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
글을 쓴다는 것이 힘든 작업인 같다. 쓰려고 하는 글이 머릿속에 맴돌다가 정작 쓰려고 하면 어디서 인가 막혀 버리군 한다.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써내는 과정을 , 누군가는 애를 출산하는 데 비유하기도 한다.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말인 같다.
물론 AI로 문장을 쓰면 힘 안 들이고 몇 분 사이에 몇 천자의 문장도 만들 수는 있다. 실제로 그렇게 논문을 쓰거나 문장을 써서 얼렁뚱땅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AI는 이미 입력한 수많은 데이터에 기반하여 프로그래밍된 로직에 따라 결과를 도출하는 것뿐이고, 사람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점이다.
가령 창작이나 발명까지 AI의 손을 빈다면 인간은 무슨 존재의 의미가 있겠는가?
글쓰기는 어찌 보면 내가 유일하게 AI의 쓰나미 속에서 인간 능력의 무궁무진함을 느끼고, 차디찬 금속덩어리와 반도체로 둘러싼 생활 속에서 조금이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분야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여 힘들 더라도 오로시 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오늘의 감성을 적당히 녹여 내 만의 글을 쓰려고 한다.
지난 편에 이어 고중 때 일을 쓰려고 한다.
1분 1초가 금쪽같이 소중했던 학창 시절이라, 공부를 위해서는 밥 먹던 시간도 아낄 정도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줄일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잠자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다.
그것은 옛날이나 30년 전이나 지금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과거(過去)에는 과거(科舉) 시험에서 급제하기 위하여 별의별 신박한 수를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졸음이 올 때마다 송곳으로 찔러가면 열심히 공부한 소진(蘇秦)과 대들보에 머리카락을 묶어 공부에 정진(精進)한 손경(孫敬)이 있다면,
이씨조선시대 조식(曹植)은 칼을 차고 다니면서 조용한 방에서 공부에 맹진하다가 잠이나 기타 잡생각에 마음이 흐트려 질까봐 칼로 턱을 고이면서 마음을 다 잡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러한 훌륭한 본보기들이 있고, 또한 거기에 송진종(宋真宗)에 버금갈 정도로 독서만용론(讀書萬用論)을 펼치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여자를 만나 좋은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들의 기대와 은사(恩師)님들의 변함없는 채찍질이 있었으니 불량배나 후레자식이 아닌 이상 공부를 안 할 래야 안 할 수 없었다.
결국 고중 3년간 우리들은 공부를 하거나 공부를 하러 가는 길에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였던 같다. 식사 시간을 줄이고 잠자는 시간도 최대한 줄여 공부했다.
숙소 취침시간이 10시 30분이라 때가 되면 교실과 숙소 등은 소등을 했는데 다만 교정 내 가로등과 복도만은 등을 켰다. 하여 그 시간이 지나면 가로등과 복도에서 열독 하는 풍경이 매일 재연되군 하였다.
가로등 밑에서 책을 외우는 동창들이 꽤나 있었는데, 들릴 듯 말 듯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책 읽는 소리와 가로등 불빛 따라 길게 늘어선 그림자가 어둠과 함께 교정의 풍경화를 만들었다.
그러다 소등 알람소리가 나면 교감선생님의 숙소 복귀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교정에 울려 퍼지군 하였다.
혹자 시간을 망각하여 제시간에 복귀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한 두 번은 교감선생이 문을 열어 주었으나, 그런 일이 잦다 보니 후에 대문을 굳게 닫았다 부득불 다들 창문을 열고 뛰여 넘어가기도 하였다.
후에 안전을 위하여 1층 창문 안에 도난방지틀을 설치하는 바람에, 부득이 2층으로 톺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올라갈 때 어떻게 올라 가나 혹시나 올라가다가 떨어 지지나 않을지 걱정도 앞섰지만, 담도 크고 신체조건이 좋은 학우들이 먼저 올라가고 그 뒤를 따라 한 사람씩 천천히 올라갔었다. 위에서 당겨주고 아래서 손이나 어깨로 밭쳐주는 협동심을 발휘하여 다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올라갔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 올라가는 만큼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후들후들 떨리고 한편으로는 교감선생한테 들키지 않을까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던 같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고 또한 숙련도 되고 하여, 고중을 졸업할 즘에는 도마뱀이 벽을 타 듯 날렵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고중 3년 동안 벽 타기 초수에서 고수가 된 것이다.
