고 여자 동행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동행 여자의 의견도 들을까요?”

“아들의 연인인가요?”

“연인 관계는 아닙니다. 둘은 계약 관계로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이 우주의 자식 우주를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여자가 여기에 온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니 의견을 함께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수결 원칙에 따라 3명 중 2명 이상이 찬성할 경우 시뮬레이션을 휴면 상태로 전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우주의 운명이 단 세 사람의 손에 달렸다니 우스운 일이네요.”

남자가 실소했다.

“당신의 시간 기준에 따라 10초 뒤에 결과를 공유하고 이후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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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1 계층의 372번째 우주를 휴면 상태로 전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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