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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이 피고 지고

아픈 기억 그리고 각인

by 백검

제주도 날씨는 무척이나 변덕스럽다.

비가 줄곧 내리다가 이젠 그치겠지 하는 예상은 항상 빗나군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섬 중간에 한라산이 떡 서있어서 남쪽에 있는 서귀포에서 북쪽 제주시내로 드라이빙하면서 올라오면서도 변할 때가 많다. 남쪽바다에서 올라오는 따스하고 습한 공기를 한라산이 병풍처럼 막아버리니 그렇다.


올해는 변덕 많고 말도 많은 트럼프 아저씨가 천조국의 대통령으로 올라와서 인지, 날씨도 더욱 변덕스러운 같다. 왕년에 이쯤 되면 날씨도 완연하게 풀리고 했는데 아직도 꽃샘추위가 옷깃을 파고든다.


연속 이어지는 궂은 하늘에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자 1100 도로에 있는 제주도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집에서도 가깝고, 가끔 새로운 주제로 전시를 여는데 작품 속에서 화가가 사회와 인생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주차해 놓고 입구 쪽으로 걸어가 보니 죽창을 든 조형물이 보인다.

죽창 끝에 나부끼는 헝겊조각, 그리고 마른 억새풀로 묶은 머리카락과 겉옷과 거친 땅 위에 맨발로 서있는.

굳게 다문 입술과 의연한 눈길에서 단호함이 보인다.

민초(民草)를 주제로 한 전시임이 엿보인다.

제주도립미술관 앞에 서있는 죽창을 쥔 조형물


짐작이 맞았다. 1층 안내카운터옆 강요배 서용선 화가님의 전시가 있고, 2층에 "4.3 미술 네트워크 특별전: 빛과 숨의 연대"가 전시되고 있다.

요즘 답답한 시국에 어울리는 전시인 같아 천천히 둘러보기로 한다. 눈에 확 들어오는 작품들이 많다. 그중 인상적인 일부만 올린다.


작품은 열사람이면 열사람에 따라 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오롯이 나 개인의 옅은 감상을 적으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보수냐 진보에서 더욱 극단으로 나가 극우 아니면 극좌로 치닫는 정세에 유색안경으로 판단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가 나온 지도 40년을 바라보는데, 정치를 한다는 놈들에 아직도 전라도와 경상도 편 가르기를 하니 아이러니하다.

기획전시: 역사화의 새 지평: 시대를 보다



강요배: 수풍교향(水风交响),2021년 작품, 대구미술관 소장

초승달이 뜬 어둠 속에서 휘몰아치는 바람과 성난 파도, 그리고 거친 바위; 그 앞에 서있는 여윈 남성조각상이 함께 어울려진다. 열악한 자연조건 속에서도 꾹꾹 하게 삶을 이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혹시 집채 같은 파도가 민초의 분노도 상징하지 않을까? 광장에 뭉쳐서 불의에 맞서는 민초의 모습 같기도 하다. 잔잔한 호수 같다 가도 그 분노가 쌓이면 활화산처럼 태풍 속 성난 파도처럼 포효하는....


이 대목에서 순자(荀子)의 말씀이 생각난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하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君者,舟也;庶人者,水也。水则载舟,水则覆舟)>


서용선: 위리안치(围篱安置),2015년 작품


새초롱 같은 구금시설에 갇힌 사람이 보인다. 봉쇄와 개방, 자유와 구속, 민주와 독재는 항상 대립된다. 개방과 자유와 민주는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반항과 투쟁이 없으면 찾아올 수 없는 것이요, 또한 반항과 투쟁이 없으면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서용선: 계유년, 2009년 작품

권력이 무엇이고 왕위가 무엇이 길래 항상 피바람을 동반하는 것일까?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정적인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칼로 벤 수양대군.


근데 이것이 어찌 수양대군일 뿐이겠는가?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서 권력 쟁탈전이 일어나고 있음을.

혹은 국왕 혹은 대통령 혹은 큰 재벌의 회장직을 걸고 암투가 한창일 것이다.


서용선: DMZ, 1999~2003년 작품

38선과 비무장지대는 우리 민족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이다.

625 전쟁이 끝난 지도 7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아직도 38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총과 대포를 겨누고 있다는 것도 슬프고, 언제 통일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또한 슬프고, 요즘 MZ세대들은 통일에 대한 생각들이 담담하다 못해 망각해 간다는 사실이 가장 슬프다.


2층에 기획전시실 입구에 있는 한강소설의 한 구절,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참 인상적인 구절이다.




최수환: 왼쪽 <학살-10월의 꽃>,2025년 작품; 오른쪽 <학살-원혼들> 2025년 작품

마음이 무거운 그림이다. 지금도 제주도 올레길 그리고 중산간 지대에 있는 4.3 유적지를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4.3 사건에 대한 정의를 다시 보면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러나 일어났지만 앞으로는 절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그 사건을 기념해 본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536>


기획전시관을 2시간 정도 둘러보고 나오니 마음이 눌린 것처럼 답답한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미술관 주변을 산책했다.


마침 도립미술관 뒤편에 큰 동백꽃이 환하게 피여서 사진에 담아 봤다.

마음이 무거워서 인지, 미술관 이층에서 본 신학철 화백의 <초혼곡>처럼, 꽃송이송이에 민초들의 혼이 깃들인 것처럼 느껴져서 슬폈다.



신학철: <초혼곡>, 1993년 작품, 제주도립미술관 소장


미술관에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났다, 하지만 그 슬픔이 아직도 잔잔하게 마음속에 흐르고 있다.

글 쓰는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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