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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소사이어티
by Jaehwan Jeon Mar 18. 2018

한나가 한나를 만났더라면

생각을 하는 깨어있음은 악의 평범성을 막는 최고의 행위

영화 '더리더'와 '한나아렌트'
독일의 여성 철학자 '한나아렌트'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유태인계 독일의 여성 철학자 한나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더리더의 죄의식

먼저 그에 대한 얘기를 펼치는 데 있어 영화 '더 리더'가 얘기하는 죄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영화 '더 리더'는 나치의 감시원 한나와 소년 마이클과의 사랑 그리고 인간의 죄의식에 관한 소재를 영화한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의 한나는 유태인 수용자들의 감시원이었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의 재판을 하면서 감시원이었던 한나가 재판을 받는 장면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영화의 다른 관점이다. 대부분의 영화들과 사회적 규범은 2차 세계대전의 유태인의 피해의 참상 혹은 독일 나치의 악행을 조명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당연하다. 그만큼 나치의 만행이 극악무도했으며, 영화나 미디어는 그들의 만행을 조명하고, 피해자들의 심정을 담아낼 필요가 있으니깐. 그러나 이 영화는 나치나 유태인의 아픔에 대해서 조명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가해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않다. 그냥 인간, 사람,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치나 유태인이라는 프레임이 아닌 그 안의 인간의 입장을 얘기해주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유태인 피해자의 관점이 되기도 하고, 안타까운 친구 청년 마이클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모든 상황을 그냥 담담하게 이애하기로한 중년 마이클의 관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함에 관객은 영화 속 마이클처럼 심리적 혼란도 일으킨다. 이미 관객은 유태인의 피해와 홀로코스트의 악행을 깊숙이 인지하여 그에 대한 죄의 중함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인간 한나를 바라봄으로써 과연 죄의 기저, 본질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도대체 문제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재판정에서 한나는 유태인들이 갇혀있는 교회당에 불이 났는데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냐는 판사의 질문에 너무도 태연히 "그것은 감시원으로서의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나의 임무는 유태인을 감시하는 것이다"라고 울부짖는다.

그것은 감시원으로서의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나의 임무는 유태인을 감시하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나치나 유태인의 학살 그런 것은 배제해둔 채 단지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맞다. 그녀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내 본연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다. 보통의 홀로코스트들처럼 유태인들을 혐오하지도 박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영화는 다른 피의자들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에도 문맹이라는 창피함과 수치심에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한나는 재판정에서 중한 판결을 받는다. 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객관적 사고, 혹은 영향력은 생각하지 못하고, 수동적 행동과 생각이 낳은 결과다. 자신의 무지나 생각의 부재로 인한 파급효과(결과)에 대한 사고는 하지 않은 채, 단지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프레임 속에서 갇혀서 사고하는 것으로, 무지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생각의 폭을 프레임 안에 갇혀버리게 만든다. 영화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공동체적 사회에서는 무지가 모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향하는 덫으로 올 수 있게 하는 사실을 전달해주고 있다.


한나의 무사고의 순종적 행동이 자신을 향한 덫으로 되는 장면을 통해 현실세계를 비춰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현실 사회에서 우리는 흔히 얘기하는 '몰라서..'라는 말로 이따금씩 타인에게 해당 잘못을 저지르고, 아무렇지 않게 넘겨주기를 바라며, 관용과 용서를 강요하며 종용을 한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삶의 태도에 있어 무책임한 언어 일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 더리더의 속죄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무게

그리고 영화는 결말로 그녀가 속죄의 과정과 글을 배우는 지식의 과정을 동일시 함으로써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라고 넌지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한편 영화의 마지막 나치의 피해자로 나오는 여인이 등장해 냉소적으로 프랭크와 한나의 선의를 거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영화의 최종적으로 전달해주고자 하는 목적의 메시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프랭크가 한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한나가 모은 돈을 유태인 단체에 기부하는 게 어떠냐고 하지만, 그는 면죄부를 주는 거라고 얘기하며, 그의 제안과 부탁을 거절한다. 이는 제 아무리 피의자가 속죄를 하기 위해 몸 부릴 칠지언정, 피해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 아닐까 하며, 속죄를 한다거나 죄의 원인이 단순히 무지라고 할지 언정, 그 행위를 한 자체만으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영화는 얘기하는 것이다.  




이번엔 독일의 철학자 '한나아렌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한나아렌트'에 대해 얘기해보자.

영화 한나아렌트는 여성 철학자 한나아렌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독일 패전 후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에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 한나아렌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아이히만 전범 재판에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에 주목한다.

한나는 냉철한 시선으로 아이히만을 바라보면서 악행을 저지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법을 지켰을 뿐이라고,  자신의 주장을 자신의 지인들에게 피력하지만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한나가 아이히만을 옹호한다며 그녀를 나무란다.

이윽고 한나는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뉴요커>의 기고란에 올리고, 독창적이고 냉철한 시선에 편집장을 비롯한 매거진의 수뇌부는 그녀의 관점이 독창적이라며 그녀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은 그에 대해를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그녀를 홀로코스트를 옹호한다고 무차별적으로 비난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제삼자의 입장이 아닌 한나아렌트도 수용소에 있었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돌프 아이히만을 피해자 혹은 피의자의 프레임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 본성의 기저를 향해 쫓는다.


| 한나아렌트가 발견하고 주장한 '악의 평범성'

한나는 그렇게 아돌프 아이히만의 행동의 기저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규정하며, 오히려 유태인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시선까지 갖는다. 그렇다면 한나아렌트가 그토록 고집스럽게 주장한 '악의 평범성'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고, 파시즘의 광기로든 뭐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며, 그래서 악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것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아무튼, 그녀가 분석해 낸 인간이 갖는 악마의 습성은 매우 무서우면서, 보통 사람들인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말인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한 아돌프 아이히만도 절대악이 아니었으며,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악의 평범성에 의하면 곧 평범한 우리도 아돌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악행의 기저에 대해 생각해낸 것은 놀라우면서도 섬뜩한 것이다.

