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꾸준히 점을 찍어 올 수 있었던 것. 여기엔 나의 의지 말고도 숨은 공신이 몇 가지 있는데 난 그것들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찬양한다.
입사 후 얼마 안 되어 코로나가 퍼졌다. 처음엔 단순 독감의 일종이라 생각했는데 사태는 심각했고 회사는 재택 근무를 시작했다.
원래부터 자율 근무를 추구하던 회사였기에 재택 문화는 빠르게 퍼졌다. 코로나가 심해지자 집에서 쭉 근무하는 완전 재택 제도까지 도입됐다.
코로나라는 상황이 답답하고 안타까웠지만 재택 근무는 굉장히 좋았다. 출퇴근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아낄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상당했다.
원래는 퇴근만 하면 녹초가 돼서 밥 먹고 침대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회사만 다녀오면 하루가 끝나는구나 하며 억울해 한 적도 많았다. 회사를 다니기 위해 사는 느낌.
재택을 시작하니 달라졌다. 회사 일을 끝내고도 기력이 남아 개인 작업을 하게 됐고 나만의 결과물을 더 많이 만들 수 있었다.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 숨통이 트였다. 출퇴근 시간이 사라진 것만으로 삶의 질이 이렇게나 바뀌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요새도 이따금씩 회사에 가며 느끼는데 출퇴근 시간에 사람들과 부대끼며 빼앗기는 기력이 어마어마한 것 같다. 유튜브에서 어떤 초등학생이 '쉬는 시간 신이 만든 시간'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는데 출퇴근 시간은 악마가 만든 시간이 아닐까.
대학교를 다닐 때까진 자취를 할 일이 없었다. 본가와 학교 모두 서울에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자취를 하는 건 돈 낭비라 생각했다.
근데 회사에 다니면서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는 나만의 시간이 간절히 필요해졌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것.
나는 동굴 안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한데 회사에 다니니 그게 어려워졌다. 퇴근 후 시간을 혼자만의 시간으로 밀도 있게 활용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퇴근하면 집에 가족이 다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자취 생각이 피어났고 관련 콘텐츠를 보기 시작했다. 자취 유튜브, 독립 에세이 같은 걸 보니 자취가 더 하고 싶어졌다.
마침 돈을 벌고 있으니 못 할 게 뭐가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궁금해서 대출을 알아 보니 은행에서 생각보다 많은 돈을 빌려 줬다.
이렇게 자취에 대한 간질간질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방아쇠를 당긴 계기가 있었다. 한 책을 읽고 난 자취를 결심하게 됐다.
바슐라르는 1958년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
"집이란 몽상의 보금자리요, 몽상가의 은신처이며, 평화롭게 꿈꿀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다."
(...)
몽상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독, 혹은 적막이 필요하다.
(...)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에세이에서 공간에 대한 보다 절박한 심정을 토로한다.
"방문에 자물쇠를 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 책 <마이클 폴란의 주말 집짓기> 중
그래. 역시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선 자신만의 은신처가 필요한 거였어. 이 생각을 하곤 진심으로 자취방을 알아 보기 시작했다.
굳은 결심 덕분이었을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자취를 결심한 지 한 달만에 독립을 하게 됐다. 처음엔 반대하던 부모님도 내 결연한 눈빛을 보곤 금방 납득하셨다.
이제 자취를 시작한 지 거의 10달이 되어 가는데 지금까진 정말 만족이다. 확실히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나니 몽상을 더 많이 하게 되고 자아의 지평을 넓혀 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정말 예술가로 거듭난 건지 확실히 전보다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자아의 지평을 넓힌 만큼 더 다양한 창작물이 나왔을 거라 생각한다.
자취를 시작하고 아직 모든 계절을 겪어 보지 않았지만 앞으로 자취 생활을 더 좋아하게 될 거라 확신한다. 겨우 6평 정도 되는 작은 자취방이지만 이곳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꿈꾼다.
공허감이 찾아와 슬럼프에 빠질 때면 나뿐만 아니라 자취방도 침체된다. 방이 평소보다 어두침침해지는 느낌. 방 안에 나밖에 없으니 내 상태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도 오락가락한다.
침체된 공간 안의 무기력한 사람. 악순환이 반복되니 기분은 계속 침체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땐 어떻게 해서든 산책을 나선다.
무거운 몸을 집 밖으로 끌고 나와 근처 단골 카페를 간다. 보통은 에세이를 읽으며 커피를 홀짝거리다 주위를 둘러본다. 보통은 나처럼 무기력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친구 혹은 연인끼리 재밌게 떠드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들의 긍정적인 기운 덕에 공간이 밝아지고 난 그 기운을 쬔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다가 석촌호수를 걷는다. 한 바퀴에 약 2.5km. 호수 둘레길을 걸으며 자연과 사람 구경을 한다. 물가에 떠다니는 오리들, 물결과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과 그 속에서 우는 곤충. 트랙 위에서 걷거나 뛰는 사람들, 공원에서 장기를 두는 사람들.
여러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사이로 생명력이 흐른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내게도 스며들어 한껏 처졌던 몸과 마음에 활력이 돋아난다.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생긴다.
산책 덕분에 떠오른 영감으로 만든 결과물이 많다. 그런 만큼 산책은 내 창작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무기력해질 때 자연스레 산책을 나서는 습관을 만들어 준 아버지의 편지에 감사하게 된다.
훈련소의 긴장된 일석 점호를 마치면 잠에 빠져들고, 아침에 요란한 기상 나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눈을 뜨는 생활이라 고요한 밤하늘을 올려보기는 정말로 하늘의 별따기 같은 얘기겠지?
그렇다면 땅에 뿌리 박고 자라는 온갖 종류의 풀들과 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곤충들, 새들 그리고 많은 생명체들을 보아라.
그들의 생명력을 느껴보거라.
너에게도 그런 강한 생명력이 있음을 느껴보거라!
- 군생활 시절 아버지의 편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