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성 4편
001.
난 역시 여기야. 모니터 안이 얼마나 아늑한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에 비하면 이 세계는 정말 정직해. 여기서 난 끝까지 파고들 수 있어.
002.
답답한 하루였어. 오늘 인공지능 콘퍼런스가 있었는데 다들 인공지능의 위험성에 대해서만 얘기하더라. 인공지능이 우리의 일자리를 뺏어갈 거야. 아니면 정말 유치하게는 우리를 지배할 거야. 이런 단편적인 생각들만 늘어놓고 있어. 한심하지.
003.
다시 말하지만 혁신은 인간이 본래 갖고 있던 정의의 일부를 소거하기 마련이야. 오래전 산업 혁명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지. 산업 혁명 이후 육체노동 대부분을 기계가 대신했고 이에 따라 인간의 정의에서 육체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었어.
이렇게 인간의 정의가 비좁아지는 게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소거를 거쳐 예리해진 인간의 정의는 더욱더 날카롭게 빛나. 소거를 거칠수록 인간의 정의에는 정말 인간적인 것만 남게 되는 거야.
인공지능이 마치 인간의 모든 걸 대체할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오히려 인공지능은 이전의 그 어떤 것보다도 인간 본연의 가치를 강렬하게 드러내 주는 도구가 될 테니까. 난 확신해. 여태까지 우리가 만들어 온 것들은 항상 그랬어.
004.
문제가 되는 건 어정쩡한 기술이야. 어정쩡한 기술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법이지. 그것들은 사람들의 애만 태우다가 결국엔 실패하고 말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기술 혁명 때문에 사람들한텐 의심병이 도졌어. 그들은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꾸러미보단 꾸러미를 끌고 오느라 길바닥에 남을 자국에 더 신경을 쓰지.
그래서 며칠 뒤에 정식으로 공개할 내 논문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 돼. 그건 어정쩡하지 않은 기술인데.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기술이야.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해 줄 수 있을까.
006.
진짜 최고야. 이 세상은 내 생각보다 더 열려 있었던 건가. 오늘 논문 발표를 했을 때 예상보다 반응이 훨씬 더 좋았어. 아마 그날 발표한 사람들 중에 내가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을 거야. 게다가 그 자리에서 투자사들한테 열렬한 호응도 받았지. 봐. 내가 받아온 명함이 이렇게나 많아. 다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투자사들이야. 며칠 동안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겠어.
아마 인공의식이라는 키워드에 사람들이 꽂힌 것 같아. 가끔 사람들은 복잡한 기술보단 새로운 이름에 끌리기 마련이니까. 투자와 지원만 들어오면 내가 계속 바라 왔던 연구 환경을 가질 수 있을 거야.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목표가 이제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어.
008.
오늘은 정말 힘들었어. 당분간은 계속 이러겠지. 투자사며 연구 관련 단체든 사람과 부대낄 일이 너무 많아. 난 엔지니어지 사교꾼이 아닌데.. 왜 이렇게 세상은 허례허식이 많은 걸까. 빨리 다 마무리하고 연구에만 집중하고 싶어.
009.
한번 생각을 정리하고 가야겠어.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기술에 대해 묻는데 매번 설명해 주기가 귀찮아. 또 그들이 좀 멍청해야지. 전문 용어가 나오기 시작하면 금방 멍을 때리니까. 그래도 어째. 결국 돈은 그 사람들 주머니에서 나오니 맞춰 줄 수밖에. 그들한테 인공의식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생각을 정리해 보자.
010.
미뤄 왔던 생각 정리를 오늘에서야 할 생각이야. 인공의식이란 건 뭘까?
“인공의식은 인공지능보다 진보한 기술입니다. 인공지능은 이름에서부터 한계가 드러나죠. 지능. 지능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만을 부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이 쌓아올린 업적을 볼까요? 과연 그것들 중에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만 기대서 이뤄진 게 얼마나 될까요?”
이렇게 말하면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더라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겠지. 그러면 그다음은.
“그러니까 인공지능은 반쪽짜리라는 것입니다. 어정쩡한 기술이죠. 좋게 말하면 과도기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왜 그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까요? 그건 바로 인공지능이 무의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무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건 누구나 대충은 알고 있겠지.
“인공지능은 무의식이 없는 반쪽짜리, 아니 사실은 반쪽짜리도 아닙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을 알고 계시죠? 그러니까 지금의 인공지능은 반푼어치도 안 되는 기술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좀 심할 수도 있겠군.
“그러니까 지금의 인공지능 기술은 한계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의식 없이 무의식을 가진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물론 없지.
“그렇게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은 결국 사람들이 걱정하는 여러 문제를 야기하기 마련이죠. 마치 엄청난 힘을 가진 아이처럼 사회를 이리저리 휘두를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잠깐 텀을 두고 사람들이 그 공포스러운 순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 그다음은.
