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꼬치의 보급과 맥주 그리고 마늘
8신에게 바치던 제물에서 왕과 귀족들이 먹던 음식으로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마침내 서민들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쳤다.
유목민이 몰고 온 양고기 보급화 그리고 평민화
중국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육축(六畜, 말소양돼지개닭)이라고 하면, 육축 관련해서는 한나라 때부터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예기·왕제》( 礼记·王制, 왕 관련 제도규범)에서 제후(諸侯, 왕)는 제삿날이 아니면 소를 잡아서는 안되며, 대부(大夫, 정1품에서 종4품)는 제삿날이 아니면 양을 잡아서 안되고, 사(士,정5품에서 종9품까지)는 제삿날이 아니면 개와 돼지를 잡아서는 안되며, 서민(庶人)은 제삿날이 아니면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을 어겼을 시 최고로 사형까지 처할 정도로 엄격했다.
말은 군사용 도구로 소는 생산용 도구로 인지되던 고대에 양고기는 왕 정도는 되어야 만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소중한 음식이었다. 농경사회에서는 고기 류보다 그런 양꼬치가 보급화 되기까지 축산기술의 발전도 중요했지만, 다른 한편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융합과도 관련 있다.
한족이 아닌 기타 민족이 통치자로 등극한 오호십육국( 五胡十六國,304~439),선비족이 북방을 통치한 남북조(南北朝,420~589), 거단족이 북방을 통치한 요나라(遼朝,916~1218), 여진족이 통치한 금나라(金朝, 1115~1234), 몽골족이 통치한 몽골제국 및 원나라(1206~1402), 여진족이 통치한 후금 및 청나라(1616~1912) 등 시대에 유목민족이 통치민족으로 등극하면서 목축 면적이 대폭으로 늘어나고, 기병에 필요한 말과 유목민의 주요 식품인 양의 사양면적과 수량이 상응하게 늘어나게 된다.
독수리를 사냥하는 칭기즈칸
양의 수량이 유목민을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양고기 생산수량도 당연히 대폭으로 증가하게 되며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격도 많이 다운되고 하여, 왕의 식탁에서 귀족들의 식탁으로 또다시 일반백성들도 가끔 접할 수 있는 음식으로 보급화가 점진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개혁개방 후 신강 위구르족의 이주와 양꼬치의 보급화
거의 대부분 조건이 다 구비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양꼬치가 신강이라는 변방에서 전국으로 보급되는 일만 남게 되었다.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것이 등소평이 일으킨 개혁개방이다.
중국에는 원래 노예시대때부터 줄곧 내려오던 호구제도가 존재했다. 그 목적은 농민들을 땅에 묶어 농업생산에 종사하도록 하고 동시에 세금징수와 군대 징병의 편의성을 도모하려는데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에 1954년에 제정된 헌법에서 공민은 “이주와 거주의 자유가 있다”라고 규정했으나, 1956년과 1957년 2년 사이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하는 것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과 관련된 정책을 4번 발표하였다.
한편 토지를 떠난 농민들을 망류(盲流,고정적인 직업과 주소가 없이 도시에서 헤매는 사람)라고 비하하는 일부 풍조가 돌기도 하였다. 계획경제 시대에는 농민들의 인구 이동을 대부분 제한하거나 금지시키고 일부에 한해서만 임시거주증(暫住證)을 발행하였으나,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소위 사회주의식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인구이동이 보다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때 신강사람들도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일자리를 찾아 돈벌이를 찾아 중국 전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 신강 위구르족 사람들이 타지에서 터를 잡게 해 준 것이 길거리 음식인 양꼬치이다. 시장경제의 훈풍을 타고 80년대부터 위구르족 사람들이 중국의 크고 작은 도시들에서 양꼬치를 굽기 시작했다.
90년대 초에 필자가 연길에서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난다. 가끔 주말 저녁 숙사 친구들과 야시장을 놀러 갈 때가 있었는데, 그때 야시장에 둥근 모자에 위구르 민족 복장을 입고 양꼬치를 굽는 청년들을 볼 수 있었다. 철로 만든 긴 화로에 왼손에 큰 부채를 들고 열심히 흔들고, 오른손으로는 가끔 양꼬치를 돌리거나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쯔란 (孜然,쿠민)과 소금과 고춧가루를 적당히 뿌리면서 간을 맞춰주군 하였다.
물론 위구르만의 독특한 악센트가 섞인 한어를 구사하면서 양꼬치 맛홍보를 하면서 적극적인 호객행위를 했는데 그 목소리가 은근히 절주성이 강했던 같다. 마치 “쇼미더미”에서 속사포 랩을 듣는 듯이 말이다.
내가 처음 접해본 양고기가 그때 야시장에서 먹은 양꼬치이다. 그때 강열했던 맛이 머릿속에 각인되어서 양꼬치 하면 이모저모로 그때 먹은 위구르 청년의 양꼬치를 떠올리군 한다.
