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해결
가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엇인가 있는데,
그것을 글로 표현하려고 하니 답답할 때가 있다. 마치 꿈속에서 선녀와 함께 여유작작하게 하늘을 날다가, 정작 깨어나서 손을 잡으려 보니 만져지는 것은 찬 공기뿐인 것처럼.
지금 마음이 딱 그러하다. 뭔가는 쓰고 싶은데, 정작 쓰려고 하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할아버지나 부모님 세대에 DNA에 각인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는 생생한 경험 교훈이 피를 타고 우리한테도 전해 온 같다.
하지만 불의 혹은 비정상이란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난무할 때 침묵을 지키는 것도 도리는 아닌 같다. 묵묵히 자기 몫만 지키고 자기를 위한 말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게 끝나는 같다.
그리고 또한 명치끝까지 치고 올라온 비판적인 생각을 뱉지 않고서는 답답해서 제 명을 못 살 같다.
머리가 실마리처럼 복잡해 주는 것은 그 근본원인을 따져 보면 정체성 때문이다.
어렸을 때 필자가 다니던 마을에 조선족 학교와 한족학교가 별도로 있었는데, 조선족 소학교는 선생님들이 전부 우리 민족언어로 교육을 진행했고, 한족 학교는 한어로 교육을 진행했다. 도서관에도 거의 전부가 연변에서 출판한 민족 잡지와 북한에서 들어온 민족역사나 민족영웅 관련 서적, 삼국시기나 조선시대 유명인물들의 전기가 있었다. 참고로 중한수교 전이라....
같은 공산주의 교육을 받는 다 하더래도, 민족교육에서 다르고 언어와 습관에서 다르다 보니 이질성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습관에서도 우리 민족은 집안에 들어가면 깨끗한 구들위에서 맨발로 생활하기 좋아하는데 비해, 한족들은 집안에서도 신발 그대로 바깥 옷차람 그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같다.
하여 두 학교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싸움을 할 때가 많았는데, 그 전초전이 말싸움이었다. 한족애들은 우리를 高丽棒子(고려방자)라 놀리고, 우리는 그 애들을 소캐바지나 왕바뚜즈(王八犊子, 우리말로 쌍놈의 새끼)로 서로 욕을 날리다 주먹이 오고 가고 코피가 터지기도 했다. 이럴 때면 어른들은 보통 직접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얻어맞아 집에 가면 아버지한테 호되게 혼나군 했었다.
지금은 "중화민족"과 "민족 대단결 대융합"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교육하다 보니, MZ세대들은 그때 그 시절보다 훨씬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같다.
실제 딸내미가 다니는 학교에 학생구성이 조선족과 한족이 각각 절반씩 차지하는데, 민족 문제로 싸움이 발생하거나 마찰이 발생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한다. 민족적 정서가 충만되었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신세대는 새로운 문화에 대해 관후하고 쉽게 접근하는 같다.
물론 기성세대인 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 민족언어의 쇠퇴나 부재를 일으키지 않을 까 걱정반 기대반으로 바라보고 있다.
걱정은 딸내미를 포함한 신세대들이 조선족 문화와 풍습 그리고 역사에 대해 소홀하다가 결국 자기 민족성을 상실할까 봐 우려된다.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300년 동안 통치했던 만주족도 청나라 초기에는 그런대로 만주족 언어와 한어 동시에 병용하다가 강희제(康熙帝,1654~1722) 때부터 한족문화를 대량으로 받아들이고, 한족 전통경전들을 만주족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이후로 만주족 언어가 점차 몰락하고 자연스럽게 풍속 예의범절이나 종교신앙들이 점차 한족 화했으며, 1911년 이후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그 동화가 더욱 급속해 진행되어 현재 와서는 만주족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 없을 지경이라 한다.
물론 최근에 청나라 궁중 암투극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이 심상찮게 올라오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중국 영화인들이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터치하기 쉬운 역사가 청나라 역사라 그런 것뿐이다.