물론 누구나 다 벽을 탈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학생들인 경우에는 괜히 벽 타기를 했다가 요조숙녀의 이미지가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고 말이다. 다행히 여자숙소 1층 복도 창문 하나가 항상 열수 있다는 풍문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누군가가 여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교감선생님이 꼼꼼하기로 소문이 나서, 누군가가 숙소 안에서 담배 피우거나 하면 무조건 찾아내기로 유명해서 동기들이 뒤에서 “셰퍼드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 분이 창문 하나를 빼놓을 수는 없을 같고, 아마 밖에서 늦게 까지 공부하는 여학생들을 배려해서 그런 “구멍”을 만들어 놓지 않았나 싶다.
가로등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보다는 아무래도 숙소 복도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밖에서 공부하기에는 여름에는 항상 모기가 몰려와 괴롭혔고 겨울에는 너무 춥다 보니.
때가 되면 복도의 백열등 아래에서 동기들이 옹기종기 줄을 서서 책을 읽었다. 밤이 깊도록 식을 줄 모르는 그런 열기가 결국 우리 학교가 북경대 청화대 입학생들을 줄줄이 배출하는 그런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외 이불 안에서 손전지를 켜고 공부하는 학생도 거의 방마다 한 둘은 있었던 같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궁금해할 같다. 필자는 어떻게 공부했을 까?
이것을 풀려면 두 사람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한 사람은 저녁 자습시간이 끝나면 나와 함께 1중 서문에서 왕청면을 먹던 친구이다. 연변 1중을 다닐 때 공부도 공부지만 각종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단체 봉사의식이 투철했던 관계로 그 친구와 나는 2학년 때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운동을 좋아하는 나는 체육위원, 대신 공부를 잘했던 친구는 학습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친분을 쌓게 된다.
당시 학생회 사무실 겸 공천단서기 사무실로 쓰이는 방이 학교 본 건물 3층 끝에 있었는데 번호가 301호실인가 되었다. 바로 윗학년 선배가 여유시간에 그 사무실에서 자습하는 것을 보고, 당시 단서기(團書記)인 황선생님한테 부탁하여 3학년에 올라가면 자습실로 쓰기로 하였다. 후에 다른 동기들도 비슷한 부탁을 했었지만, 미리 선수를 친 덕분에 나만의 자습실을 확보하게 되고 거기에 친구가 합류하게 된다.
대학입시시험까지 1년간 그곳에서 참 잊지 못할 순간들을 보냈던 같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301호 실에서 둘이 공부했는데, 나는 문과고 친구는 이과라 경쟁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교실과 달리 조용한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의 간섭 없이 자기 리듬대로 올곧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같다.
그때 순간들을 돌아보면 긍정적인 에너지도 많았지만 쏠쏠한 재미도 있었다.
1995년에 적후무공대(敵後武工隊)로 유명한 항일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생각하면 나의 고중 3학년 학습생활이 그러했던 같다.
잠복(潛伏):저녁 자습시간이 끝나기 전에 왕청면을 먹고, 301호로 조용히 돌아와서 학교 본 건물 소등시간이 되면 책상에 엎드려 30분 정도 붙인다. 본 건물이 소등하면 경비아저씨가 전체건물을 순찰하는데 그 시간이 30여분 좌우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복도에 경비아저씨의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유난하게 크게 들린다.
심야열독(深夜夜讀): 경비아저씨의 발걸음소리가 멀어지면 벌떡 일어나 우선 커튼(窗帘)을 쳐서 빛이 새 나가는 것을 방지한다. 본 건물 순찰이 끝나면 교정 밖도 순찰하기 때문이다.
커튼을 친 후 휴대용 조명등을 켜고 공부에 들어간다. 배터리가 거의 소진되면 빛이 미약해지는데, 그때면 다른 휴대용 조명등을 켜고 공부한다. 2개 정도면 4시간에서 5시간 정도 공부할 수 있다.
잠이 천천히 몰려오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하고 돌아와 계속 공부를 이어 갔다.
