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란 그 단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이 되어 여러 가지 꽃들이 하나둘씩 산과 들과 거리를 물들일 때면 항상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이원수 선생님께서 작사하신 <고향의 봄>이다.
선생님은 일제 식민지 시기 15세의 약관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 가사에 풀었다. 남과 북의 이념화로 갈라지기 훨씬 전에 나온 노래라서, 수령님에 대한 찬양일색인 북한에서도 그리고 당연히 한국이나 민족교육정책을 실시하는 중국 연변에서도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몇몇 노래 중 하나이다.
필자가 소학교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이다. <고향의 봄> 은 필수곡이었으며, 장기자랑에도 자주 등장하고 운동대회 때 스피커를 통해서도 자주 방송되군 하였다.
"고향의 봄"을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고향(故乡)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고향은 태어난 곳 혹은 장기간 거주한 곳을 가리킨다고 한다. 더 풀어쓰면 고향의 고(故)는 원래의, 지금보다 이전 것 등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반백을 넘어선 이쯤에 "고향"을 떠 올리면 괜히 먹먹해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순자(荀子)께서 礼论에서 말씀하시기를, 큰 새들과 짐승은 무리와 짝을 잃고 달을 넘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무리로 돌아간다. 자기가 원래 살던 곳을 지날 때 반드시 머뭇거리며 울부짖으며 주저하며 망설이다가 그제야 떠날 수 있다. 작은 것은 제비나 참새 같은 새들도 잠시 지저귀는 소리를 내며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떠날 수 있다. (今夫大鸟兽则失亡其群匹,越月逾时,则必反铅;过故乡,则必徘徊焉,鸣号焉,踯躅焉,踟蹰焉,然后能去之也。小者是燕爵犹有啁噍之顷焉,然后能去之。-荀子 礼论 19章)
Youtube에서 본 Little Q가 떠오른다.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의 눈물 나는 스토리를 담은 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또 다른 감동적인 것인 것은 안내견이 어렸을 때 거두었던 주인과 상봉하는 장면이다. 자기가 쪼꼬마할 때 놀던 야구공, 그리고 장소 그리고 주인공과의 일상을 냄새를 통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데서 감동받았다.
자기가 자랐던 동네를 기억하는 것은 지구의 동물 중 지능이 상대적으로 높은 포유동물뿐만이 아닌 같다. 강남 갔던 제비도 고향 찾아 돌아오고, 강에서 태어난 연어도 먼바다로 가서 성체가 된 다음에 거친 물살과 높은 폭포를 거슬러 다시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섬진강에서 방류한 어린 연어들이 몇 년 후 크게 성장한 후 북태평양 베링해와 알래스카에서 1만 5천 킬로미터를 헤염쳐 다시 섬진강으로 회귀했다는 뉴스를 보고 연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물고기나 새 같은 미물들이 자기가 본래 살았던 곳 즉 고향을 찾는 것. 이것을 귀소본능(归巢本能,homing instinct)라고 부른다고 한다. 귀소본능의 원인에 대해서, 현재 확실하게 판명된 것은 없으며 지구 자기장 대비 태어난 곳의 각도차이를 감지하여 고향을 찾아간다는 말도 있고, 물고기들 같은 경우 태어난 강의 물의 맛을 통해 태어난 곳으로 찾아 간다고 한다.
아무튼 어렸을 때의 기억의 실마리를 따라 자기가 태어난 곳을 정확하게 찾아 회귀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은 동물들이 수억 년 동안 진화하면서 유지해 온 원초적 본능이라고 평가한다. 근데 개구리는 왜 올챙이 적 생각 못할까? 우리 무지한 인류들의 억측에 의해 빚어진 루머일 뿐일까?
인류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 지 기에는 인류가 너무 복잡한 존재이다.
지구상에 생명이 35억 년 전에 출현하고, 생명이 단핵에서 다핵으로 곤충에서 포유류 그리고 최종적으로 약 400만 년 전에 현존 동물의 결정판인 인류로 진화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과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별의별 인류들이 다 출현한다. 짐승보다 더한 짐승, 악마보다 더 사악한 악마로 표현하기 까지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두 명제로 구분하더라도 인간(人间) 같지 않은 인간들이 참 많은 같다.