기타 중화민국 시대나 그 이후의 역사를 다루기에는 촬영허가도 문제지만 촬영이 끝난 후에 관련 심사가 만만치 않아서, 만일에 상영되지 못하면 그대로 돈을 날려 보내니깐 더욱 그러할 뿐이다.
나쁜 점이 있으면 좋은 점도 있는 법.
중학교까지 민족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부터 한족과 똑같이 교육받으면 좋은 점도 있다. 언어장벽을 타파할 수 있다.
필자 세대들이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언어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고 중시절까지 12년 동안 우리말과 글로 거의 교육을 받은 탁에 한어 수준이 동급 한족학생들보다 많이 떨어졌는바, 구두는 손짓 발짓 몸짓해서 어느 정도 의사전달이나 교류가 된다지만은 문장 읽기 그리고 쓰기 수준이 형편없다 보니, 대학 초기에 한동안 한어 특히는 고대한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왕창 받았다.
딸내미도 이제는 고등학교 때부터 한족과 똑같은 한어교육을 받고 있어서, 적어서 대학 가서 당혹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자유롭게 중국 각지에서 오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발전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좋은 같다.
이 문제를 펼치기 앞서서, 누구 든 지 적어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거나 아니면 물어보았을 선택제가 있다.
바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이다.
젖먹이 애기의 입장에서는 "젖"의 존재인 엄마가 당연히 더 중요할 것이고, 어느 정도 셈이 들게 되면 니체가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恋母情结或恋父情结,lOedipuskomplex)가 작동하여 엄마나 아빠 중 어느 한 분을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세상물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선택이 또 달라질 수 있다. 엄마 아빠의 사랑이 공동으로 필요한 나이 때가 되어 엄마 아빠를 다 똑같게 필요할 수도 있는 법이고, 그 반대로 부모한테 버림받았을 때 그 한이 맺혀 엄마 아빠란 단어 자체까지 싫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살아온 세월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답안을 흑백논리로 강요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비슷한 문제를 자주 봉착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축구다.
축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라 한다. 하여 단 종목으로 올림픽을 압도할 수 있는 종목도 축구, 전 세계 수많은 국가들 선진국이나 후진국 그리고 폐쇄적인 중동의 왕국들까지 들끓수 있는 것이 축구이다.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 한국도 같은 상황이라고 본다.
공식 신분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라, 항상 물어보는 문제가 "중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누구를 응원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나에게 한때는 참 난감한 문제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담담해진 같다.
문제는 이런 호기심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중국에도 있지만, 한국에도 참 많다는 점이다. 한국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한국과 북한이 축구경기를 하면 누구를 응원하겠냐고도 물어본다.
국가적인 정서가 다분히 섞여 있는 질문이기도 하고, 질문 속에 유색안경으로 바라보는 중국 조선족에 대한 시각이 애매하게 믹스되어 있는 눈치라 매번 씁쓸했던 기억들이 있다.
중국 조선족으로서 혹은 중국 혹은 한국을 꼭 응원해야 만할 당위성이 있는가?
세월이 흘러서 세계가 한 사람의 선택에 대해서 더 포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나 환경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점이 안타깝고, 중미무역전쟁 후에 그러한 안 좋은 정서가 오히려 역행해 가는 같아 더욱 안타깝다.
과거와 현실에서 파헤치는 해결머리
눈물 젖은 두만강
항상 그러하다시피 문제가 있으면 해결방법이 있는 법이다.
여기에 앞서 에피소드를 하나 풀까 한다. 대학 다닐 때 가끔 주말에 북경대 선배들이나 친구들과 오도구에 있는 노래방을 자주 가게 되었는데, 그중 선배 한분이 꼭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바로 <눈물 젖은 두만강>이다.
노래에는 별로 재능이 없으셔서 삑 소리가 가끔 나기도 했으나, 이 노래만큼은 진정성 있게 부르셨는데 그 감동과 여운이 오래갔던 같다. 30여 년이 지난 이때, 우연하게 조선족 가수 김윤길이 KBS에서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을 들으면서 그때 감동이 다시 마음속 깊은 곳에 와닿는 같다.