쪽잠: 조금씩 몰려오던 잠이 쓰나미가 되면, 쪽잠이래도 자야 한다. 처음에는 책상에 엎드려 잤으나, 이튿날이면 얼굴이 뭉개지고 수면 품질도 좋지 않아서 한 명은 책상 위에서 다른 한 명은 교실에서 의자 8개를 옮겨와서 그 위에서 잠을 청했다. 이때 교과서를 베개로, 자부도(座布団 = ざぶとん, 방석을 가리키는 일본어 )를 이불로 삼아 잤다.
이튿날 다시 원상복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의자와 자부도는 최대한 같은 교실에서 가져왔다. 일단 의자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 통일로 배치한 거라 큰 문제가 없었지만 자부도는 각자 집에서 만들어 온 것이라 재질이나 색상 모양이 각양각색이었고 또한 여학생들이 주로 쓰는 것이라서 제 자리로 복귀시키는 것이 싶지 않았다.
하여 이튿날에 여학생들이 자부도 때문에 티각태각하는 일도 일어났다고 한다.
거의 1년 동안 3층의 자부도를 돌려가면서 하루에 3~4시간 쪽잠을 자면서 공부했다.
보통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노력해야 한다. 노력이라도 하면 성공이 가능하지만, 노력을 안 하면 성공이 절대 불가능하다. 비 바람 없이 무지개를 볼 수 없듯이.
밤늦게 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한 덕분에 다들 성적이 올라갔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었으니 바로 코피다. 체력을 소진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다 보니 피로가 점차 쌓이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누적되면 혈관이 수축하면서 혈압이 높아질 수 있고, 이것이 코의 혈관에 영향을 미쳐 코피가 난다.
나도 코피를 흘렸고, 친구도 코피를 흘렸고
주변의 동창들도 코피를 흘리다 보니 코피가 우리 동기들이 한 두번씩 지어는 자주 겪는 일상사가 되었다.
코피에 대한 강열한 인상이, 95년에 발행된 편승엽의 <찬찬찬>과 결합하였다. 찬찬찬의 노래 후렴 부분을 개사하였다. “쓸쓸히 창밖을 보니 주르륵주르륵 밤새워 내리는 빗물”에서 빗물을 코피로 개사하였는데, 우리 동창들의 강열한 공감을 얻어, 다들 술이 거나하면 꼭 함께 부리는 노래 중 하나로 되었다.대학에 올라가서 말이다.
지금도 간혹 노래방에서 찬찬찬을 띄우면, “밤새워 내리는 코피”가 생각난다. 이미 3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쭉 기억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시대에 따라서 요구되는 인재상(人才像)이 달라질 수 있다.
노예시대에는 노예에 속하면 소나 말보다도 못한 짐승 취급도 받았으니 아예 인재상이나 성공을 운운하는 것이 어불상설이고,
근현대에 와서도 여자는 재능이 없어야 덕이 있다는 황당한 이론이나, 크레르 루주(紅色高棉)이나 유태인 하레디파처럼 아예 현대문명과 담을 쌓아놓고 도시와 현대지식을 배척한 채로 지식인과 과학기술 등을 쓰레기로 인지하여 없애거나 배타하려고 한 극단적인 부류들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사례들을 빼놓고,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대부분 상황에서는 학문을 숭배하였고 학자를 존경하였다. 하여 옛날에는 과거시험이 있었고, 현대에 와서는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는 교육시스템이 자리 잡게 된 같다.
교육시스템을 통해서 인재를 양성하고 인재를 선발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사람이 많다 보니 시험이라는 여과기를 통해서 인재여부를 그리고 향후 발전가능성을 평가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때 각종 시험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 보니, 딸내미 세대에는 각자의 흥취와 재능에 따라 훨훨 날게 하고 싶지 만은, 현실은 학생은 많고 좋은 학교는 적고 게다가 요즘은 전반적으로 경제도 안 좋은데다가 AI까지 가세해 사람들과 일자리 경쟁을 하고 있다.
엎친데에 덮친 겪에 거의 빠져 나오니 또한 상어가 앞을 막은 꼴이다.
30년 전에 흘렸던 너와 내가 흘렸던 코피가, 우리 자식들한테까지 전해 지는 건인가. 참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