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린 사람들의 소확행(飞行)
여태까지 내가 브런치에 쓴 글 중에 제일 잘 팔리는 글은 뭘까? 틈틈이 통계를 살펴본 결과 제일 효자글은 아래의 글이었다.
물론 이것보다 조회 수가 높은 글도 있다. 그럼에도 위의 글이 가장 잘 팔린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독자의 유입 경로 때문이다.
'더 쉽게 소설 쓰기에 입문해보자'라는 글은 그 어떤 채널에도 노출되지 않고 오직 검색에만 의존해 꾸준히 조회 수를 늘려왔다.
유입 경로가 검색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독자가 분명한 의지를 갖고 들어왔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헤매다 내 글을 발견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일단 내 주변만 해도 글 쓰는 사람은 드문드문 보일지언정 '소설'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어쩌다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각자만의 이유를 갖고 있을 테지만 그냥 멋대로 추측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최근에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 뮤직 비디오를 보다 마음이 동하는 부분이 있었다. 영상의 첫 부분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은행 잔고.
그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자우림 - 스물다섯, 스물하나
시시한 삶이 사람들을 소설 쓰기로 이끌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해도 그러니 말이다. 난 스스로가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면 소설이 쓰고 싶어진다.
그런데 우린 언제 스스로가 시시하다 생각할까?
개인적인 생각으론 삶의 선택지가 적어졌을 때가 아닐까 싶다.
살다보면 점차 삶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어렸을 적엔 뭐든 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갈수록 꿈이 적어진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 어딘가로 홀연히 떠나는 것이 전보다는 좀 어려워졌다.
마음가짐의 문제라 할 수도 있겠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당장 이번 달 월세와 월급을 떠올리면 다른 선택지가 자연스레 멀어진다.
그리고 여러 선택지들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보며 조바심을 느낀다.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언젠가 영영 놓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미래엔 지금보다 더 선택지가 적어져서 뻔한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내가 직접 선택하는 게 아닌 주어진 선택지에 따라 살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삶이 시시해진다. 이미 과정과 결말을 다 알고 있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후회가 돼서 울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시한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미래의 후회보단 당장 내일 먹고사는 게 급선무라 변함없이 출근하고 주변 사람들과 먹고사는 문제를 논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 시시한 삶에 빠지면 왜 소설 쓰기를 찾게 되는 걸까?
답은 단순하다. 소설을 쓰면 삶의 선택지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나의 분신을 만들어 내가 가지 못했던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다. 삶의 방향뿐이랴 이름은 물론 성별도 바꿀 수 있다. 심지어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영화나 게임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도 더 자유롭다. 왜냐면 내가 0부터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질서를 세우고 그 안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실 속 제약 조건들은 잊혀진다. 돈 문제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이런 것들을 신경 쓸 필요 없이 내 입맛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면 된다.
그런데 왜 하필 소설 쓰기일까? 위에서 언급된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도 할 수 있지 않나? 그림 그리기, 코딩 등 할 수 있는 방도는 다양하다.
아무래도 접근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먹고사는 문제에 억눌린 우리에겐 새로운 표현 수단을 익힐 여유가 없다. 그림 그리기, 작곡하기, 코딩 등 배워두면 좋지만 그럴 시간과 돈이 없다.
반면에 소설 쓰기는 다르다. 평생을 써온 만큼 언어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표현 수단이다. 또 우리는 제법 많은 이야기들을 읽어왔기에 작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흉내는 낼 수 있다.
결국 소설 쓰기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최적화된 자아 표출 방식인 셈이다. 시시한 일상에 시달리는 사람 누구든 소설 쓰기를 통해 영혼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소설 쓰기를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싶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날갯짓(飞行)
누군가는 푸드덕대봐야 무엇이 달라지냐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날개를 조금도 쓰지 않고 가만히 두면 언젠가 퇴화되지 않을까? 그러면 날아갈 수 있을 기회가 왔을 때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을지도 모른다.
잠깐의 비행(飞行)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잊지 않게 해준다.
그러니 나와 같이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꾸준히 소확행을 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