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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toria May 20. 2021

가족을 얻고 이동성을 잃다

행복을 결정하는 연봉이 아닌 다른 요소들

러시아를 떠나 핀란드로 온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가끔 외국인 헤드헌터에게서 문의가 온다. 하긴 코로나 장기화로 귀국한 인력들도 있을 테고, 노동비자가 나오는 학력이나 소기준이 더욱 엄격해졌다고 하니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나한테 묻는 건지, 지인 중에 적임자를 추천해 달라는 건지 일관성 없는  경만큼이나 알쏭달쏭한 문의다.


최근엔 내가 10여 년 전 러시아에서 받은 루블화 여의 3배 넘는 돈을 준다는 곳이 있었다. 물론 그 물가 인상과 원화나 유로화 대비 루블화 환율의 하락을 고려하면 그다지 혹할 금액이 아니었만.

 

사실 루블이 아니라 유로로 준다고 해도, 제시받은 금액의 두 배쯤 주는 곳이 있다고 해도 유자식 유부녀인 내가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글로벌하게 통용되는 라이선스를 보유한 전문직도 아니니 '나만 믿어!' 하고 멀쩡히 회사 잘 다니는 남편과 학교 잘 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몇 년 전에 그 비슷한 시도를 했을 때는 남편과 내가 젊었고, 남편 직업이 좀 더 유연했고, 아이가 미취학 아동이었다. 코로나까지 터지고 보니 더더욱 안전한 보금자리를 혼자 떠나기 쉽지 않다. 그 돈 벌어 딱히 쓸 일도 없고, 어쨌거나 불가항력의 일이 벌어진다면 여기가 러시아나 CIS권보단 안전하다는 느낌이니까.


20년 전, 10년 전엔 어땠더라? 나는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대학에 진학했고 교환학생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이스라엘 중 어디로 갈까 고민했으며 인턴은 불가리아 소피아에 가고 싶었지만 모스크바로 갔다. 한국에서 좀 일하다 지루해져서 대학원은 다시 러시아로 갔고 그다음엔 또 한국에 갔었다. 땐 개도국 어디로 파견될지 모르는 국제기구에도 응시해 2차 면접까지 갔었다. 한마디로 20대엔 마음만 먹으면 사는 곳을 옮기는 게 어렵지 않았고, 계속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아이의 취학을 겪으며 내 직업선택의 폭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다른 대륙이나 다른 나라로 이동하기는커녕 도시를 이동하는 것도 고민거리다. 가 나한테 족쇄를 채운 건 아니지만, 저울이 쉽게 그쪽으로 기울질 않는다.


얼마 전엔 아이의 요청으로 남편 직장에 가깝기도 한, 시 외곽 쇼핑몰에 갔다. 아이에게 주택이 많고 쇼핑몰 가까운 이곳으로 이사 오는 건 어떨까 했더니 아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학교는? 학교가 너무 멀어.

이 근처 학교 다니면 되지.


우리 학교 애들이 단체로 여기 전학 오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사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남편과 나, 아이 세 사람의 행동반경의 중간지대를 찾는 일은 머리에 쥐가 나도록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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