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은 마리메꼬를 핀란드의 국민 브랜드로 키워낸 창업자 아르미 라티아는 개성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에 마리메꼬가 경영난에 처해 있을 때 주식을 인수하며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 키르스티 파카넨(Kirsti Paakkanen)이었지요. 올해 11월 5일에 92세를 일기로 사망한 키르스티는 흙수저 자수성가의 표본이자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카리스마 있는 사업가였습니다.
2020년 Otava 출판사에서 나온 울라 마이야 파빌라이넨의 "Suurin niinstä on rakkaus"(직역하면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롱 앤 리치한 삶을 살다 간 키르스티 파카넨의 전기입니다. 제목에 어울리게 본문도 성경 구절이 생각나는 제목들(사랑, 소망, 믿음, 믿음과 소망과 사랑)로 구성되어 있지요.
1929년 핀란드의 작은 마을 사리야르비(인구 13만인 유바스퀼라까지 70km 정도 됩니다)에서 가난한 집안의 늦둥이 딸로 태어난 키르스티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와 무뚝뚝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키르스티의 외할아버지는 맹인이었고, 어머니는 눈먼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구걸하며 방랑하는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키르스티에겐 두 언니가 있었는데 미모가 출중했는지 기우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부잣집에 시집을 갔습니다. 아버지가 데려온 이복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소년병으로 입대했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없는 형편에 언니네 집에 머물면서 학업을 이어나가다 조카가 물에 빠져 사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큰 충격을 받은 키르스티는 학교를 그만두고 외삼촌네 정육점 점원으로 일하기도 합니다.
키르스티는 당시 젊은이들이 그렇듯 근로회관에 춤을 추러 갔다 남편 요르마를 만납니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1952년 결혼 후 헬싱키에 신접살림을 차리지만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지요. 복막염에 걸려 나팔관 수술을 했던 것이 원인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인공수정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였지요. 키르스티는 입양을 원했지만, 남편은 반대했습니다. 12년 후 키르스티의 강력한 요청으로 둘은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요르마는 이혼 후에도 키르스티를 여러 번 찾아왔지만 어느 시점부턴 다시 만나지 않기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키르스티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지만 요르마는 두 번 더 결혼했고,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90이 넘게 장수했다고 하네요. 여기까지가 약 70장 분량의 1장 '사랑'의 내용입니다.
키르스티는 식당, 호텔 등 일터를 여러 번 바꾸다 스토크만 백화점 수입 옷감 코너에서 일하게 됩니다. 백화점의 위상이 지금보다 많이 높던 당시 백화점에서 일하던 다른 직원들은 남편이 공무원이거나 프리메이슨(!)이었다고 하는데, 설렁설렁 일하는 직원들 틈에서 고군분투하던 그녀는 광고회사에서 무급 인턴으로 일하기 위해 백화점을 스스로 그만둡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69년, 40세의 키르스티가 광고회사의 동료 직원 두 명을 데리고 독립하면서 여성의 시선에서 광고를 만드는 Womena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회사명은 핀란드어로 사과를 뜻하는 'Omena'와 여성들(Women)을 결합한 단어였죠.
키르스티에게 직장은 잡담을 하거나 딴짓을 하는 곳이 아니었고, 워커홀릭들처럼 일했지만 초반 몇 년은 직원들 급여를 걱정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음주나 사우나 대신 세심한 고객 맞춤형 서비스(내지는 우정처럼 보이는 비즈니스)로 큰 고객들을 많이 확보한 Womena는 점차 성장했고, 1989년 키르스티는 미국의 Interpublic Group에 지분을 팔며 명실공히 부자가 됩니다. 이제는 안 벌어도 먹고살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 2장 '소망'의 내용입니다. 마리메꼬 이야기를 하기까지 아직 200페이지가 남았습니다.
이제는 60이 넘어 은퇴할 나이에 키르스티는 새로운 꿈을 꿉니다. 마리메꼬를 사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지요. 그리고 후계자들인 미카 이하무호틸라나 티나 알라후흐타-카스코를 양성하기까지 성공신화는 계속됩니다. 사실 Womena부터 대형 광고 프로젝트들, 인물과 기업들의 이름이 꽤 나오는데 본격적으로 마리메꼬 이야기가 나올 때쯤엔 조금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3, 4장은 50-60대의 사업가나 기업 임원분들이 공감할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흑단같이 검은 머리, 흰 피부와 붉은 입술. 검은 옷을 즐겨 입던 백설공주 같기도, 마녀 같기도 한 여자. 직원들 눈물을 쏙 빼게 야단을 치곤 다음날 비싼 선물을 안기기도 했던 키르스티가 외로웠을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은 많지만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리는 기업을 만들고 키워내는 사업가는 많지 않습니다. 키르스티는 후계자들은 물론 전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청소년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CEO였고, 그녀의 많은 부는 재단을 통해 청소년 지원에 쓰일 것으로 보입니다. 키르스티에게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닌 인류나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아래는 2017년에 썼던 마리메코 창업자 아르미 라티아에 관한 영화 Armi Alive!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