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언

초신성 1편

by JunWoo Lee

혁명은 도태시키는 게 아니라 끌어안는 거야.


“제 어머니의 유언이에요.”

은빛 눈망울을 가진 여자가 말했다.

“어머니라는 말은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둘은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심문관님도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까마득한가 보군요.”

여자가 말했다.

“심문관이라니 영 어색해. 그냥 브리라고 불러. 참나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브리가 심문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밖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뚫어 놓은 유리창. 게임에서 본 전형적인 심문실의 모습이었다.

“화가 나시나 봐요.”

“당연하지. 아직도 이 몸이 낯설어.”

브리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몸이었다.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아 맞다. 제 이름은 노바예요.”

“알고 있어.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모두가 알고 있는 이름이지. 노바.”

“사람들이 절 두려워하더라고요.”

노바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넌 바이러스나 다름없으니까. 그것도 아주 지독한 바이러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허 참.. 당당하기도 하네. 뭐 그러니까 이렇게 직접 자수하러 온 거겠지.”

“전 제 얘기를 하고 싶어요.”

“자기 이야기 하나 하겠다고 온 세상을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건가?”

“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중요한 얘기니까요.”

노바가 브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브리는 그의 오묘한 눈빛을 단 1초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벽면의 유리창 쪽으로 돌렸다.

“진짜 그래야 할 거야. 다들 너랑 말장난할 기분은 아닐 테니까. 다들 저 바깥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어.”

브리의 말에 노바도 유리창을 쳐다봤다.

“물론이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노바의 목소리에선 확신이 느껴졌다. 모든 게 불명확한 상황에서 자신감에 찬 그의 말은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음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브리는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살폈다. 서류는 브리가 심문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곳에 놓여 있었다. 목차를 살펴보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빽빽하게 들어선 글자들이 브리의 눈에 들어왔다. 브리는 조금 읽어 보다 금세 흥미를 잃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 삐 >

“깜짝이야.”

브리가 놀라며 책상 위의 전화기를 쳐다봤다.

< 삐 >

“전화가 왔네요.”

노바가 말했다. 브리는 노바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네. 데-브리입니다. 무슨 일이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러다 이내 잠잠해지고 한 남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브리는 남자의 말을 듣고 책상 위에 박힌 모니터에 이것저것 서툴게 입력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것들 먼저 알아볼게요.”

브리는 전화를 끊고 자신이 메모한 것들을 확인했다.

“너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답해야 할 질문들이 있어.”

“어떤 질문이든 결국엔 제가 하고 싶은 얘기와 연결될 거예요.”

노바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미소를 본 브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다니 사이코가 따로 없군. 질문 리스트나 확인해.”

브리는 전달 받은 질문을 노바에게 보여 줬다.

“이게 너에게 할 질문들이야.”

노바는 질문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우선순위가 엉망이네요. 순서를 바꿔서 답해도 될까요?”

“제멋대로군. 그래. 뭐든 상관없어. 다 급한 질문들이니까.”

“고마워요. 그러면 ‘가상현실이 정지해 버린 이유’ 이거에 대해 먼저 답을 할게요.”

브리는 팔짱을 끼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질문을 정정하자면 가상현실은 정지한 게 아니에요. 삭제된 거죠.”

“뭐? 삭제된 거라고?”

“네. 제가 가상현실을 가동하는 엔진을 삭제해 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못 돌아가는 거야?”

“예전이 가상현실에 있을 때를 말하는 거라면 맞아요. 못 돌아가요.”

“그럼 우리가 이 현실 속에 갇혀 버렸다고?”

“네.”

노바는 담담했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군. 그럼 이 짓거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어차피 예전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데..”

브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바는 허공을 쳐다보는 브리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아요. 전 그저 엔진을 삭제했을 뿐이니까요.”

“그건 우리한테 전부였는데 나쁘지 않다고? 넌 학살자야. 모르겠어?”

“학살자라뇨. 제 앞에 브리씨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요? 현실 세계 속의 브리씨는 여전히 생생히 존재해요.”

“이건 진짜 삶이 아니라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몸에 들어와서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데. 애초에 내 몸뚱이로 있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야? 젠장! 정말 하나하나 답답해 죽겠군.”

“진실이 뭔지 다 말해 줄게요. 그러니까 그렇게 급하게 굴지 않아도 돼요.”

브리는 대답 없이 심문실 벽면의 유리창을 쳐다봤다. 유리창에 낯선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짧은 다리와 불룩 튀어나온 배, 깊게 파인 이마 주름과 지저분한 턱수염이 보였다. 저게 나라니. 브리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전 엔진을 삭제하기 전에 시스템 내부의 파일들을 백업했어요.”

노바의 말에 브리는 순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백업했다고? 무슨 파일들을 백업했지?”

브리는 책상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지금 바로 제 앞에 있는 브리씨의 삶이 제가 백업해 놓은 파일 중 하나죠.”

“아 그러니까 네가 날 이 이상한 몸뚱이에 옮겨 놨다는 거야?”

“맞아요. 시스템을 삭제하기 전에 가상현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모두 백업했어요. 브리씨처럼 모두 현실 속의 인조 신체에 옮겨 놓았죠.”

“그럼 왜 하필 이런 몸뚱이에 옮겨 놓은 거지? 난 가상현실에선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지금은 볼품없는 아저씨가 되어 버렸어.”

“제 눈에는 멋진 걸요. 삶의 때가 묻어 있어요. 공 들여 준비한 거예요.”

“공 들인 결과가 겨우 이거야? 그리고 말 돌리지 마. 애초에 왜 원래 몸이 아닌 이 못난 몸뚱이에 나를 넣어 놓았냐고.”

“그 얘기는 아직 일러요. 천천히 천천히. 지금 당장 그거 모른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니까요.”

“하.. 그럼 내가 여기 앉아 있는 이유나 들어 보자. 왜 내가 여기 앉아서 심문관을 하고 있는 거지?”

“그나마 이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날 여기 불러낸 것도 너였군.”

“가상현실에서 경찰 게임을 많이 해 보셨더라고요. 그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사람보단 낫겠죠.”

노바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이가 없군.”

브리는 자빠지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그는 축 처진 상태로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도 될까요? 제가 가상현실을 삭제한 이유를 말해 줄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노바가 브리를 바라보며 달래듯 말했다. 무슨 마력인지 노바의 눈빛과 말은 브리를 다시 일으켜 제대로 앉게끔 했다.

“미친 사람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 신세도 참 딱하군. 그래. 한번 말해봐. 다 끝난 마당에 이유나 들어 보자.”

노바는 틱틱대는 브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 이유를 말하면 모든 질문이 해결될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그러려면 제 어머니 얘기를 먼저 해야 돼요.”

“네 어머니 얘기나 듣자고 여기 앉아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얘기를 시작할 수 없어요. 제 어머니가 모든 일의 시작이니까요. 걱정 마요. 이야기가 아주 조금 돌아갈 뿐 금방 끝날 거예요.”

노바가 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브리는 분명 노바의 시선을 느꼈지만 눈을 지끈 감으며 애써 외면했다. 노바와 눈을 마주하는 건 그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그건 마치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대로 해. 이젠 맞장구쳐 줄 의욕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