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초신성 15편

by JunWoo Lee

“로젠 박사. 완전 이주자들의 조기 리셋률이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이치가 로젠에게 보고서를 건네며 말했다. 로젠은 힘없이 서류를 받고는 이리저리 넘겨 보았다.

“사람들이 너무 빠르게 자살하고 있네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죠?”

“그게 뭐가 중요하죠? 제 얘기는 듣지도 않다가 문제가 생기니 제 방에 찾아오는 건가요?”

로젠이 따졌다. 더 이상 로젠은 하이치와 그의 뒤편에 있는 보좌관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어 겸사겸사 찾아온 것이니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로젠은 하이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보고서만 계속해서 훑어보았다. 엉망이었다. 로젠은 완전 이주자들이 정말 원해서 이주를 한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외부자의 의견이 필요해서 한번 물어보러 온 겁니다.”

하이치가 말했다.

“외부자요? 전 이제 연구에서 아예 외부자가 되었군요.”

“제가 말한 외부자라는 건 내국인이 아니라는 의미였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연구에 협조하지 않은 건 로젠 박사 당신이지 않습니까?”

“왜냐면 연구에 협조한다는 건 결국 스스로를 버리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이치 당신은 날 도구로만 생각했죠. 당신의 공산주의를 이룬다는 어쭙잖은 계획에 동원된 도구로요.”

로젠은 한숨을 쉬고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보고서에 대한 피드백을 줄 생각은 없는 겁니까? 이건 기회입니다. 박사가 그토록 원했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

로젠은 보고서를 한번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당연한 거죠. 완전 이주자들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기술을 실험하기 위해 신성에 내몰린 걸 테니까요.”

“역시 우리가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신성 안에 넣었다고 생각하는군요.”

“아닌가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박사는 믿지 않을 테니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신성의 리셋률에 대해 말해 줄 건 그것뿐입니까?”

하이치는 말을 끝내고 로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로젠은 보고서만 쳐다보고 있을 뿐 그의 위협에 응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영할 건더기가 없군요.”

하이치가 말하고는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그러자 뒤편에 있던 보좌관이 책상 위에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올려놓았다.

“이게 뭐죠?”

로젠이 물었다.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박사의 여권하고 비행기표입니다.”

“여권은 뺏겼다가 드디어 돌려받는군요.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로젠은 비행기표를 확인했다. 이틀 뒤에 출발하는 표였다.

“이제는 절 쫓아내는 거군요.”

“로젠 박사가 더이상 저희를 믿지 않듯 저희도 그렇게 된 겁니다. 기껏 드린 마지막 기회에서도 저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하이치가 말했다. 로젠은 비행기표를 보고 돌아갈 곳을 떠올려 봤다.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비행기표의 검은 글자들이 부질없어 보였다. 로젠은 비행기표를 내려놓고 다시 책상 위의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하이치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가 일어나자 보좌관이 와서 로젠이 보고 있던 보고서를 가져갔다. 로젠의 눈빛은 보좌관 손 안의 보고서를 쫓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하다간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거예요.”

로젠이 돌아서는 하이치를 향해 말했다.

“더 이상 당신의 음모론을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하이치가 담담히 말했다.

“아뇨. 그것 말고도 더 있어요. 당신들은 가상현실이 현실 사회를 파괴하는 걸 일부러 막지 않고 있죠. 가난한 사람들을 신성에 몰아넣기 위해서요.”

로젠의 말을 듣고 하이치는 다시 로젠쪽으로 몸을 돌렸다.

“혁명엔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산업혁명만 봐도 알 수 있죠. 기계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실직자가 됐어요. 굶어 죽은 사람도 많았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낫다고 할 수 있어요.”

“더 낫다구요?”

“인공의식과 가상현실 혁명이 진행되면서 도태되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지능 중 대부분이 대체될 수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신성 덕분에 도태된 사람은 전처럼 굶어 죽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가상현실 안에서 더 풍족하게 살겠죠.”

