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상징 및 종교적 상징으로서의 양
살다 보면 가끔 맥주가 당길 때가 있다.
일 때문에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점차 지쳐가고 찌그러져서 잠시나마 휴식이 필요할 때;
누군가가 그리워서 마음 어느 구석이 쓸쓸하고 허전할 때;
달리기를 한두 시간 정도 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어 시원하게 추기고 싶을 때;
잔잔하게 줄창 내리는 비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질 때....
여하튼 수많은 이유로 우리는 술을, 내 같은 경우는 특히 맥주를 찾고 있다. 고량주는 너무 쉽게 그리고 빨리 취하고 만취하기 쉽지만, 대신 맥주는 포만감이 일찍 찾아오고 깊게 취하기 전에 정신줄을 정확히 잡을 수 있어서다.
맥주가 생각날 때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음식이 땅콩과 양꼬치다. 땅콩은 혼자서 조용히 마시고 싶을 때, 양꼬치는 친한 사람과 희로애락을 나누면서 마시고 싶을 때다. 어렸을 때는 먹고 싶은 음식이 하도 많아서 마실 것이 그때그때 달랐지만 지금에는 음식에 대한 욕심이 점점 사라지고 술 역시 맥주 고량주 막걸리 양주를 돌고 돌다가 맥주로 안착되었다.
어찌 보면 인생도, 그리움도 맥주 역시 돌고 도는 같다. 맥주 안주도 마찬가지인 같다. 고중 때 양꼬치로 시작한 나의 술의 역사가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양꼬치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음주의 그 시작과 끝을 장식한 그리고 인생을 관통(貫通)한 양꼬치를 기념하여 본 글을 남긴다.
글이 길어지니 중국 문화권에서 만연한 양문화 및 양과 관련된 에세이들을 1부에 담고, 실제 양꼬치에 대한 얘기들을 2부에 담기로 한다.
양꼬치를 말하기에 앞서 양(羊)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양은 본성이 온순한 동물로 태어날 때부터 은혜를 알아 어미의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굻고 공경의 마음을 표한다고 한다. 하여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양을 아름다움-미(美)의 상징, 상(祥) 서로움의 상징, 선(善)량함의 상징, 의(義) 로움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 황제 주첨기(朱瞻基)가 그린 삼양개태도(三陽開泰圖).
대나무와 동백나무 아래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흰색 어미양과 두 마리 새끼양을 그렸다. 한자에서 羊과 陽은 음이 같으며, 참대 죽(竹)과 축하할 축(祝)은 음이 같다. 이외 어미양은 비록 등부분이 검은 털로 덮혀지만 하얀 털이 위주이고 새끼 양들은 반대로 몸뚱이는 검은 털이나 발과 머리 부분이 하얀 털이다. 삼양개태도는 봄과 겨울이 바뀌는 새해 벽두에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기를 축복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외 이태백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양을 칭송하는 시와 문장을 남겼다. 아마 남송 말기 재상인 문천상(文天祥)의 시가 그 정점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咏羊
宋 · 文天祥
长髯主簿有佳名,羵首柔毛似雪明。
牵引驾车如卫玠,叱教起石羡初平。
出都不失成君义,跪乳能知报母情。
千载匈奴多牧养,坚持苦节汉苏卿。
우리말로 번역하면,
양을 노래하네.
구레나룻을 가진 주부가 훌륭한 명성이 있으니,
머리에 난 털은 눈보다 더욱 하얗게 빛나고;
수레를 끄는 모습이 위개(卫玠:중국 고대 4대 미남)처럼 아름답고;
주문을 외우고 돌을 일으키는 재주가 초평(黃初平: 중국 위진시대 신선)을 연상켜하네;
도성을 나와도 군자의 도의를 잃지 않고,;
엎드려 젖을 먹으니 에미의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아네;
천년이나 흉노에서 키워졌으나;
굳은 절개 계속 지켜 나가니, 한나라 소무(蘇武)가 따로 없네.