 


| 악의 평범성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그러나 이러한 차가운 시선은 세상의 공분을 일으키고, 모든 비난을 감수한다.

대중의 시선은 어떠한 문제에 대해 본질보다는 겉의 형태를 보기 때문 아닐까 하며, 냉소적 이성보다는 감정적 감성이 앞서기 때문이지 아닐까 하고 추론해본다. 그녀가 피해자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도 피해자였으니까. 그러나 어떠한 프레임을 통해 비치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전체주의적 생각일 것이다. 즉, 악에 대해서 이분법적 논리로 적용시키고, 나치 피해자의 관점에서는 아돌프 아이히만을 자신들과는 완전하게 반대에 서있는 절대악이라고 규정짓고 싶고,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나의 피해와 고통들의 논리적 문법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관리와 순사들에게 악의 평범성 논리를 적용시키면 납득을 할 수 있겠는가? 결코 당사자들에게는 이러한 순응은 쉽지 않다. 이와 비슷한 사회적 현상이 최근의 국내 영화시장에서도 일어났는데, 군함도 논란이 그렇지 아니한가? 감독은 이분법적 구분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함에 영화 속 연출이 일본의 악행보다 친일파의 악행이 더 드러나는 연출이 나와 굉장한 논란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관객들이 기대했던 장면이나 생각하던 장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영화는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기대와 달리 흥행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군함도가 인천상륙작전같은 단순한 구조로 갔다면 흥행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는 류승완 감독이 연출할 때부터 이러한 논란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상업영화를 연출하면서 여러 프레임을 부여를 하는 작가주의적 연출은 배제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 악의 평범성의 동기

그렇다면 이러한 악의 평범성은 왜 발현되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한나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경우를 빌어서 평범한 인간이 악으로써 되는 트리거는 바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이른바 '무사고(無思考)'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사고 라는것은 어떤 것일까? 알고 모름일까? 적어도 한나아렌트의 논리에 의하면 아니다. 아래 한나아렌트의 말을 보며 살펴보자.


생각이라는 바람을 표명하는 건

지식의 돛이 아니라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말할 능력

사람들이 생각의 힘으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칠 때

파국을 막는 거예요

- 한나아렌트 -      


생각한다는 건 많이 알고, 적게 알고의 문제가 아니다. 즉, 생각한다는 것은 지식의 두께가 아닌 깨어있느냐? 옳고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있느냐? 인간다움을 생각할 수 있느냐이다.


우린 깨어있어야 한다.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옳은 건 옳다고 해야 한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는 건 용기의 문제와 사회과학적인 문제가 결부될 수 있기 때문에 한발 더 나아가는 문제이지만, 최소한 구별할 수 있는 생각은 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가 앞서 얘기했던, 흔히들 "몰라서... 그랬다"라는 말은 최고의 비겁한 변명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생각하지 않는 건 죄가 된다. 배우지 않아서 생각하지 못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 알아야 한다.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현혹돼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당당할 수 있을까?


한나아렌트의 철학으로써 악에 평범성에 대해서 따라가 보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악의 평범성이란? 평범한 우리 자신이 이 문제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한번 솔직히 얘기해보자.


내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황이라면?

...

내가 일제 강점기 시절의 관료라면?

내가 민주화 시절 경찰 고위 간부라면?

...

내가 기업의 부조리, 비자금 혹은 청탁을 주고받는 상황의 중심에 있는 기업체의 간부라면? (관조자가 아닌 수행 역할)

내가 학교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주변인이라면?


자! 만약 이러한 현대적 상황이라면, 마치 투사처럼 거부하면서 아닌 것에 맞설 것인가?  

아니면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면서, 무죄라고 주장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이런상황이라면 악이 되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무작정 비난할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은 애석하게도 최근에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었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때 일부 청와대 비서관이 그랬고, 세월호 사건때의 이준석 선장이 그랬다. 소설속 영화속 과거 역사속 이야기가 아니란 얘기다.


악은 멀리 있지 않다. 인간 자체의 속성이 악이 될 수 있는 존재다.
그렇지만 악이 되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정 사람다움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깨어있어야, 사회 속에서 사람같이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사는대로 생각하면 되겠다라는 태도로 임하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적 외력에 의해서 선이 악이 될 수 있고,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는 진리로 이르게 되며, 나의 삶과 다른 이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방향타가 되기도 할것이다.

그렇기에 최근 미투 운동, 위드유 운동도, 촛불 혁명도 시민이 깨어있었기에 일어났던 운동인 것이다. 용기 이전에 아닌 것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고 말이다. 다시 말한다. ‘악의 평범성’이 발생하는 이유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이다.

-

다시 한번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경각심을 깨닫고, 악이 평범하다는 악의 보편성보다 ‘무사고’에 더 중요성을 두고 ‘무사고의 위험성’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영화 한나아렌트의 하이데거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첨부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얘기한다.



생각이 행동할 힘을 부여하진 않아요.
우리가 사는 건 살아 있어서고,
우리가 생각하는 건 생각하는 존재여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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