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봄날은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찾아온다.
변덕 많은 날씨 때문에 꽃샘추위 때문에 가끔 겨울인지 봄인지 잠깐 망각할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3월 넷째 주의 따스한 며칠 동안의 날씨 덕분에, 꽃들이 앞 다퉈 피여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같다.
특히 하루 밤이 지나니 팝콘 터지듯 개화한 벚꽃을 보면 이제야 봄이 왔음을 느끼게 된다.
비록 겨우내 피고 지던 동백꽃이 3월 중 하순이 되면 더욱 풍성하게 피지만 몇 개월 동안 보면서 담담해져서 그런지 인상적이지 않다. 유채꽃도 1월부터 4월까지 피여 있지만 성산일출봉이나 산방산 등에 비즈니스용으로 1000원 정도 요금을 받는 다락밭이나 뙈기밭 정도이다.
앙상했던 나무 가지에 꽃망울이 여물다가 하나둘씩 톡톡 꽃을 터뜨리다가 3월 28일에 후두닥 터뜨리는 것을 보면서 가끔 국제마라톤대회에서 스타트 출발 총성을 듣고 뛰쳐나가는 선수들 같아 보이기도.
벚꽃 하면 다들 일본을 생각하지만 한반도에도 토종 벚꽃이 있다는 걸 생각하자. 바로 한라산 중턱에 있는 왕벚꽃 자생지이다. 여러 곳에 있는데 한라산 산간을 가로지나는 도로는 대다수 주차가 불편하다 보니 가기가 힘들다. 울트라 러닝할 때 한 두 번 들린 기억이 있다.
자생지에서 오래된 나무를 보면, 혹시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더 있지 않을까 싶다. 기회가 되면 왕벚꽃 자생지에서 곱게 핀 벚꽃들도 보고 싶긴 하다.
그렇다고 제주도의 가로수가 제주 왕벚나무라고 보기에는 애매모호한 것도 있을 같다.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기간 일본이 조선민족언어와 문화말살정책을 펼치면서, 대량으로 일본 문화를 한반도에 강제 주입하던 그때 일본 특산종인 소메이요시노 벚나무도 한반도를 포함한 식민지 지역에 전파된 걸로 보인다.
실제 2020년 산림청 통계기준으로 한국에 있는 가로수 중에 벚나무가 156만 그루로 가장 많은 데, 그중 단 200여 그루만 한국 벚나무이고 나머지는 일본 벚나무라고 한다. 비록 일부 지역에서 일제 식민 지배 시대 잔재를 파헤친다는 인식하에 잘라버리기도 했으나 한일수교 그리고 한일관계가 완화될 때면 우호의 상징으로 다시 심기도 했다고 한다.
참 벚꽃 하나에도 정치와 외교의 그림자가 보이니 어처구니없기도 하면서 슬픈 일이다.
어쩌겠는가? 나라를 찾은 지도 8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시절 일본의 제반 식민정책에 미화하거나 동조하는 인간들이 있거늘. 또한 일제 강점기에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고 호의호식하던 인간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이나 후대들이 역시 지금 시점에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말이다.
따스한 봄날에 식상한 얘기를 접고 최대한 재미있게 풀어 보도록 하자.
오랜만에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29일 전농로를 찾았다. 마침 왕벚꽃 축제라 평소보다는 사람이 많았는데 예상보다는 또한 적어서 놀랐다. 요즘의 불경기를 보여 주는 같다.
제주의 기원을 엮은, 그리고 제주의 만 팔천 신들 중 가장 중요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개벽시조-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명의 신선과 관련된 박물관이다.
한국의 정취가 깃들어져 있는 건물과 수백 년 된 고목들이 조화를 이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벚꽃 피는 봄에는 금상첨화다. 왠지 가야금 소리가 고택 구석에서 인가 조금씩 흘려 나올 법한,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제주도의 벚꽃 명소 중 가장 좋아하는 곳이 어찌 보면 삼성혈박물관이다.