작년 고향에 갔다가 집부근에 있는 위구르 식당에서 찍은 사진.
비록 30년이 지났지만, 위구르 양꼬치가 생각나서 찾았다. 세월 속에서도 그 맛을 그대로 지킨 위구르 식당도 그렇고, 식당 사장이 두타르(중앙아시아지역에서 사용하는 발현 악기)를 튕기면서 신강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 이여서 사진을 남겼다. 그때 생각도 나고, 이천 킬로 타향에서 그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니, 세계 각지에 흩어져 고향을 그리면서 아리랑을 부르는 우리 민족을 보는 같아서 사진을 찍었다.
길거리 음식 양꼬치의 문제점
위구르 양꼬치가 독특한 맛으로 연변사람들의 입맛을 잡기 시작하면서, 사업감각이 뛰어난 일부 연변사람들이 벤치마킹을 하여 양꼬치점을 차리기 시작했다. 혹은 길거리에서 혹은 포장마차처럼 작은 가계로 시작해서 말이다.
이때 지방별로 맛이 조금씩 차이 나서 한때는 화룡양꼬치, 도문양꼬치, 훈춘양꼬치 등등 손바닥만 한 연변에서 양꼬치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꼬치는 가게에 따라 소스맛이 달랐고 이외 사장이 직접 구워주는 경우가 많았고 굽는 과정에 소금이나 고춧가루 등을 많이 발라 양꼬치의 비린내와 잡내를 잡았다.
후에 겨울 같은 경우 양꼬치가 쉽게 식어서 맛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조그마한 화로 같은 것에 목탄불을 넣어 테이블 위에 놓고 자체로 다시 데워 먹도록 고안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 맛을 추구하기 위하여 양귀비 씨나 잎 등등을 갈아 넣어 식객들이 그 맛에 중독되게 한다거나 혹은 양고기 냄새나는 화학조미료를 넣어 그 맛을 살린다는 등등 소문이 무성하게 나기도 했다.
2008년 11월 18일 신화통신사 기사, 조미료로 뿌려 돼지고기를 “양고기”로 변신
여하튼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제도를 점진적으로 도입하면서 사회 일부에 금전만능사상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한때 부촌으로 사회주의 시장경제개혁의 롤모델로 유명했던 천진의 모 서기가 한 말이 유명하다.
머리 들어 앞을 보고 머리 숙여 돈을 보아야 한다. 돈을 보아야만 앞을 내다볼 수 있다.(抬头向前看,低头向钱看,只有向钱看,才能向前看). 이러한 풍조가 부작용을 낳은 것이 돈이 된다면 불법도 부담 없이 행하는 것이다.
당시 식품안전문제가 대두한 것도 이러한 풍조와 연관 있다고 보인다. 그 중심에는 이미 국민음식으로 등장한 양꼬치가 있었다.
이외에도 차량과 사람이 오가고 당연히 먼지가 날리는 도로변에서 양꼬치를 구우면서 위생문제가 발생하고;
목탄으로 양꼬치를 직접 구우면서 발생하는 자욱한 연기로 환경문제가 발생하고;
대도시인 경우에는 무허가 지역에서 사사로이 양꼬치를 구우면서 도시환경 관리문제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필자의 경험담을 얘기해 보려고 한다.
필자가 90년대 초 중반에 북경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양꼬치를 먹으려면 보통 두 곳을 갔다.
중앙민족대학이 있는 위공촌(魏公村)에 있는 신강가(新疆街, 신강 위구르 식당가): 대학에서 멀지 않아 숙소 친구들과 자주 갔던 곳이다. 이 거리에 있는 위구르 식당들은 기본 양꼬치를 하고 이외 따판지(大盤雞) 카오바오즈(烤包子) 등등이 있는데, 특징은 항상 메뉴에 채소보다도 고기가 항상 더 많아 느끼함을 쉽게 느끼게 된다.
다른 한 곳은 북경대 소남문(小南門)이다. 저녁 10시 좌우가 되면 20대 젊은 친구가 28 영구자전거를 끌고 와서 양꼬치를 현장에서 구워 팔군 하였다. 뒷좌석안장을 개조하여 양꼬치구이기를 설치하고, 뒷좌석 양편에 고기와 목탄 등을 싣었는데 특점은 이동에 편하여 가끔 城管隊에서 단속하러 오면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군 하였다. 우리와 나이가 비슷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망을 봐주기도 하였다.
신강가의 위구르 식당은 양꼬치 정규군이라면, 북경대 부근에서 양꼬치 굽는 친구는 유격대에 가까웠다.
