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함 속에 피던 인정
중국 말에 十年寒窗이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십 년의 차가운 창문”이란 뜻인데, 그 출처가 원나라 말 高明가 쓴 “十年寒窗無人問, 一舉成名天下知”이다. 십 년 동안 찬 바람을 맞으면서 공부할 때는 물어보는 사람이 없더니 과거에 급제하니 천하가 대번에 알아주더라는 뜻이다.
“책 속에 황금으로 만든 집이 있고, 넘치는 양식이 있으며, 얼굴이 옥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떡을 그려줘 천하의 선비들이 열심히 사서오경을 읽게 한 송나라 황제-송진종(宋真宗)의 말과 일맥상통하다. 천년 전 황제가 남긴 말이라 그 진정성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흔한 게 사람인 나라에서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입신양명(立身揚名) 그리고 부귀영화(榮華富貴)의 길이 진짜 공부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멀리는 중동의 왕세자 가까이는 어떤 위대한 혈통을 타고나서 어렸을 때는 부모가 만들어준 왕국에서 왕노릇하는 법을 즐기고 커서는 하버드나 유럽에 있는 명문대 혹은 아시아권의 명문대에 가서 그럴 싸한 명분을 쌓고 돌아와서 만인이 우러러보는 그러한 자리에 우아하게 착석하면 되는 자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0.00001%에 해당되는 자들에 해당되는 일인지라 , 우리 같은 평민들한테는 그림 속에 떡이요 오르지 못할 아니 쳐다봐서도 안될 나무에 해당된다.
여하튼 인구가 많기로 가히 남산의 풀뿌리 그리고 동해에서 펄떡이는 물고기보다 더 많은 인구대국에서 태여 났으니 출세의 길은 첫째도 공부요 둘째도 공부요 셋째도 공부였다.
참 열심히 공부했던 같다.
스님이 부처님 앞에서 묵념하듯이 일심전념하여 묵묵히 공부에 매진하였던 같다. 몸이 한창 자랄 나이다 보니 밥 먹고 일어나면 다시 고플 때였다. 고향에서 학교 다닐 때에는 없는 살림이지만 그래도 항상 어머니가 끓인 구수한 된장찌개와 따스한 밥과 할머니가 가끔 만들어 주신 진지반찬이 이 있었고, 가끔은 아버지가 산속에서 옹노(올가미의 함경도 사투리)로 잡은 짐승고기나 물고기로 생활개선을 할 때도 있었다.
문제는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고중부터는 집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부득이 기숙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필자가 다니던 연변 1중은 연변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조선족애들을 한 자리에 모두어 놓았으니 다들 공부열기가 대단했다. 거기에 학교 측에서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황하장강을 넘어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나가야 할 포부가 있어야 한다”는 등등으로 채찍질했으니 불타는데 기름 붓기식으로 더욱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들 별을 이고 나가 별을 보며 숙소로 들어 올 지경으로 열심히 공부했던 같다. 숙소에서 소등한 후에도 복도에서 책을 보거나 이불 안에서 전등을 켜고 공부할 지경이었다.
열심히 공부에 에너지를 쏟았던 만큼 당연히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는데 학교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으로는 어림없었다. 다행히 기숙사생활을 하는 친구들 대부분 농촌에서 오다 보니, 고향에서 가마치나 미숫가루를 짠지(소금에 절인 야채)나 아주 가끔 소고기절임과 함께 숙소로 보내고 했는데, 그때면 경사가 따로 없었다.
특히 가마치인 경우에는 배가 든든해져서 인기가 많았다. 가마치는 함경도 사투리로 누룽지를 가리킨다.
가미치가 도착하면, 저녁타임에 숙소에서 파티가 이뤄졌다. 대략적으로 간단한 분공이 이뤄졌는데, 보온병 안에 뜨거운 물이 충분히 있는지 체크하고 물이 없거나 식으면 한 두 명이 파견되어 보일러실 옆에 가서 뜨거운 물을 길어 오고; 나머지는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짠지나 장조림 그리고 식당에서 가져온 음식을 올려놓는다.
이후 숙사 전원 8명이 다 도착하면 만찬을 시작했다. 배고팠던 시절이라, 격식 따위는 필요 없었고 그 순간만큼은 다들 묵묵히 먹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초원에서 사슴들이 풀을 뜯듯이 약간은 우아하게 먹었던 같다. 그러나 잠시 후 가마치와 짠지 냄새가 은은히 복도에 퍼지면 옆 방에 있는 친구들이 아니 한 층에 있는 다른 친구들이 그 냄새를 맡고 숟가락을 들고 합세한다. 그때가 되면 준비했던 음식들이 마치 하이에나떼가 휩 쓸고 가듯 , 게눈 감추듯 사라 지군 했다. 먼저 반찬이 거덜 나고 좀 지나면 마대자루 속 가마치들도 금세 드러내군 하였다.
우아하게 멋있게 표현하지 못해서 동창 친구들한테 미안한 감이 없진 않으나, 그만큼 그때는 다들 항상 배고프고 허기졌었고, 또한 네 것 내 것 따로 없이 스스럼없이 지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숙사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군 한다.
지금은 당시 교장선생님의 소원처럼 다들 오호사해(五湖四海)로 헤여져서 열심히 살고 있지만, 가끔 그때가 그립다. 30년이 지났지만 그때 그 시절 친구들의 앳된 그리고 걀핏한 얼굴들이, 이른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여 오르는 가마치 냄새와 함께
글을 쓰다 보니 가마치가 먹고 싶어, 그대로 편의점에 달려가 누룽지를 사다 뜨거운 물에 불궜다. 겉모양은 그대로 인데 아쉽게 기억 속에 그 맛이 없다. 학창 시절 그 맛이 전혀 없다.
그때 부모님들이 우리 자식들한테 가마치를 보내실 때의 따스한 마음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학창 시절 배고픔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인정을 나눴던 동창들이 없어서 인지.
차분히 생각해 보면 분명히 가마치는 가마치고, 누룽지는 누룽지다. 누룽지 속에서 가마치 맛을 찾는 내가 부질 없는 같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산속에서 물을 찾고 물속에서 산을 찾으니 내가 아둔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정을 나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맛이 더욱 그리워질 것이다. 인생의 무상함이 깊어지고 슬픔이 그리움을 메꾸어지면, 그때가 되면 나 역시 누군가의 그리움 속 가마치로 남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