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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때 이야기-양꼬치(2)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양꼬치

by 백검

지난 편에 양문화와 종교적 군사적 행사에서 제물로서 양에 대한 풀어 보았다. 오늘은 이어서 양식(糧食)으로서의 양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예로부터 양고기는 추위를 이겨내고 면역력을 높이며 보신(補身)하는 것때문에 겨울이나 환절기에 꼭 먹어야 할 음식으로 간주 되었다. 이외 감기와 기침, 그리고 만성기관지염과 신장허약과 발기부전 및 수술이나 산후에 몸의 원기를 회복하는 등등 효과가 좋다고 알려 져 있다.


다만 양고기 특유의 누린 냄새때문에 호불호가 선명하게 엇갈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 누린 내는 양이 성체양으로 성장하면서 지방질에 카프릴산과 펠라르곤산이 축적되면서 풍기는 냄새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양고기의 특성때문에, 중국에서는 누린내를 없애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발전되어 왔다.


안사지란(安史之亂)때 발명된 양고기 떡국-양육포모(羊肉泡饃)

중국의 요리 가운데 황제와 관련된 것이 많다. 중국 시안을 대표하는 음식인 양육포모가 그 중의 하나이다. 양육포모은 당나라 7번째 황제였던 당현종 이융기(685-762)과 관련 있다. 당나라는 당시 70여개 국가와 우호적인 거래를 했을 만큼 개방한 국가 였는데, 남녀관계에서도 상당한 개방적 이였다. 이융기는 황제가 된후 초기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국정을 살피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국사대사에는 관심이 멀어지고 여자를 가까이 하고 밝히게 되는데, 이때 열여덟번재 아들의 마누라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주저없이 빼앗아 후궁으로 삼는데. 이것이 양귀비(본명 楊玉環, 중국 역사상 4대미인중 하나)이다.


60살의 영감탱이와 25살의 새파란 여자의 만남이 낭만보다는 불륜에 더 가까왔고, 그 불륜이 거대한 제국이 기울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한 틈을 타서, 양씨네 가족과 양자 안록산의 권력다툼이 발생하다가 쿠데타로 이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안사지란(安史之亂)이다.


안사지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주변에서 군대파견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때 아랍에서 온 군대가 장안에 주둔하게 된다. 이들이 들고 다니는 전투식량이 면으로 구워 만든 퉈퉈모(饦饦馍)였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면 굳어져서 먹기에 불편했다. 하여 양고기 국물에 넣어 먹었는데 이것이 양육포모가 나오게 된 시초다.


양육포모는 양고기와 양뼈를 함께 넣고 오래동안 삶은 국물에 버섯과 다양한 야채와 적정량의 당면을 넣어 좀더 끓이고, 퉈퉈모(饦饦馍 )를 잘게 찢어 넣은 것이다. 여기에 밑반찬으로 절인 마늘쪽과 고추장을 곁들여 먹으면 느끼함을 잡고 맛을 더 풍부하게 한다. 물론 여기에 파나 고수를 적당히 넣으면 금상첨화다.



쿠빌라이시대 행군(行軍) 중 발명된 양고기 샤브샤브

양고기를 조리하는 또 한가지 방법은 성체양에서 지방이 적은 부위를 선택하거나, 지방을 제거하여 요리하여 최대한 누린 내를 없애는 방법이다.

베이징에 가면 동래순(東來順)이라는 유명한 양고기 샤브샤브 체인점이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양고기가 내몽골지역에서 사육하는 꼬리긴면양이다. 2~3년 되는 거세한 수컷양 혹은 새끼를 한번 낳은적 있는 암컷양의 뒤다리살이나 사육한지 1년 미만되는 어린양(Lamb)의 고기를 사용한다. 뒤다리살은 양고기 몸에서 상대적으로 지방이 적은 부위이고, 1년 미만되는 어린양은 누린내가 적어 일반 사람들이 먹기 편한다.

출처: 동래순 양고기 샤브샤브 4인 세트, 인터넷


양고기 샤브샤브는 쿠빌라이 칸(1215~1294, 칭키스칸의 손자)의 수하에 있던 장군 요리사가 긴급상황에서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행군 도중에 식사문제를 해결해야 되었고 또 겨울 이라 날씨도 춥기도 해서, 행군가마에 물을 끓이고 거기에 양고기를 얇게 저며서 빨리 익힌 다음에 소스에 찍어 먹었다. 빠르고 신속하게 식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런대로 맛도 제법 괜찮아서 후에 쿠빌라이 칸의 인정을 받아 전군에 보급되었는데, 이 방식이 점차 북방지역에서 퍼지고 소스도 부단히 발전해 오면서 현재 참깨를 기반으로 한 DIY식 소스로 변화해 왔다.


유목민들이 양을 통째로 굽다

물론 양고기를 삶아 먹는 것보다 더 일찍이 시작된 것이 구워먹는 방식이다. 삶아 먹기에는 물과 고기를 함께 담아서 끓일 도자기와 같은 용기 그리고 불이 무조건 필요했고, 구워먹는 방식에서는 용기가 필요없고 양고기와 불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여 양고기 요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양고기 구이이다. 양고기 통구이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이 몽골과 신강이다. 신강에서는 원래 땅을 1미터 정도 파고, 양을 벽에 걸고 땔감을 넣은 후 덮개로 막은 후 굽는 방식이다.


