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ctoria Feb 25. 2021

밥솥을 바꿨다

메이드 인 개성공단이여 안녕

남편이 외국 사람이라고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

남편이 한식 잘 먹어요?


아마도 아내인 내가 주로 요리를 할 것이라 생각해서 하는 질문 같은데 요리보단 설거지에 재능이 있는(?)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럼요, 매운 것도 잘 먹고 불고기도 만들 줄 알아요.


남편은 예전에 잠깐 한국 정착을 시도했을 때 1년짜리 비자 대신 2년짜리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결혼이민자 교육이란 걸 받았다. 메이저 국내 영화제 카탈로그 두께만 한 한식 요리책에는 불고기랑 이런저런 요리법이 많았다. 남편이 실제로 해본 건 불고기뿐이었던 것 같지만.


내가 아는 맛을 추구한다면, 남편은 모르는 맛을 추구한다


된장찌개, 김치볶음밥, 해물볶음밥, 김밥 같은 한정된 범위의 요리를 그나마 시장이 허락하는 재료로 만드는 나와는 달리 남편의 요리는 매우 창의적이다. 그는 인터넷에서 지중해나 중동 지역 조리법을 찾아 낯선 양념과 배합해서 오랫동안 오븐에 익히는 요리를 즐긴다. 남편이 들이는 시간과 정성을 감안했을 때 맛있게 먹어 줘야겠지만, 까칠한 딸아이와 촌스러운 내 입맛에는 그 요리들이 영 낯설다.


한식의 정의가 밥이라면 우리는 주 3회 이상 한식을 먹는다


신혼 때 내가 이틀인가 삼일 연속 전기밥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난 이렇게 매일 밥을 먹고살 수 없어.


감자도 먹고 파스타도 먹어야 한다던 양반. 지금은? 밥솥에 쌀이 떨어지면 불안하다. 사이드 디쉬로 밥만큼 만들기 편한 게 없으니. 감자를 깎거나 물을 끓이는 대신 밥솥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되는 편리함. 무엇보다 복잡 미묘한 메뉴 조작법을 알지 못하니 아내가 집도한다는 것이 장점의 정점이 되겠다.


우리 집엔 적어도 8년 묵은 밥솥이 있었다


살 때는 최신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내솥에 쌀알이니 뭐니 불순물도 들어가고 버튼도 가끔은 잘 안 눌리던 밥솥. 시대의 변화와 함께 빨간색 뚜껑도 메이드 인 개성 마크만큼이나 레트로가 되어 버렸다. 6인용이라 손님이 오면 쌀을 가득 채워 두 번씩 밥을 했던 기억도. 무엇보다 6년을 쓰고 보니 내솥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큰 맘을 먹고 미래지향적인(?) 흰색의 유선형 디자인으로 밥솥을 바꿨다. 코로나 시대에 무려 4개월이나 걸려 한국에서 물 넘고 바다 건너 도착한 밥솥이다. 레트로 마니아인 남편은 새하얀 대용량의 밥솥이 정도 안 갈뿐더러 자리를 전보다 더 많이 차지한다고 투덜거렸지만 박물관이나 골동품점에 팔 수 있을 때까지 존버 해 보자는 내 제안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헌 밥솥을 냉큼 폐기 처분했다. 그나저나 새 밥솥은 메뉴가 더 복잡하니 여전히 쌀밥 요리는 내 몫이다. 여기 전자제품들은 언어 호환이 가능하게 북유럽 4개국 이상 스티커를 탑재한 경우가 많던데 쿠*전기밥솥도 영문 메뉴를 선택 가능한 날이 속히 왔으면.



매거진의 이전글 변하는 것들, 변하지 않는 것들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