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섬 제주도에 산 지도 어느덧 십여 년이 지났다.
돌아보면 그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겪으며 다사다난하게 살아온 것 같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았고, 그 사이 세상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여러 번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때로는 멈춰 서 있었고, 때로는 떠밀리듯 흘러가며 이 섬에 머물렀다.
메르스, 사드, 그리고 3년의 코로나 등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잇따라 발생하다 보니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 볼까 여러 번 고민하기도 했다.
환경을 바꾸면 삶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여전히 이 섬에 남아 있다.
내가 제주도를 좋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날씨다.
제주는 포근하고 따뜻하다.
겨울에도 가끔은 봄날 같은 기운이 스친다.
겨울에도 꽃이 피는 동네, 그곳이 바로 제주도다.
다른 하나는 맑고 푸른 하늘과
엎드리면 닿을 듯 가까이 있는 바다,
그리고 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오름들이다.
차로 십여 분만 달리면
검은 용암이 비취색 바다와 어우러진 해안에 닿고,
조금 더 달리면 오름 위에서
한라산과 바다를 함께 바라볼 수 있다.
제주에 오래 있다 보니 제주의 사계절은 저마도 다른 모양을 하고 있고
그때그때마다 또 다른 꽃을 피우면서 우리를 반겨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겨울은 이 섬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계절이라고 느낀다.
차갑지만 가혹하지 않고, 거칠지만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
11월이 되면 동백꽃이 꽃봉오리를 하나 둘 터뜨리기 시작한다.
서귀포의 양지바른 언덕이나 포근한 해안가에서 먼저 피어나
천천히 제주시 쪽으로 올라오면서 어느 사이에 제주 곳곳에 동백꽃이 활짝 만개함을 느끼게 된다.
동백꽃은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않고,
향기로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동백꽃은 추위를 피하지 않는다.
봄을 기다리지도 않고,
환경이 나아지기를 조건으로 삼지도 않는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꽃망울을 띄우고,
차가운 계절 속에서 천천히 꽃을 하나둘씩 피운다.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차가운 겨울비가 내려도 ,
인내하며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린다.
조금 더 나아지면,
조금 덜 불안해지면,
조금 덜 추워지면 시작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은 늘
완전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고 말한다.
꽃도, 계절도, 사람의 마음도
한 순간도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동백꽃이 오래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찰나 찰나 새로 피고 새로 지고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는 그 연속을 한 덩어리로 바라볼 뿐이다.
겨우내 항상 피어 있는 동백꽃을 보며
나는 비로소 느끼게 된다.
견딘다는 것은 버틴다는 뜻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춥고 아픈 시간들은
언젠가 반드시 끝난다는 것을.
비록 동백꽃은
희망을 말하지 않으나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의 추위도,
지금의 불안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임을
조용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이 섬에 머문다.
꽃처럼 피었다 지는 인생을 또 한 번 느끼면서
조금은 덜 조급하게,
조금은 덜 두려워하며
이 계절을 그리고 인생의 어느 소중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