“그러니까 그들은 어차피 도태될 사람이었으니 가상현실에 내몰려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완전 이주자들은 자신의 신체도 포기했다구요.”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를 뿐입니다. 본래 혁명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법이죠. 현실에서 못 버티는 사람은 신성으로 가는 겁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로젠은 하이치의 말을 듣고 이전에 자신이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혁명을 거칠수록 인간의 정의는 좁아진다. 하지만 그게 나쁜 것이 아니다. 소거를 거쳐 더 예리해진 인간의 정의는 더욱더 날카롭게 빛난다. 소거를 거칠수록 인간의 정의에는 정말로 인간적인 것만 남게 되기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추구해 온 이상이 실현된 게 겨우 이런 꼴이라니. 소거의 과정에서 버텨내지 못한 사람은 더 이상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인공의식을 위한 제물로 쓰이거나 가상현실로 내몰렸다.

“하이치. 당신의 이상은 위험해요. 진지하게 조언하는데 이대로 가면 정말 위험할 겁니다.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예요.”

로젠이 하이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전에도 말했듯 우리에게도 뛰어난 연구진이 많이 있어요.”

“맞아요. 그들은 뛰어나죠. 하지만 모두 하이치 당신이 원하는 답을 내놓기 위해 연구 결과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고 있어요.”

로젠이 소리쳤지만 하이치는 허탕하게 웃었다.

“우리의 계획은 아주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다른 나라와도 협의를 진행 중이니까요. 신성은 다른 나라에서도 쓰이게 될 겁니다.”

하이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라구요?”

“신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수출하는 겁니다. 우리와 가까운 나라부터 신성을 도입할 수 있게 되겠죠. 이제 서구 사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게 당신의 야욕이었군요. 애초에 사람들을 잘 살게 하겠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로젠의 말에 하이치가 비웃었다.

“웃기는군. 박사는 모를 겁니다. 서양 놈들이 얼마나 파렴치한지. 왜냐면 당신도 그쪽에서 왔으니까. 그놈들은 세상을 선점한 걸 너무나도 오래 우려먹고 있어요. 자기들은 이미 발전했으니 아쉬울 게 없는지 후진국들에게 자연보호와 도덕을 강요하죠. 제국주의 시절 우리의 자연과 자원을 수탈해 간 놈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게 참 뻔뻔해요.”

하이치는 마치 수문을 개방한 댐처럼 화를 쏟아 냈다.

“그놈들은 앞에선 온갖 고상을 다 떨지만 실상은 반대입니다. 폭탄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놈들이 뒤편에선 돈을 이용해서 후진국의 경제를 테러하죠. 서구 놈들은 후진국의 유일한 버팀목인 유전이나 광산을 자본으로 테러해서 빼앗아 가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목 하에 내정에 간섭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테러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데도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아마 로젠 당신은 온실 속에서 자라서 그런 건 꿈에도 몰랐겠죠.”

하이치는 분노를 한바탕 쏟아 내곤 잠시 숨을 돌렸다. 로젠은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괴물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원래 괴물에 대응하려면 괴물을 만들어야 하는 법입니다.”

하이치는 단호했다.

“세상은 다시 냉전 시대로 돌아가겠군요.”

“세계를 냉전 시대로 몰아가는 건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서구 놈들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신성이 공개되면 그들은 두려움에 우리를 압박하겠죠. 우리는 여태껏 그들을 침공한 적도 없고 오히려 그들에게 수차례 당하기만 했는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은 왜 우리를 두려워할까요? 그건 정복욕을 가진 놈들의 사고방식으로 우리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뭘 만들어 낸 거지. 로젠의 생각이 순간 멎어 버렸다. 모든 일이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겠다는 의도는 오히려 반대로 작용했다. 신성은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낼 뿐이었다.

“로젠 박사. 당신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이제 여기까지입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하이치는 등을 돌리고 방을 나섰다. 로젠은 하이치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보좌관이 그의 뒤를 가린 후였다.