문천상은 양(羊)을 빌어 고상한 품덕과 견정불이한 정신에 대한 존경심과 찬양함을 표현하였다.
양은 또한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동물로 정결된 장소에서 자고 목이 바르면 샘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풀을 뜯어먹는다.
양의 이러한 습성이 기존에 각인된 이미지와 결합되어 양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제사상에 꼭 필요한 동물로 떠오른 것이다.
과거 노예시대 그리고 일부는 봉건시대에까지 노예나 포로 지어는 처첩이나 대신들을 제물로 받치는 것이 한동안 성행하였다. 노예주나 봉건주의 입장에서는 자기 가족을 빼고는 사람의 가치가 애완용 강아지나 고양이보다 한참 못할 지경이니, 아무런 주저 없이 전혀 거리낌이 없이 사람을 생매장하고 목을 베서 제단에 올렸다. 이런 행위는 고금중외 동서방 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일이다. 중국의 하나라 상나라 때 엄청 유행하였다.
멜깁슨이 감독을 맡아 유명해진 아포칼립토(2006년) , 태양신에게 노예를 제물로 받치는 장면
이렇게 제물로 씌이는 사람을 인생(人牲)이라 하여 가축과 동일시하였다. 人牲은 순장(殉葬)과 마찬가지로 잔인무도하였다. 그 차이는 人牲은 죽은 조상들이 이승에서 잡숴라고 제물로 올리는 것이며, 殉葬은 황제나 제후 등 권력자들이 생전의 영광을 사후의 세계에서 그대로 향수하기 위하여 자기가 쓰던 보물들과 처첩들 그리고 하인들 등등 생매장하거나 죽여서 함께 무덤에 매장하는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오나라 국왕 부차의 아비 합려(闔閭)는 사랑하는 딸이 자살하자 장례식 당일에 화려한 백학을 흔들어 수천수만 명의 백성들을 묘지로 유인하여 생매장시켰다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전통이 현대에 와서 추석 전야에 종이로 만든 의사, 아가씨, 비아그라 등 기상천외한 물건들을 불태워 지하에 있는 선조들이 저승생활을 즐기도록 하는 풍속습관으로도 이어진다.
종이로 만든 미녀, 하인 그리고 별장 등(사진 출처: 中國新聞網)
물론 고대 최고권력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처럼 치부하면서, 권력의 당위성은 하늘이나 신에서 온다고 포장하면서, 신명이나 신령들한테 대한 제사도 성대하게 진행하였는데 이때도 초기에는 人牲을 위주로 쓰다가 점차 가축으로 대체하게 된다.
그 과정을 보면 초기에는 청장년 남성을 많이 쓰다가 점차 여성과 애기로 대체하고 그 후로는 동물로 사람을 대체한다. 최고통치자가 측은지심이 생겨서 그런 거 아니고, 생산력이 결핍한 시대에 남성의 생산능력이 여성보다 높았고 사람의 생산능력이 동물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으로 동물이 사람을 대체하고, 양이 소를 비롯한 기타 가축들을 대체하게 된다. 소(牛)인 경우, 당시 농업생산과 운송에 꼭 필요한 수단이고; 돼지는 더럽고 난잡한 이미지 여서다. 물론 개도 사후의 세계에서 주인을 지켜 줄 동물로 간주되어 제단에 오르기도 했으나 양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런 추세는 제기(祭器)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제단에 올라가는 술잔 이외 양고기를 비롯한 음식들을 담는 그릇 등에도 양문양을 넣거나 모양을 넣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더했다.
