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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Jan 09. 2020

우울한 자들이여, 글을 쓰자

새해 첫 브런치 글의 제목에 '우울'이 들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유감이다. 그러나 난 우울에서 출발하여 욕망을 거쳐 안정으로 향해가는 2020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으니, 출발점인 우울을 다루는 것은 필연적이다.


꽤 오래도록, 나는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마도 대학교와 사회에서 다소 버거 정도로 단체 생활을 하다 보니, '아 나는 사람이 많으면 힘드네. 혼자가 좋나 보다.'라는 단순한 흑백 결론을 내린 듯하다. 실제로 혼자서 하는 행위들 - 책 읽기, 글쓰기, 음악 듣기, 요리하기 - 을 좋아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도쿄로 직장을 옮기고 2년가량을 정말 철저하게 혼자 살아보니, 누구든 연락하면 만날 수 있지만 자발적으로 혼자인 상태외로움의 정도에 상관없이 혼자여야만 하는 상태 사이에는 아주 깊은 계곡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감정과 상황이 안정된 상태에서 누리는 고독내 안의 많은 소란함을 끌어안고 버티는 공허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비자발적인 공허에 빠졌던 도쿄 생활의 마지막 1년을 돌아보니 그야말로 가관이다. 집에 있을 때 나는 세 가지 중 하나를 했다: 넷플릭스, 유튜브, 당시 만나던 장거리 애인과 통화하기(대부분 싸웠다). 그리고 항상 취해있었다. 집에 와인이 끊기지 않도록 2병 이상 씩은 꼭 쟁여두고 마실 정도였다.


나는 나와 단 둘이 있는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

언제나 뇌가 참 시끄러운 애였다. 웬갖 트라우마는 잊지도 않고 차곡차곡 잘 쌓아두고, 상처가 되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서 무한 리플레이를 한다. 스스로 했던 말들을 해체하고, 상황을 비관하고, 정당화를 시도했다가, 무참히 실패하는 그 과정들은 무언가 잘못됐지만 끊임없이 돌아가는 태엽처럼 내 인생을 감쌌다. 특히, 몰두할 일이 없을 때, 속의 얘기를 쏟아낼 친구가 부재할 때, 창의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을 때면 악순환의 사고가 어김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혼자가 되면 일단 뇌의 소란을 잠재우기 바빴다.


결국 도쿄에서의 내 모습은, 나로부터 도망치기 바쁜 나였던 것이다.

쉼 없이 바뀌는 화면 속으로.

알딸딸한 취기 속으로.

건강하지 못한 나여도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관계 속으로.

근데 그 회피의 끝에 행복이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나는 불행했고, 그 모든 것을 미디어와 알코올과 사람 탓을 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을 망치더라, 라며. (알찬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넷플릭스와 와인으로 휴식을 얻는 많은 사람들의 여가 방식을 욕보인 것과 다름없다.)


내가 망가졌던 이유는 사실 나한테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내가 나를 불행하게 하다니 -
슬프지 않은가.

하지만 우울감이라는 것이 다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행복감이라는 것을 누릴 줄 몰라 우울한 사람도 있고, 손에 쥐고 있는 게 너무 없어 끝없이 암울한 사람도 있다. 본인의 탄생과 대부분의 삶에 큰 결정권 없이 밀려왔는데, 이제 와서 두 발로 서서 행복해보자니 막막할 수도 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책임만 져야 하는 상황에 놓여 분노가 치밀 수도, 최선을 다한 일에 배신을 당해서 절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냥 그런 일이 생긴다, 살다 보면. 물론 별 일이 없어도 우울하기도 하다. 그것이 시를 쓰고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발달된 뇌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우울할 때는 적당한 운동과 목표 -

라고들 하지만 진짜 우울하면 그런 말도 사치다. 방 밖으로 나갈 힘도 없고, 삶의 목표를 찾아서 설정할 에너지는 더더욱 없다. 내가 쓰는 치트키는 그래서, '글쓰기'.


내가 현실의 나로부터 도망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재창조다. 나는 때때로 정말 아무 말이나 공책 위로 쏟아낸다. 그 페이지 위에는 진실도, 거짓도 있고, 진심이 아닌 긍정도 있고, 평행 세계의 나도 있다. 내가 아닌 나를 펜 촉 끝에 놓고 정처 없이 산책시킨다. 물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샘솟아 기쁜 마음으로 글을 쓸 때도 있지만, 우울할 때 쓰는 글들은 정말 단순히 '글을 쓰기 위한' 글이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주제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에는 대신 필사를 한다. 문장력이 좋은 책이나 요즘 내게 위안 혹은 자극이 되는 책을 골라서 문장들을 노트 위로 옮긴다. 이렇게 남의 말이라도 내 것인 양 쓰면서 도망쳐본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항상 나를 대변한다고, 때문에 나는 그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와 독대하는 것이 피곤해진다. 그리고 우울감에 갇힌 사람들은 보통 그 독대의 시간에 본인과 상황을 해체하면서 매우 익숙한 불행의 담론으로 빠져든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성숙한 자아를 형성해가는 과정의 일부일 것이고, 결과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언행에 책임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울한 사람들은 과도한 책임감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지나친 엄격함으로부터 잠시 멀어지라는 것이다. 잠시 다른 곳에서 끈적끈적한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를 집어삼키는 감정들을 meta 하게 관조하는 것. 내게는 그 방법이 글쓰기일 뿐, 본인에게 맞는 다른 방식을 찾아도 좋다.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도피: 글쓰기

오늘 내가 쓴 이 글도 깊은 슬픔으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다. 이렇게 문장을 맺음하고 "발행"을 누르는 순간 나를 짓누르던 우울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져있을 것임을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울한 자들이여, 글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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