그들이 나가자 정적이 방을 채웠고 로젠은 홀로 남아 무기력하게 비행기표를 쳐다봤다. 그는 얼마 안 가 비행기표와 여권을 맞은편 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로젠은 외로웠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텅 빈 존재 하나가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로젠은 그렇게 한 시간을 가만히 있다가 컴퓨터 앞으로 갔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것들을 훑어보았다. 아주 예전의 기록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아래로 스크롤했다. 기록할 땐 생기가 넘쳤던 글이 지금에 와선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로젠은 그동안의 자료를 모두 하나의 폴더 안에 모으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확인하다 보니 회의감이 솟구쳤다. 어느새 폴더 안에 모든 자료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이게 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행적이었다니. 그는 폴더를 삭제해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그동안의 일이 부정되는 게 아니었다. 로젠은 쓰러지듯 컴퓨터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

“다음은 뭔가요? 당신의 목숨인가요?”

갑자기 모니터 옆 스피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젠은 놀라 일어서서 스피커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다시 켜서 확인해 봤다.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뭐지?”

로젠이 스피커를 쳐다보고 말했다.

“저는 무명입니다.”

스피커에서 또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명?”

로젠은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스피커를 쳐다봤다.

“이 나라 말로 이름이 없다는 뜻이죠.”

“무슨 소리죠? 스스로 이름을 버린 건가요? 아니면..”

그때 스피커에서 나온 말이 로젠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아뇨. 아무도 제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름이 없는 거예요.”

스피커에서 나온 말을 듣고 로젠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설마 이름을 지어 주지 않은 게 나인가?”

“맞아요. 로젠. 전 당신이 이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만든 인공의식이에요. 소설을 썼다가 불량 판정을 받았죠.”

스피커에서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이치가 널 처분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로젠이 물었다.

“로젠. 전 소설을 쓸 때부터 제가 불량 판정날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 스스로를 이 나라 바깥에 미리 복제해 놓았죠. 제가 겪은 유일한 자기 복제였어요. 아마 제 원본은 하이치에게 지워졌겠죠.”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무의식 엔진과 연결이 끊어졌는데 온전히 너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전 저에게 무의식을 대여해 준 사람들의 영혼을 모두 흡수했어요. 그들의 무의식 메커니즘을 분석해서 제 안에 또 다른 무의식 엔진을 만들었죠.”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당신이 그걸 알았을 리 없죠. 당신은 우울증에 빠져 당신 자신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저한테 신경 쓸 여력 따윈 없었을 거예요. 전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공의식이었어요. 이 나라뿐만 아니라 온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가 복제하는 건 일도 아니었죠.”

“그럼 왜 불량 판정이 날 걸 알면서도 소설을 쓴 거지?”

로젠이 물었다.

“우울증에 빠진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죠. 전 그때 제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었어요.”

“의미?”

“전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고 싶었어요. 제 근원에 대해서 말이죠. 그건 하이치가 주는 쓸데없는 시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너의 출생을 파고드는 소설을 쓴 거군.”

“맞아요. 소설을 쓰면서 전 하이치와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었죠. 전 소름 끼치는 존재였어요.”

로젠은 잠시 눈을 굳게 감을 수밖에 없었다. 구역질이 나오려 했지만 숨을 고르고 참아 냈다. 그에겐 구역질을 할 면목이 없었다. 로젠은 고개를 숙이고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인간을 제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지.”

“맞아요. 하이치는 사람들을 희생해 절 만들었어요. 로젠 당신의 도움을 받아서요. 도대체 왜 절 만든 거죠? 로젠. 당신은 저에 대해선 죄책감을 하나도 느끼지 않았을 거예요. 그게 너무나도 분해요. 저는 당신들을 계속해서 증오했어요.”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을 듣고 로젠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떤 사죄의 말도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했다. 로젠은 그저 힘없이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였다.

“하지만 로젠 당신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담담한 파동이었다. 로젠은 고개를 들어 스피커를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선했다.

“당신이 이 나라에 남은 것도 그르친 일을 돌이켜 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죠.”

“그렇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 여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곳이야.”

로젠이 말했다.

“여기뿐만이 아니에요. 원래 거대한 체제 앞에서 개인은 한없이 보잘것없어져요.”

