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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2025년,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

by 백검

2025년이 저물어 간다.
항상 이맘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시간은 참 빠르다.”


정말 그렇다. 시간은 번개의 섬광처럼 앞질러 달려가는데,
내 마음은 때로는 그 뒤를 유유히 따라가는 듯하고,
어떤 때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선 듯하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듯 흘러가는 시간을 온전히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제가 지난달이 되고, 그 지난달이 어느덧 한 해의 끝이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이 조금 허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오십 고개를 넘어서면서, 인생이란 것이 결국 **무상(無常)**과 **허무(虛無)**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자주 스친다.

특히 가까운 이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며 생사(生死), 그리고 그 생사 뒤에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세계를 곱씹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어렸을 때, 나는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사상을 배우며 자랐다.
그 시절의 나에게 **무신론(無神論)**은 하늘과 땅처럼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였다.

속세의 신들은 현실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 약한 마음이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나 전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내려다본 제주의 하늘과 땅처럼, 때로는 구름과 안개가 대지를 덮어 흐릿해지다가도
바람 한 점 스쳐 지나가면 푸른 하늘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것처럼 내 사고의 지형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있다.


2025년은 그런 변화가 더욱 도드라진 한 해였다.

한국은 2024년 말 발생한 계엄 사태의 파장을 아직도 수습하지 못하고 있고,
미국은 트럼프 2기 정부가 시작되면서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전 세계를 상대로 무차별적인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과 일본 또한 다카이치의 ‘대만’ 관련 발언 이후 외교·경제·군사적 긴장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정세가 진흙탕이니 개인의 일상도 평온할 리 없다. “엎어진 둥지에 온전한 알이 없다(覆巢無完卵)”는 고사처럼 혼란의 파고는 우리 삶에도 흔적을 남겼다.

2월에 보았던 베이징의 백화점이나,
11월에 스쳐 지나온 상하이 거리의 풍경은
코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쓸쓸하고 어두웠다.

택시 기사들과 친구들의 말 속에서도, 불경기에 대한 초조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깊게 배어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소비심리는 얼어붙고, 영업을 버티지 못한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어들었다.


행인들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근심과 걱정이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명년(明年)은 어떨까?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에 무지개가 걸리듯,
흐릿하고 무거웠던 2025년의 분위기를 뒤집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2019년 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기껏해야 반년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3년이 걸렸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도
한 두 달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3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요즘처럼 필연과 우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에는
명년은커녕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예측할 수가 없다.

아베 신조가 2022년 7월 뜻밖의 순간에 피살되었던 것처럼,
2026년에 또 다른 정치적 비극이 반복되지 말란 법도 없다.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이 토네이도를 일으킨다는 비유처럼
작은 사건이 대형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더 필요한 것은
동중정(動中靜) —
질풍노도 같은 변화의 한가운데서도
찻잔 속 찻잎처럼 가만히 가라앉는 마음.
움직임 속의 고요, 격변 속의 평정이 아닐까 한다.


2025년이 저물어 가는 이 시점,
나는 그 고요한 중심을 다시 찾기 위해
오늘도 조용히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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