차별화와 레벨업을 통한 블루오션 마켓 개척-연변식 양꼬치의 등장
위구르 양꼬치는 양꼬치의 원조격에 해당된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다 보니 맛이나 요리방법 등이 일관성을 유지해 왔다. 30년 전의 위구르 족의 양꼬치나 내가 작년 연말 고향 집 부근에서 먹은 위구르 양꼬치 맛에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거의 기억 속의 그 양꼬치 맛과 같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하지만 위에서 말한 식품안전문제. 위생문제, 환경문제 등등 때문에 그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이 문제를 극복한 것이 연변식 양꼬치이다.
연변식 양꼬치는 식품안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몽골에서 직접 양을 직송해 오고 투명유리를 한 주방을 통째로 보여 주어 식품안전과 위생관리 및 고객의 신뢰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렸다.
이외 소스의 표준화를 실현하고, 양꼬치를 양념을 한 여부에 따라 세분화하고 부위별로 세분화하여 고객들한테 더욱 폭넓은 선택권을 부여하였다.
이외 세련된 실내디자인과 테이블마다 강력한 연기흡입 장치를 설치하여 남녀노소 전부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쾌적한 실내환경을 제공하였다.
연변식 양꼬치에서 가장 유명한 풍무 양꼬치 실내 환경
풍무 양꼬치에 사용되는 양고기는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 황궁에 납품하던 蘇尼特綿羊을 사용하였다. 이 양은 북경의 동래순 샤부샤부에도 사용된다. 특점은 단백질함량이 많고 지방함량이 낮고 풍부한 광물질과 비타민 등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풍무양꼬치가 유명해지면서 연변에서 중국 전역에 있는 유명도시에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과 일본 미국까지 진출하게 됨에 따라 연변식 양꼬치는 점차 위구르 양꼬치와 차별화되는 새로운 양꼬치의 트렌드로 떠오르게 된다.
위구르 양꼬치에서 나와서 새로운 영역을 쌓은 연변 양꼬치를 보노라면, 가히 청출어람 승어람(青出於藍而勝於藍)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위구르 양꼬치를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적어서 새로운 시장에서는 파죽지세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한국 같은 경우, 2003년에 처음 출장 왔을 때 양꼬치점이 서울 종로에 한 집인가 있었는데 지금은 참 많이 생긴 같다. 양꼬치 전문 프랜차이즈 브랜드도 50여 가지라고 하니 말이다.
양꼬치엔 칭다오? 아니 아니 양꼬치엔 마늘이지
양꼬치가 한국에서 판도를 넓히면서 양꼬치의 소비층이 일반인에서 연예인들까지 두텁게 형성되게 된다. 이러면서 어느 연예인이 예능프로그램에서 “양꼬치엔 칭다오”란 유행어를 남발하면서 , 한국시장에 양꼬치를 먹을 때는 칭다오맥주를 마셔야 한다는 주문 아닌 주문을 만들어 냈다.
칭다오맥주(青島啤酒)가 얼마나 맛있길래 그리고 양꼬치와 어울릴까?
정확히 표현하면 모든 라거맥주는 다 양꼬치와 어울린다. 차갑게 얼린 라거맥주는 양꼬치의 느끼함을 중화시켜 주고 동시에 꼬치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여기에는 딱 칭다오맥주가 아니라도 충분하다.
중국 같은 경우에는 지방마다 마시는 술과 담배가 다르다. 대부분 술공장과 담배공장이 세금징수와 취업해결에 도움 되니깐 지방보호주의 비슷한 개념의 정책을 실시한다. 하여 연변에서는 연변 맥주인 빙천맥주(冰川啤酒)를 북경에서는 연경맥주(燕京啤酒)를, 산동에서는 칭다오맥주(青島啤酒)를, 광동을 포함한 남방지역에서는 설화맥주(雪花啤酒)를 주로 마신다. 결국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 듯이 부동한 지역을 가면 그 지역의 맥주나 술을 마시게 된다.
어찌 보면 양꼬치엔 칭다오는 산동성 청도에서만 통할 지도 모른다. 옆 동네인 산동성 연태(煙台)만 가더래도 연태맥주가 별도로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양꼬치엔 칭다오는 오직 말도 안 되지만 한국에서만 유행되는 유행어 일뿐이다.
양꼬치엔 라거맥주가 어울리고 그리고 잘 어울리는 것이 마늘이다.
양꼬치와 마늘은 천생배필이다. 양꼬치를 구울 때 마늘과 같이 먹으면 맛을 증가하고 더욱 향기롭게 맛있게 한다. 양꼬치를 먹을 때 느끼하다 싶으면 생마늘을 그대로 먹어도 되고, 그 냄새가 심하다 싶으면 구워 먹어도 좋다.
통째로 먹어도 되고 절편으로 쪼개 먹어도 되고, 지어는 마늘가루를 뿌려 먹어도 된다.
어찌 보면 양꼬치엔 쿠민과 함께 마늘이 참 잘 어울린다. 다음에 양꼬치 집을 가면 마늘도 함께 먹도록 하장.
맥주는 칭다오맥주가 아닌 다른 카스나 하이트맥주라도 좋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