그동안 수많은 한국 가수들이 불렀지만 원곡의 감동과 감성을 일으키지 못하고, 정통 트롯 가수들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노래-<눈물 젖은 두만강>. 왜 김정구선생님과 가수 김윤길이 부르는 노래가 나한테 감동을 일으켰을 까?
나라 잃고 님까지 잃은 그 비통함과 애환 그리고 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 나기 때문이다. 그 시대 두만강이 갖고 있는 의미를,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다른 가수들한테서는 그저 노래를 잘하네 정도밖에 감흥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일송정, 명동학교 그리고 윤동주
용정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곳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 민족말살정책 경제적 착취 등을 피해 무수한 청년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했기 때문이다. 애국시인 윤동주 그리고 문익환, 장준하, 송몽규 등등.
물론 항일투사들이 있으며 그에 대해 일제의 탄압이 빈번했고, 한반도에서도 친일파들이 소위 "간도특설대"에 가담하여 항일탄압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여기에는 백선엽, 신현준, 광복 이후 여기에는 이승만 정권 및 이후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한 자들이 많았다.
광복 후 미국의 주도하에 당시 한국정부가 친일파를 철저하게 척결하지 못했던 점이 아직까지 이슈가 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100여 년 전에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도 이 땅에 민족의 뿌리를 내리고 그 언어와 전통 등을 견지해 왔으니, 앞으로도 꾹꾹이 잘해 내리라 생각한다.
중국 조선족의 현재
<2021년 중국통계년감>에 의하면 현재 조선족 총인구가 170만 2479명이다. 주로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등에 분포되어 있으며, 개혁개방 후 한국 일본과 미국 등지에 이민 간 사람들도 상당하다.
중국에서 조선족들의 발전상황과 지위는 중국 정치행사의 양대산맥인 전국인민대표대회(약칭, 전인대)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약칭, 중국정협)를 보면 알 수 있다. 전인대는 한국의 국회와 비슷한 성격으로 최고 입법부로서 법률제정. 국가 지도자 선출, 정부 예산 및 국가개발계획을 숭인 하며; 중국정협은 다당협력과 정치 협의 역할을 하며 정협위원은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생태 발전을 비롯한 경제정책과 핵심과제에 자문을 제공한다.
규정상 전인대 대표는 인구 70만 명당 한 명 좌우로 선출되며 소수민족은 그 비례보다 조금 더 선출한다. 정협위원은 자문제공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각 분야 전문가들로 선발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 조선족 인구가 170만 명에 불과함에도 전인대에서 12명의 대표를 배출했다는 점은 소수민족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었다 해도, 중국 조선족들이 정계에서 상당히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중국 정협에서 사회과학분야, 경제분야, 환경자원분야 등에서도 위원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각계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는 상징이 되겠다.
특히 환경자원분야의 박세룡 위원인 경우는 2021년에 당해 가장 젊은 나이로 중국과학원 원사로 선정되고, 2023년 중국정협 상무위원, 북경대학 부교장으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안개가 걷히면 맑은 하늘이 찾아올 듯, 어둠이 걷히면 희망찬 하루가 시작될 듯.
중국 조선족을 에워싸고 벌어졌던 오해와 불안이 하나둘씩 그 진실이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다.
혼돈스러운 세계정치와 혼란스러운 한국의 탄핵정국에서 때 아닌 중국 그리고 한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을 상대로 한 불협화음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이 슬금슬금 기여 나오니깐 답답해서 글을 써본다.
정치를 전공한 입장에서 그 최종 목적이 진보든 보수든 지지세력의 규합 그리고 그것을 통한 선거투표에 있음이 얄팍하게 보여 은근히 괘씸하기도 하나 어쩌겠는가?
정치판이 원래 그렇지 않았던가?
투표 한 장이 걸려 있다면 사거리에서 지나가는 똥차가 보여도 납작 엎드려 절하는 그런 게임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