삼성혈박물관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걸어 민속사자연사박물관에 도착 후 도랑을 따라 걷다 보면 신산근린공원에 도착하게 된다. 근린공원이라 하여 작은 도심공원으로 생각하면 오판이다. 면적이 24만 평으로 제법 크고 게이트볼장, 배드민턴장 등 체육시설에 어린이 놀이 시설, 강아지 놀이시설까지 구비되어 있다.
신산공원의 화룡정점은 도랑 옆 만개한 벚꽃이다.
고대 일본이 야만적인 상태에서 문명이 스며들긴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중국과 한반도의 사람들이 이주하면부터 이다. 야요이 시대에는 농업기술과 청동기, 철기 등 기술이 전파되었고, 고훈 시대에는 백제와 가야인들이 이주하면서 당시 선진적인 기술들을 전파하였고, 아스카 이후로는 견수사와 견당사를 통해 중국의 정치제도. 불교와 유교사상, 건축기술 등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이때 수나라와 당나라 귀족들과 문인들의 꽃놀이 풍습이 일본에 전파되었다.
당나라 때 상류층들은 봄이 되면 말을 타고 꽃이 핀 나무밑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탐춘연(探春宴)을 즐겼다고 한다. 이외 상류층 여성들인 경우는 머리에 생화를 꽂고 두화(斗花, 두화)를 즐겼다고 한다. 두화에서 누가 쓴 생화가 더 비싸고 더 아름다운 지를 겨루었는데, 그 바람에 장안의 생화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사태까지 빚어졌다고 한다.
이런 당나라 풍습이 일본에 전파되면서 꽃놀이-하나미(花见)로 된다. 하나미는 원래 매화로 시작하였으나 후에 벚꽃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일본 왕실에서 시작되었다가, 16세기 중순부터 사무라이와 귀족들이 그것을 모방하면서 점차 범위가 넓어지고 17세기 즉 에도시대가 되어서야 일반 인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니토베이나조(新渡户稻造)는 그 유명한 무사도(武士道)란 책에서 "일본의 무사도는 그것을 상징하는 벚꽃과 함께 우리 국토에 독특하게 피어난 꽃과 같다."라고 쓴다. 벚꽃은 어떻게 사무라이정신과 엮게 되었을 까?
벚꽃의 특점은 화기가 길어서 2주밖에 되지 않으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며 신속하게 피었다가 강한 바람이 불면 분분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 짧고 강력한 것이 사무라이의 삶과 같다고 하여, 일본에는 "꽃은 질 때 산산이 흩날리는 벚꽃이 아름답고 사람은 벚꽃처럼 질 때가 아름다워야 가장 훌륭한 무사"라는 말이 있다.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어야만 하는 소위 사무라이 정신을 고취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일본 통치계급이 그 필요성을 벚꽃에서 찾지 않았을까 싶다. 주군을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런 무사도 정신을 벚꽃에 고착화 시킨 같다.
이러한 사무라이 전통이 2차 세계대전 후반전에, 수세에 밀린 일본군들이 악명 높은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출격시키면서 정점에 달한다. 이때 젊은 여성들을 동원시켜 꽃가지를 흔들며 전송하게 하거나 옷 가지에 꽃을 꽂게 하거나,비행기 날개 등에 그려 넣는 식으로 벚꽃이 등장한다.
젊은 특공대원들이 "아름답게 떨어지는 벚꽃 잎처럼 일왕을 위해서 죽기를 " 바라면서 말이다.
다만 이러한 희생이 고대에는 사무라이들이 주군을 위해서, 근현대에는 일제가 동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면서 사병들을 세뇌하는 데 사용되었을 뿐이다.
일왕을 비롯한 상당수 일본군 고위층과 사회 지도층들은 오히려 전패와 관계없이 천수를 누리면서 살았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저 평범한 꽃 뿐인데 글을 마치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일왕만세를 웨치면서 부나비처럼 죽음에 뛰여 들었다가 지는 꽃처럼 부스러지는 수많은 일본군이 자꾸 오버랩되어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