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듯 쓴 단편소설 #12
최근 '숨쉬듯'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편한 마음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모임은 구성원 모두가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소재에 대해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달의 소재는 쇼츠(Shorts)였다. 한 달간 끙끙 앓다가 마감 이틀 전에 셀린 디온의 파리 올림픽 영상을 보고 글을 썼다.
“에펠탑을 다시 보고 싶어.”
셀린이 병상에 누운 채 아이린에게 말했다.
“볼 수 있을 거야. 오늘 재활 치료도 잘했잖아.”
“그렇겠지?”
아이린이 셀린의 깡마른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의 얼굴은 광대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다.
“가끔은 신을 원망하기도 해. 왜 하필 나일까 하고. 그러곤 금세 생각을 바꿔. 신이 괘씸하게 여기고 더 앗아갈까 봐.”
“언니. 희망을 잃지 마.”
“그래야겠지.”
셀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오늘 고생했어. 피곤하지. 얼른 자.”
“너도 이만 들어가. 오늘도 고마웠어.”
셀린은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셀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웅이었다. 아이린은 셀린이 미소를 짓지 않으면 불안해서 곁을 떠나지 못했다.
“언니. 잘 자고 내일 봐.”
아이린이 병실을 떠나고 얼마 안 가 셀린은 참아 온 눈물을 터뜨렸다. 소리 내어 울 기력은 없었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이 미등이 켜져 있는 고요한 1인 병실을 간간이 채웠다.
셀린은 하이라이트 조명을 받으며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셀린은 이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온 후부터 무대 위에 올라 노래 부르는 꿈을 꿨다. 원하는 곡을 원 없이 불렀다.
짝-짝-짝-짝
음악이 끝나고 칠흑 같은 어둠에 가려진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셀린은 객석을 유심히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 있나요?”
셀린이 관객석을 향해 물었다.
“언제나 잘 듣고 있어요.”
어둠 속에서 어린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전 셀린의 뮤즈예요. 평생 동안 곁에서 셀린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들어왔어요.”
“너였구나. 노래를 부를 때 함께 해 주는 존재가 있다고 느꼈는데 이제야 만났어.”
셀린은 아이의 목소리가 자신의 어렸을 적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가창의 즐거움을 처음 알게 된, 가장 순수한 시절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셀린이 노래를 부를 때 추구해야 할 기준이자 길라잡이였다.
“저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기뻐요.”
“아무래도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겠지.”
“그것보다는 셀린에게 피날레를 제안하러 왔어요.”
“피날레?”
“마지막으로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내가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거야?”
“그럼요. 피날레 제안을 승낙하면요.”
“제안이라는 게 뭐지?”
“셀린의 남은 생을 대가로 최고의 무대에서 5분 간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단 5분을 위해 내 남은 생을 바쳐야 한다고?”
셀린은 실소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요. 어디까지나 셀린의 선택이니까요.”
“너의 제안을 승낙하지 않으면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는 거야?”
“그건 셀린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스스로의 목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재활을 하면서 이미 느꼈을 거예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걸요.”
셀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곁에서 지지해 준 가족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스스로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저도 슬펐어요. 그래서 꿈에서라도 셀린이 노래할 수 있게 했고 이렇게 피날레 제안도 드리는 거예요.”
잠시 정적이 이어지다 셀린이 입을 열었다.
“피날레를 위해 내가 얼마나 바쳐야 하는 거지?”
“5년이요. 5년을 바치면 피날레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고 공연이 끝나고는 4개월 정도 더 살 수 있을 거예요. 여생을 미리 당겨 쓸 수 있는 선택지인 셈이죠.”
“어디서 공연을 하게 되는 거지?”
“내일 저녁에 셀린에게 메일이 도착할 거예요. 공연을 요청하는 용건으로요. 거기에 응하면 피날레 제안에 승낙하는 걸로, 거절하면 그렇지 않은 걸로 생각할게요. 어디까지나 셀린의 선택이에요.”
이 말을 끝으로 뮤즈는 사라졌다. 셀린이 여러 차례 뮤즈를 불렀지만 객석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만약 내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면 어떨 것 같아?”
셀린이 아이린에게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진지하게 묻는 거야. 아이린의 생각이 궁금해.”
“셀린에서 노래를 뺀다고 0이 되지 않아. 언니한테는 다른 소중한 것들이 있으니까. 가족, 친구 그리고 동료들. 또 셀린이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엔 최고의 디바로 남아 있을 거야.”
“고마워. 언제나 곁에 있어 줘서.”
“나야말로 포기하지 않고 곁에 있어 줘서 고맙지. 그나저나 언니 내가 좋은 소식을 갖고 왔어.”
“뭔데?”
“파리 올림픽 준비 위원회에서 메일이 왔어. 가만있어 봐 내가 읽어 줄게.”
...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대미를 장식할 무대에 귀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공연은 에펠탑에서 이루어지며...
셀린은 메일 내용을 듣고 놀랐다. 뮤즈의 피날레 제안이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이 맞지? 언니는 모두의 마음속에 최고의 디바로 남아 있다니까. 언니 생각은 어때?”
“꿈같은 일이지. 에펠탑에서 공연이라니.”
“우리 이거 재활 목표로 해 보는 건 어때? 의사 선생님도 목표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 했으니까.”
“고민해 볼게.”
“응응. 언니 무리하지는 말고. 제안이 온 것만 해도 근사한 일이야. 언니가 자랑스러워.”
아이린의 말에 셀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른 자. 오늘도 재활하느라 고생 많았어.”
“응. 너도 얼른 들어가서 푹 쉬어.”
아이린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
이젠 꿈에서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객석에서 말을 걸어오는 뮤즈도 없었다. 셀린은 마이크를 던져 버리고 무대 위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신은 셀린에게 직접 앗아가는 대신, 그가 스스로 무엇을 잃을지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셀린은 선택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