이렇게 구우면 양의 지방이 녹아 흘러내리고 껍질이 바삭바삭해 져서 누린내가 줄어들고 식감도 좋아지면 고소한 맛도 증가하는 일석 삼조의 효과가 있다. 어찌보면 우리가 삼겹살을 철판에 놓고 구워서 지방을 줄이는 것과 비슷한 도리이다.


한나라때 요리기술의 발전과 꼬치구이의 출현

고대 신강이나 몽골에서 양고기를 묵직하게 요리하는 데 비해,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7국을 통일하면서 다양한 민족문화의 융합이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볶음(炒), 찌기(蒸), 튀기기(炸), 삶기(煮), 졸이기(燒),훈제(熏), 전(煎), 구이(烤)등 다양한 요리방법이 더욱 정밀하게 발전되었다.


여기서 구이 요리는 고기를 다 잘게 하여 서 양념이 더 잘 배이고 더 골고루 구워지도록 진화 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발달한 청동기나 철기 가공기술이 바탕이 되었다.


산동 한(漢)나라 고대무덤에서 고기꼬치 굽는 장면


중국 호남성 장사(湖南省長沙)에서 마왕퇴(馬王堆) 한나라 무덤에서 발견한 꼬치구이


마욍퇴 고 무덤은 한나라 제후국이였던 장사국(長沙國)의 재상-이창(利蒼)의 가족 무덤이다. 보존이 잘 된 여자시체(利蒼의 안해)와 함께 3000여 품의 한나라 문물이 발굴되어, 한나라 초기 제도 문화 생활습관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쯤 되면 역시 일부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당시 어떤 고기를 꼬치방식으로 구웠을 까?

마왕퇴 1호 무덤에서 발견된 유책(遺冊,매장한 물건을 리스트로 정리한 책자)에 의하면 소고기, 개고기, 돼지고기, 사슴고기, 닭고기 등으로 꼬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양고기 만은 빠져 있다.


아마 무덤주인이 생전에 양고기를 즐겨 먹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양고기 자체 특유의 누린내가 당시 중원 사람들한테는 많이 부담 되었을 것이다. 누린내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양고기 섭취가, 네발 달린 물건중에 책상와 걸상만 빼고 다 먹는다는 중국사람들한테도 쉽지 않았다.


쿠민(孜然)의 출현

이 고민을 해결해준 것이 쿠민(孜然,Cumunm cyminum L.)의 출현이다. 양고기 섭취는 쿠민의 발견 전후로 분리 된다. 마치 김치에 고추가루가 들어가기 전과 후로 나눌 듯이 말이다.


쿠민과 양고기의 조합은 찰떡 궁합이였다. 우선 쿠민에 함유된 Cuminaldehyde성분은 양고기의 누린내를 혁기적으로 없애고 고기의 맛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다만 쿠민표면의 온도를 높혀 그 유효성분을 활성하는 것이 필요 했는데 꼬치구이가 이 조건을 제대로 맞춘 것이다.


쿠민은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역이 원산지로 기원전 2000년 전 시리아유적에서 쿠민 종자가 출토된 것으로 미뤄보아 그때 상술한 지역에서 쿠민을 재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크로드를 통한 꼬치 기술과 양고기의 결합, 그리고 쿠민

고대 동방과 서방을 잇는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 화약이 넘어가서 유럽 중세기의 전쟁국면을 바꿔놓았으며, 인쇄술과 제지술은 유럽의 종교와 교육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지남침은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이외 중국의 비단 도자기와 차 등이 유럽에 가서 각국 황족과 귀족들의 생활방식을 바꿔놓았다.


반대로 서방에서는 불교와 이슬람교 및 기독교와 천주교 등 사상들이 동방으로 전파되었다. 이외에도 지중해와 아프리카. 인도와 서아시아 등지에서 각종 농작물들과 조미료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동방 각국에 전파되어 농업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포도, 석류. 완두, 참깨, 오이, 마늘, 고수, 고추, 홍당무우, 부추, 면화, 수박 등등.

쿠민도 실크로드를 통해 천년 전에 신강지역에 전파되었고, 신강과 감숙 등지에서 본격적인 재배가 시작되었다.


음식요리방법도 동서방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이때 꼬치구이가 금속가공기술과 도자기기술과 함께 서역에 전파되고 서역에서 재배하던 쿠민 및 쿠민을 통한 양고기 요리법이 중국 내에 전파되었다.



천신만고를 거쳐, 중국 당대의 국민요리 양꼬치가 탄생한 것이다.

이태리 속담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 듯이,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양꼬치로 대동단결 된다.

양꼬치 한번으로 풀지 못하는 일들은, 양꼬치 두번으로 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양꼬치 관련 해서 원래 두 편으로 나눠 쓰려고 했는데, 결국 한 편이 더 쪼개졌다.

글을 쓰면서 자료를 정리하면서 많은 것을 알아 가게 되고, 한 편으로는 거기에 몰두한 시간과 정력이 아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꼭 독자들에게도 전달해 주고 싶은 욕심에 양꼬치 관련 나의 생각들을 다음편에 나눠 더 담아 보려고 한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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