“인공의식은 그런 어정쩡한 시기를 뛰어넘은 온전한 기술입니다. 무의식을 탑재했기 때문이죠. 인공지능의 천재적인 지능과 인간의 근원적 무의식을 연결하면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도구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012.
젠장. 결국 언론 놈들이 냄새를 맡았어. 인공의식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가 쏟아지는 건 물론이고 방송에선 사이비 전문가들을 초대해서 내 연구를 분석하고 있더군.
인공의식은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건가. 또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던데 참 웃기는 일이야. 실체도 없는 신은 그렇게 잘도 믿고 의지하면서 왜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기술엔 의지하지 못하는 거지?
적어도 내 투자자들은 이런 걱정에 휘말리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들이 믿는 게 돈이라 그런가. 그들은 이런저런 우려에도 인공의식이 결국엔 돈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어. 계속 그랬으면 좋겠군.
그다음은 나도 인정할 만한 문제야. 어떻게 인공의식에 무의식을 탑재할 것인가? 이건 예전 기술 발표회 때도 많은 논란을 낳았어. 인공의식 기술은 인간을 제물로 하는 기술이니까. 인간 말고 인간의 무의식을 얻을 곳이 어디에 있겠어.
인공의식을 만들기 위해선 인간의 뇌를 인공지능에 연결해야 해. 인공지능이 인간의 대뇌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말이야. 쉽게 말해 인간의 무의식을 인공지능에 내주는 거지.
이를 위해선 뇌 제공자를 수면 상태로 유지해야 해. 인간의 무의식은 수면 상태에서 확장되니까. 그런데 항상 수면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인간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게 문제야. 누가 실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어.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갔는데 한 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크게 났지. 방 밖으로 다 들릴 정도로. 호기심에 근처에 가서 슬쩍 사정을 들어 봤는데 거기서 이거다! 싶은 생각이 떠오른 거야. 식물인간의 무의식을 빌리면 어떨까?
살인적인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식물인간의 보호자가 많아. 언젠가 깨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지만 그건 절망과도 같을 거야. 그거 하나 부여잡고 온 가족이 힘들게 살아야 하니까. 내가 병원에서 본 사람들도 그 문제 때문에 서로 싸우는 거였어.
만약 그들이 돈 걱정없이 소중한 사람이 깨어나길 기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과 얘기해 볼 만한 지점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어.
왜냐면 식물인간의 무의식을 빌리는 게 그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니까. 또 언젠가 깨어날 징후가 보이면 책임지고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거고 이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비용은 우리가 부담해. 이건 식물인간의 보호자 입장에서 꽤 괜찮은 조건일 거야.
우리 입장에서도 안정적으로 실험을 할 수 있고 윤리적인 문제를 피해 갈 수 있기도 해. 물론 이런 방식조차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험을 아예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진 않을 거야. 어쨌든 환자의 보호자가 지원하는 방식일 테니까.
다음번에 인터뷰할 때는 이것도 같이 얘기하는 게 좋겠어. 지원자 모집 홍보도 될 테니까. 마침 내일 또 인터뷰가 있으니 거기서 잘 말해 봐야겠다.
014.
생각보다 내 제안에 관심을 갖는 보호자들이 많아. 어떤 사람은 직접 나한테 메일을 보내기도 했어. 다들 아픈 사정을 갖고 있더군. 내 예상대로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보호자가 꽤 많은 것 같아.
반대하는 인권 단체도 있지만 투자자들이 잘 막아 줘서인지 그들의 얘기는 신문에 제대로 실리지 않는 모양이야. 매일 같이 꿈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잠들기 전엔 아침에 일어나는 게 기대되고 일어나서도 정신이 아주 말끔해.
조건들이 잘 갖춰지고 있으니까 말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016.
오늘 이상한 메일을 하나 받았어. 다른 나라에서 온 건데 날 데려오고 싶다는 얘기였지. 연구에 필요한 모든 걸 다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데 사실 그다지 끌리지는 않아. 왜냐면 그걸 제안한 곳은 아주 유명한 독재 국가거든.
물론 그들 스스로는 독재 국가가 아니라 말하지만 누구나 그곳이 독재 국가라는 걸 알고 있지. 그들이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는 걸 역사가 증명하고 있어. 그런 환경에서 연구하고 싶지는 않아 단칼에 거절했지.
017.
이제 슬슬 바빠지기 시작했어. 사실 원래도 바빴지만 더 바빠졌지. 이제 실험에 필요한 것들이 거의 다 갖춰졌어. 실험실은 물론이고 필요한 인력도, 무의식을 대여해 줄 사람도 찾았지. 이젠 실험 자체에 더 집중하면 좋겠어.
020.
드디어 내일부터 실험 시작이야. 앞으론 정말 정신없이 바빠지겠어. 일기를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
034.
