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성 11편
애초에 현실로 쫓겨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하루 만에 모든 게 바뀌었다. 오늘 아침에 나를 부여잡은 옆집 여자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다. 여태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여자. 그는 아파트 복도에서 낯설지 않은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찬드라!”
찬드라. 내 가상현실 아이디 맨 앞에 붙어 있던 말이다. 들리는 바론 그게 현실 세계에 있을 때의 내 이름이란다. 지금까지 그 이름은 나에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저 거울 앞에 서서 못난 내 모습을 쳐다볼 때 가끔씩 떠오를 뿐.
오늘 아침 복도에 나와 난간 밖으로 떨어져 죽어 버릴까 생각하던 중 사건이 일어났다. 옆집 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문제의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얼마 안 가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쳤고 곧바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여자는 찬드라라는 이름을 부르며 나를 안으려 했다. 내가 도망치려 하자 내 옷을 부여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는 내 눈을 치열하게 마주보려 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왜 눈을 피하는 거냐 물으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당신 같은 사람 모른다고 거듭 외쳤지만 그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소란이 일자 다른 집 사람들도 하나씩 나와 구경했다. 다행히도 얼마 안 가 드론이 날아와 날 잡고 늘어진 여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여자는 설명을 듣곤 날 부여잡은 손을 맥없이 풀었다. 얼핏 보니 그의 눈꺼풀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난리를 치는 통에 못 봤는데 눈물을 흘린 모양이다.
난 파랗게 질린 채 복도 난간에 기대어 힐끔힐끔 여자를 쳐다봤다. 그는 드론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이었다니. 결국 나는 이리저리 눈을 피하다 애꿎은 드론에 눈을 두게 되었다. 그땐 마음이 급해 드론이 그를 어떻게든 처리해 주길 바랐다.
드론은 여자가 검정 막대를 써서 기억이 돌아왔다고 얘기해 줬다. 그러니까 어제 옆집에 살던 여자와 오늘 나에게 달려든 여자는 사실상 다른 사람이었다. 기억이 돌아온 여자는 찬드라라는 내 예전 자아와 뭔가 관련이 있어 보였다.
당시엔 정신이 없어서 그에 대해 더 자세히 고민해 보지 못했다. 그저 여자가 눈앞에서 얼른 사라지길 바랐다. 내 마음이 눈빛으로 전해졌는지 여자는 이내 나에게서 눈을 거뒀다. 드론은 그에게 정류장으로 가는 법을 안내했다. 그는 드론을 따라 나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그가 복도에서 안 보이게 되어서야 난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복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한 차례 기웃거리더니 이내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큰 숨을 여러 번 삼키고 내뱉는 걸 반복해서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난간 밖을 보니 여자는 드론을 따라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행여나 여자가 돌아볼까 나는 서둘러 집에 들어갔다. 시끄러운 소란을 거치고 나서인지 집은 더더욱 고요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고요는 고독으로 바뀌었다.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우니 여자가 계속해서 생각났다. 그는 왜 날 보고 눈물을 흘렸을까. 자꾸 그의 글썽거리는 눈망울이 생각났다. 그렇게 울 정도면 여자와 찬드라란 사람은 분명 특별한 관계였을 것이다. 아마 서로 애인이 아니었을까?
이 생각에 난 거실에 있는 거울 앞으로 가서 내 모습을 살펴봤다. 부쩍 마른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슴도 볼품없었고 엉덩이와 허벅지엔 탄력이 없었다. 얼굴엔 주근깨가 만연했다. 또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게 내 모습이라니. 가상현실에서 쫓겨난 첫날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선 느낌이 사뭇 달랐다. 외적인 모습을 떠나 거울 속의 찬드라라는 여자는 사랑을 받았다. 그건 내가 가상현실에서 경험한 공허한 사랑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어떤 NPC도 그런 뜨거운 눈망울로 날 갈구하지 않았다. 여자는 무엇 때문에 찬드라를 그렇게나 원했을까.
나는 거울 앞에서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훑고 만져 보았다. 아마 나에게 달려든 여자는 이 몸에 익숙할 것이었다. 나는 거울 속의 찬드라라는 여자와 오늘 아침의 그 여자가 침대에 함께 어우러진 모습을 상상했다. 둘이 옷을 벗어 던지자 나 또한 옷을 벗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난 스스로를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손이 살결을 스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찬드라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럴수록 내 손끝은 살결과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나도 모르게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고 상상은 더 짙어졌다. 찬드라와 아침의 그 여자는 거칠게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뭘까. 찬드라를 사랑했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난 알 수 없었다. 이 생각에 서서히 손이 멈추더니 갑자기 거울 속에 비친 스스로가 허망해졌다. 오늘 아침으로 돌아가 감정의 범람을 다시 느껴 보고 싶었다. 그의 이름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더 선명하게 그와 찬드라의 관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그게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결국 그 상상도 지금처럼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릴 게 분명했다. 어쨌든 난 찬드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거울 속에 비친 존재는 나도 찬드라도 아니었다. 이렇게 둘로 나뉘어선 아무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난간에 기대어 무기력하게 드론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걸 거다.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현실 세계로 쫓겨난 게 원망스러웠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금세 차갑게 식었다. 고독이 점차 더 강렬하게 날 옭아매기 시작했다. 현실로 쫓겨난 첫날보다 더 공허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찾아 떠나야 할까? 아니. 그게 의미가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난 침대로 달려갔다. 침대에 올려져 있던 검정 막대를 들어 유심히 쳐다봤다. 오늘따라 금색 단자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이걸 쓰면 난 아마 온전한 찬드라가 되겠지. 떨리는 마음으로 검정 막대를 들고 거울 앞으로 갔다. 난 거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