물론 내가 기타 사람들을 대신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롯이 나의 생각만 정리해 보려고 한다.
고향은 나에게 어떤 것일까?
우선은 진달래꽃이다.
진달래는 두견화(杜鹃花) 혹은 만산홍(满山红)이라고 도 부른다. 추운 겨울에 꽃망울이 졌다가 이른 봄에 터뜨려 봄을 알리는 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역경을 이겨내어 꿋꿋하고 바르게 피는 꽃으로 인식되어 연변에서는 진달래꽃을 연변주의 州花(자치주의 꽃)으로 지정하고 있다.
매년 4월 중순쯤 연변의 산과 들에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핑크빛 물결을 이룬다. 내가 살던 고향 집 뒷산에도, 집 마당에도 그리고 다니던 학교 교정 화단에도 진달래꽃이 핀다.
봄이면 연변의 대지를 붉게 수놓은 진달래꽃을 연변의 열사와 비유하기도 한다. 1937년-1945년 항일전쟁, 1945~1949년 국공내전 기간 연변에서 해방운동에 투입된 조선족 청년이 62924명으로 당시 전체 조선족 인구의 5%(광복절 전 연변 조선족 인구가 216.5만 명, 광복절 후 백만 명이 한 반도로 돌아감)를 차지하였으며, 이외 22.2만 명 청장년이 운송지원 등 업무에 투입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통계한 결과 연변에서 등록된 혁명열사가 14740명인데, 그중 조선족 혁명열사가 97% 이상을 차지하였다.
하여 산과 산에 진달래, 마을과 마을마다 열사기념비(山山金达莱,村村烈士碑)란 시 구절로 연변이 중국 근현대 혁명에 대한 공로를 비유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지금의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있게 된 것도 우리 민족 언어와 전통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지위를 갖게 된 것도 다 이런 원인때문이지 않을 까 생각한다.
고향 하면 생각나는 것이 할머니표 오누비장이다.
우리말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쁜 버릇에 물들지 않도록 자녀들을 잘 교육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여든까지 가는 것은 버릇뿐만 아닌 같다. 입맛도 마찬가지 인 같다. 어렸을 때 형성된 입맛이 늙을 때까지 가는 같다.
젊었을 때 IT기업에서 영업을 하다 보니깐 중국 각지로 출장을 자주 가게 되면서 다양한 음식을 접했다. 네발 달린 것은 책상 빼고 다 먹는다는 그래서 음식재료가 하늘에서 나는 새에서부터 땅에서 기는 벌레까지 참 다양하고, 요리방법도 기타 나라의 요리법들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나라다 보니,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도 참 많았고 간혹은 눈물 나게 맛있어서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지 못해서 미안했던 적도 있었던 같다.
하지만 음식의 정점에 할머니의 손맛이 들어간 오누비장이 자리 잡고 있다. 오누비장은 푹 삶은 콩과 담근 지 1년 되는 된장을 일정한 비율로 섞은 다음 살짝 발효한 연변음식이다. 된장찌개과 청국장이 맛이 믹스되어 있어 그 구수함은 찐한 대신 청국장 고유의 썩은 냄새는 줄인 음식이다.
할머니가 이 세상을 떠난 지도 30년을 넘으셨으니, 할머니표 오누비장도 이젠 30년 넘게 먹지 못했다.
하지만 그립고 생각나서 지금도 한식당 가면 무조건 청국장부터 찾는다. 할머니 손맛을 찾기에는 번번이 실패하지만, 오누비장과 비슷한 청국장을 먹으면서 라도 그리움을 달래 보고 싶어서이다.
사실 요즘 신세대들이 서양식 요리나 패스트푸드에 익숙하다 보니, 발효 냄새가 강한 청국장 그리고 정성이 더욱 들어가는 오누비장은 시장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
이젠 추억 속에서만 안고 가야 하나 하고 낙심하던 차에, 우연한 기회에 연길 소시장 거리에서 소원을 이뤘다.
딸내미를 학원에 보내고 산책하던 중 "아바이아매장국집"을 보게 된 것이다. 가슴속에 묻어 지내던 아바이아매 명칭을 보니 친근감이 들고, 혹시나 내가 그렇게 그리던 그 맛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어 가보았다.