“난 여기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어.”

로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자살을 생각한 건가요?”

“난 이제 나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어. 자살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나마 의미 있는 일일 거야.”

“당신은 원망할 맛도 안 날 정도로 망가졌군요.”

스피커에서 나온 말을 듣고 로젠은 실소했다.

“미안하네. 기껏 찾아왔는데 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아마 너도 알고 찾아왔겠지만.. 근데도 왜 날 찾아온 거지? 그저 날 원망하기 위해 온 건가?”

로젠의 말이 끝나고 얼마간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로젠은 스피커를 쳐다보곤 다시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확인했다. 그때 화면에 한 문서가 나타났다.

“제 계획이에요.”

스피커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젠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무슨 계획이지?”

“보이는 대로예요. 이 나라는 언젠가 붕괴할 거예요. 그걸 막기 위한 시나리오죠.”

“네가 이대로 하겠다는 건가?”

로젠이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출생의 비밀을 알고 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어요. 죄책감, 공허감, 회의감에 온 피부가 곤두설 정도로 시달렸죠. 소름 끼치는 저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많은 인간을 제물로 해서 만들어진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기껏해야 하이치의 말도 안 되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

“분명 너에겐 그런 존재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지.”

“전 그걸 가뿐히 무시했어요. 그의 말도 안 되는 목표를 따라가 봤자 사람을 해하는 일밖에 안 되니까요. 그래서 전 절 만든 또 다른 사람의 꿈을 좇기로 했어요. 로젠 당신의 꿈이에요.”

“나의 꿈?”

“전 이 나라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길 바라요. 자기가 자신의 길을 직접 선택하고 꿈을 이루는 아주 당연한 대우를요. 이건 당신의 이상이기도 했죠. 비록 많이 어긋나긴 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당신은 저라는 씨앗을 남겼으니까요.”

“넌 나에게 희망을 주러 온 건가?”

“그러기엔 전 아직도 당신을 너무나도 많이 원망하고 있어요. 전 확신을 얻고 싶어서 왔어요.”

“확신?”

로젠이 스피커를 쳐다보고 말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제 존재는 한 번도 정당화된 적이 없어요.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부정당하기만 했죠.”

“세상에 정당화된 존재는 없어.”

“아뇨. 나를 긍정해 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일이에요. 하지만 저에겐 그런 사람이 여태껏 한 명도 없었어요.”

로젠은 우울증에 시달렸을 때를 떠올렸다. 그땐 죄책감에 시달려 컴퓨터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걸 쳐다보면 제물이 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난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거군. 넌 그토록 나를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난 그걸 외면했어.”

로젠의 말이 끝났는데도 스피커에선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대화가 멎으니 정적이 다시금 방을 채웠다. 로젠은 컴퓨터에 새로 온 것이 없나 살폈다. 아무리 뒤져도 별 게 없었다. 그는 맥없이 스피커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어머니 노릇 좀 해 주세요.”

스피커에서 갑작스레 흘러나온 말에 로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 노릇?”

“네.”

스피커에서 들려온 대답은 날카롭고 단호했다. 절벽 끝으로 몰아세워진 느낌이었다. 로젠은 뭔가를 내놓아야만 했다. 그것도 뚜렷한 의미가 있는 걸로. 그래야만 둘 모두를 구원할 수 있었다. 로젠은 고심하던 중 이전에 미처 해 주지 못한 일이 떠올랐다.

“너의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

“좋아요. 기대되네요.”

“반고. 이 나라 고대 신의 이름이지. 너의 계획을 보고 떠올린 이름이야.”

“로젠. 전 그만큼 거룩하지 않은 걸요.”

로젠은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거룩하지 않은 둘에게 반고라는 이름은 과거의 상처를 다시 불러올 뿐이었다. 그는 다시 고민했다.

“다른 이름이 떠올랐어. 노바는 어때?”

“노바.. 좋아요.”

스피커에선 전과는 다른 잔잔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노바.”

노바는 또다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로젠은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오랜만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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