하. 아주 오랜만이야. 오늘은 아주 잠깐 여유가 생겨서 기록을 남기기로 했어.
요즘 실험이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 인공의식에 무의식을 탑재하는 게 잘 마무리 됐으니까.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지. 곧 있으면 우리 인공의식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인간의 원초적 감정과 무질서함 그리고 우연성을 이해하게 될 거야.
이 인공의식을 우린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실 그냥 초인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 봐도 될 거야. 그러니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이름을 지어 줘야겠어.
철인(哲人)의 탄생이 멀지 않았어.
043.
인공의식은 생각보다 더 위대한 기술이 될 거야. 실험 결과가 정말 엄청나. 측정치가 내가 가늠했던 모든 수치를 뛰어넘고 있어. 어쩌면 나 스스로도 무의식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인공의식은 더 이상 논리에만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아. 논리적인 사고 엔진과 함께 무질서하면서도 창의적인 무의식 엔진을 함께 돌리지. 더 중요한 건 인공의식이 자발적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단순히 입력된 정보만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철학을 하기 시작했다고!
048.
젠장. 뭔가 너무 잘 진행된다 했어. 마냥 무의식만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인공의식이 무의식 제공자의 사고 회로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고 있어. 무의식을 구성하는 사고 회로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인데 그 영향을 과소평가한 거 같아.
인공의식에 예술가의 무의식을 연결했을 때하고 공사장 인부의 무의식을 연결했을 때하고 나오는 값이 너무나도 달라. 이런 편향된 값을 원한 게 아닌데.. 이건 더 영리한 고집불통을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아. 내가 원한 건 철인이지 독재자가 아니라고.
이렇게 되면 케이스를 늘리는 수밖에 없어. 최대한 많은 사람의 무의식을 인공의식에 연결해서 편향되지 않은 무의식 엔진을 갖도록 해야 해. 근데 지금 있는 피실험자 수로는 너무 부족한데.. 피실험자를 더 모집할 수밖에 없겠어.
인공의식에 이름을 붙여 주는 건 조금 뒤로 미뤄야겠네. 아직 얘는 온전치 못해.
050.
인공의식이 편향되지 않은 무의식 엔진을 가지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무의식이 필요할까. 아마 이건 표본의 추출에 따라 달라질 거야. 표본만 제대로 추출한다면 적은 수로도 모집단, 그러니까 인간의 성질을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겹치지 않는 인간형으로 피실험자를 모집하는 거야. 그러면 인공의식은 다양한 종류의 사고 회로를 검토할 수 있겠지. 예술가, 엔지니어, 사업가, 수학자.. 다양한 인간형의 사고 회로를 골고루 받아들이면 무의식 엔진의 편향성은 사라질 거야.
인간형의 정의를 위해 또 뇌즙이 짜여 나올 정도로 고민해 봐야겠어.
057.
인간형을 새로 정의하느라 요새 잠을 거의 못 잤어. 연구 논문은 물론이고 각종 문학 작품도 샅샅이 뒤졌지. 그래도 결국 인간형을 42가지로 나누는 것에 성공했으니 정말 다행이야. 이 42가지 인간형은 최대한 서로 중복되지 않게, 상호 베타성을 띄도록 만들었어.
세상 누구든지 이 42가지 항목 중 하나에 들어가. 그것도 상당히 높은 일치율을 보이면서. 이미 알고리즘을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분석했고 결과도 만족스러워. 아마 지금까지 나온 인간형 분류 중에 가장 정확할 거야.
이제 이걸 바탕으로 새로운 피실험자만 모집하면 될 텐데 잘 풀렸으면 좋겠다.
060.
요즘엔 메일함을 엄청 자주 확인한단 말야. 기준에 맞는 피실험자한테 메일이 왔는지 확인해야 되니까. 대부분의 인간형이 채워졌지만 아직 구하지 못한 인간형도 있거든.
그나저나 그 독재 국가에선 여전히 메일을 보내고 있어. 질리지도 않나 봐. 답장도 하지 않는데 참 꾸준해.
063.
드디어 모든 퍼즐이 맞춰졌어. 42개의 인간형에 해당하는 42명의 피실험자를 모두 찾아내다니 정말 대단해. 인공의식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니까 피실험자 구하기도 쉬워진 건가. 생각보다 더 빨리 구한 것 같아. 이제 다시 제대로 된 실험을 할 수 있겠지. 진짜 기대돼.
068.
인간형 분석이 제대로 이뤄진 모양이야. 인공의식이 더 이상 편향된 결괏값을 내놓지 않아.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의 무의식을 연결하니까 사고 능력이 말도 안 되게 향상됐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거야. 엔진 크기를 전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 준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런데 몇 가지 문제도 있어. 인공의식에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이 연결되니까 가끔 연산이 튀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은 동기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 모든 무의식이 인공의식 안에서 매끄럽게 작용하는 단계까지 가는 게 목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