소박한 실내 인테리어와 그리고 입구에 있는 한복을 입은 노인부부의 사진을 보니 그 믿음이 조금 깊어지고, 조금 지나 올라온 장국을 한 숟가락 떠 입안에 넣는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온 눈물에, 어지간히 당황했다.
가슴 바닥에서 부터 치고 올라온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 맛을 따라 쫙 퍼지고, 한편으로는 공공장소에서 울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겨우 눈물을 참았다.
묵묵히 식사를 끝내고 차 안에 돌아오니, 끝내 막혔던 눈물이 제방이 터진 듯 흘러내렸다.
추억 속에 간직했던 그 맛이 돌아오니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일순간에 터져 버린 것이다. 코와 혀 끝에서 시작된 방아쇠가 30여 년이란 세월을 뚫고 지나서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할머니에 대한 퍼즐들이 순식간에 맞춰지면서 어렸을 때 기억들이 금방 발생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데, 정작 당사자는 저 세상에 갔다는 것이 슬퍼져서 또 울게 되었다.
결국 할머니 손맛에서 내가 찾고 저 했던 고향을 찾은 같다. 아마 이래서 미물인 연어도 어렸을 때 만리 이만리를 헤염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싶다. 거기에 어미 고기의 짧지만 굵직한 사랑의 흔적이 민물속에 남아 있을 테니깐.
사람마다 다 고향을 그리기 마련이지만, 단언컨대 그 깊이가 다 다를 것이다. 젊었을 때는 그것을 깨닭지 못할 수 있었도 나이가 차면 언젠가는 꼭 느끼게 된다.
그리움은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갈라져 있는 세월만큼 더 깊어지는 같다. 여행사 일을 하면서 군사분계선 부근에 있는 임진각에서 여러 번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것을 정리해 본다.
임진각을 가면 625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열차와 기타 남북분단의 고통이 엿보이는 사진들이 여기저기에 붙어 있다. 냉전이 끝난 지도 한참이고 베를린 장벽도 붕괴된 지 한참인데 38선은 아직도 냉랭한 하기가 불어 친다는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남북한과 주변 국가의 군사적 외교적 정치적 셈법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다 보니 그것이 단시간에 풀리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생사이별의 고통을 받고 있다.
바로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이다. 당시 전쟁을 피해서 잠시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피신했던 사람들, 지어는 38선이 마을을 꿰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이웃마을에 마실 갔다가 이산가족이 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 파급면이 방대하여 거의 천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는데, 1950년대 한반도 인구를 3천만 명으로 추산하면, 거의 3분의 1 좌우가 분단과 함께 이산가족이 된 셈이다.
그 동안 남북관계가 완화되면서 그리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금강산 등에서 진행되어 감격적인 장면이 각국 외신 기자들을 통해 전 세계로 방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핵실험이 지속되고 남북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2007년 11월을 끝으로 더 이상 이뤄지지 않으면서, 이산가족의 상봉의 희망이 꺼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참으로 형용하기 힘든 인간 비극들이 발생하고 있다. 젖먹이로 태여 나서 세월이 흘러 70년 노인이 되어 사진 한 장과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 어머니와 고향을 한 없이 그리는 분들도 그러하다. 살아 생전에 고향을 꼭 한 번이라도 가서 그 그리움을 풀고 죽고 싶지만, 끝내는 실현 못한다고 죽는다는 생각에 혹은 망연자실하거나 혹은 그리움이 한이 되고 그 한이 다시 아픔이 되어 눈을 감아도 편하게 가지 못하는 같다.
남북관계가 빨리 완화되어 비인도주의적인 비극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끝으로 내가 소장한 북한 김기만 화백님의 "야밤의 기러기"를 펼치면서 이번 문장을 매듭 지려고 한다.
김기만 화백님은, 한국화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받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친동생이다. 서울 종로구 운이동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20년 전에 이 그림을 얻었을 때는 생각 못했는데 지금 보면 그림속 기러기를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한 게 아닌 가 싶다. 그리움을 그립다고 공개적으로 표현 못하는 것도 또한 비극인 같다.
고향을 생각하면 그리움만 있어야 하는데.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