중국 10대 국보로 선정된 사양방존(四羊方尊)
<사양방존> 상단부에는 4마리의 용 문양 도철문이 4면으로 새겨져 있고 양의 머리로 이어지는 몸체는 용 비늘모양이 겹쳐진 수린문으로 합성되었다. 양의 몸체에 해당하는 중단부는 천둥구름무늬로 새겨진 봉황이 묘사되었고 양의 다리에 해당하는 하단부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봉황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엄격한 균형감과 조화로움, 정중한 형식으로 표현되었고 동물신앙을 나타내는 양과 용, 봉황을 주요 문양을 이루고 기하학적인 문양, 자연을 표현하는 문양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신비스러움과 공포감, 권위감, 경외감을 고양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양방존>은 조상신 의례에 제사용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자성어에 양두구육이라고 있다. 중국어 掛羊頭賣狗肉에서 왔는데, 우리말로 양의 머리를 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의미이다. 그 출처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국왕-제영공(齊靈公)이 취향이 독특해서 남장을 한 여자를 좋아했는데, 그 풍습이 궁중에서 민간으로 전파되자 그 꼴이 보기 싫다고 금지시켰다. 하지만 그 풍기가 계속 암암리에 유행되자 당시 재상이었던 안영(晏嬰)에게 그 해결방법을 물으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궁중에서 남장을 허락하고 궁밖에서 금지시키니 이는 소대가리를 걸고 말고기를 파는 격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신하의 입장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국왕을 비평하기에는 부담되니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세에 와서 소와 말이, 양과 개고기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양두구육이 현재는 겉은 좋은 것처럼 보이나 실속은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하는 말로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양고기가 비싸고 개고기가 싸다는 인식이 바탕되어 있다.
실제 양고기가 개고기보다 비쌀까? 물론 한국 같은 경우 양을 관상이나 관광용으로 소규모로 기르니 당연히 양고기가 개고기보다 비싸겠지만, 중국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고대나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중국에서 개는 애완용 혹은 집 지키기로 기르는 방면 양은 대규모로 사육되었다. 개는 식용으로 키우기에는 돼지나 양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참고로 2016년에 양고기 생산량이 459만 톤(이에 대비해 개고기는 2016년 중국에서 1500만 마리 , 생산량이 30만 톤 좌우로 예상된다. 당시 생산량에서 거의 15배 정도 차이가 있다.
최근에 와서 중국에서도 경제가 중진국 수준에 도달하고 의식주문제가 해결되고 또 애완동물산업이 발달하면서 개가 식용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고 그 자리를 양과 돼지가 채우고 있다.
이 정도면 양두구육(羊頭狗肉)이 아니라 구두양육(狗頭羊肉)이 더 어울리는 게 맞지 않을까?
양이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하게 된다.
출정식에서 양을 제물로 올리면서 장병들이 승리하고 무사귀환할 것을 기원하였고,
승전고를 울리면서 돌아오면 양과 소를 잡아 그 노고공고(勞苦功高)를 치하하였다.
이때 포로가 빠질 수 없는데, 포로의 목을 잘라 제물로 올리거나 혹은 견양례(牽羊禮)를 진행하였다.
견양례(牽羊禮)라는 것은 투항의식에서 포로들에게 양털옷을 걸치되 위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목에 밧줄을 묶어 짐승처럼 네 발로 질질 끌고 가는 것을 가리킨다.
육탄견양(肉袒牽羊)이라고도 하는데 그 과정이 매우 굴욕적이어서 포로들이 그 수모를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견양례의 역사는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무왕(周武王)이 상(商) 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폭군이었던 걸왕(紂王)을 토벌하여 상나라가 멸망하자, 걸왕의 형 미자(微子)는 손에 제기(祭器)를 받들어 들고 군문(軍門)에 나와 상의를 벗고 포박을 한채 수하를 시켜 왼쪽에서 양을 끌고 오른쪽에서 띠(茅)를 들게 하고 스스로 무릎으로 주무왕의 앞까지 기여 가니, 주무왕이 그를 가엾이 여겨 살려 둔다.
당시 祭器는 후세의 옥세처럼 왕권과 국토를 상징하였는 바 그것을 받침으로 상나라의 모든 관원과 백성들이 주나라에 굴복함을 표시하고, 이것으로 성의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육탄견양(肉袒牽羊)을 자행한 것이다. 당시 제후나 신하들이 황제에게 공물(貢品)을 올릴 때 띠에 둘려 올렸는바 양을 끌고 간 것은 미자 자신 역시 공물이며 앞으로 온순한 양처럼 주무왕의 노예로 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견양례의 정점은 송나라 때 발생한다. 송나라 때 송휘종(宋徽宗) 역사에 길이길이 남길 업적을 남겼다. 통치능력은 빵점, 예술능력은 백점 만점에 이백 점짜리 조예(造詣)를 보여 주었는데 서법과 회화에서 천고에 남을 명작들을 남겼다. 다른 하나는 부패무능에 사치함에 극에 달했는데,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송의 혼란한 틈을 타서 쳐들어 와서 중국 역사상 악명 높은 정강지변(靖康之變,1126년~1127년)이 발생하고 아들 송흠종(宋欽宗)과 함께 잡혀가게 된다. 이때 두 명의 황후와 수많은 비빈 그리고 비빈 딸들을 포함한 황족, 대신과 기술자 1만 4000명, 일반 백성 10만 명 이상이 잡혀가게 된다. 금나라 수도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노예 및 금나라 군대의 성노리개로 전락한다.
금나라 군대의 능욕을 당하고 있는 송나라 여성들. 출처: SINA.COM
1128년 8월 24일, 금의 수도 상경(上京,현재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도착한 후 태묘(太廟)에서 견양례를 진행하였는데, 송휘종과 송흠종 그리고 2명의 황후, 30여 명의 황자, 천여 명의 비빈과 내시들이 태묘에 끌려가서 육탄견양(肉袒牽羊)을 당한다. 송휘종과 송흠종은 겉옷을 벗게 하고 나머지는 전부 상의를 벗게 하고, 양가죽을 두르고, 두 손에 양털바줄로 포박한다. 두 황제는 각자 한 마리의 양을 끌고 대전아래까지 간 다음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대전보좌 위에서 지켜보던 금태종(金太宗)은 손수 두 마리 양을 죽여 조상에게 바쳐 제를 지냈다.
이 식이 끝난 후 황후와 공주 및 비빈들은 목욕재계를 하게 하고 전부 금태종의 침전으로 보내졌다.
이후 그 능욕을 참지 못한 송흠종의 황후-주황후는 목을 매어 스스로 죽으려 하다가 실패하자 다시 호수에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한다.
기타 공주와 비빈들을 금나라 황제가 직접 신하들에게 하사하고, 자색이 뛰어난 궁녀들은 군의 성노리개로 보내지였으면 수수하게 생긴 궁녀들은 금나라 귀족들의 노예로 전락되었다.
송휘종의 비빈이자 송흠종의 생모인 위귀비(韋貴妃)가 가장 비참했는데, 그 아들 조구(趙構, 송흠종의 동생)가 남송의 황제로 올라 금나라에 대항하자, 괘씸죄에 걸려 하루에 105명한테 강간당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굴욕이 100년이 지난 후 복수로 이어진다. 1232년 몽골과 남송 연합군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하고, 대규모의 보복이 이뤄진다. 금나라 인구가 700만 명이였는데 무차별한 보복에 의해 인구가 10만 명으로 줄어들고, 금나라 황족들에 대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보복이 이뤄져 금나라 마지막 황후를 윤간하고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고 복사본을 만들어 전국에서 열람하기까지 했다 한다.
양문화의 이면에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이 슬픈 일이다.
통치자가 무능하면 백성들이 고생하게 되고 남자가 무능하면 여자가 고생하게 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에나 여전한 같다.
옛날에는 황제 아비가 황제 아들을 직접 정하는 식이라, 별의별 미친놈들이 황제로 등극하여 나라를 말아먹는 일이 비일비재였다면; 지금에는 국민이 직접 통치자를 선거하거나 형식적인 모양새를 갖춰 서라도 통치자를 선발하니 많이 개선된 걸로 보아야 하겠다. 능력 있고 백성을 아끼면서, 복잡한 세계 정치구도에서 나라와 민족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유능한 통치자를 선발할 확률이 과거보다는 많이 높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월 3일 한국의 대통령선거 결과가 한 반도의 밝은 미래로 이어지기를 미리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