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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Feb 03. 2020

내 안의 시차 1 - 무의식, 의식, 말, 글

바라는 무언가를 선언하고, 믿고, 이루어내기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 과정 자체에 시간이 소요된다고 느꼈다면, 요즘에는 그 과정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간에 속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습관을 만드려고 할 때 (예: 브런치에 일주일에 하나 이상의 글 쓰기)
아픈 기억 혹은 사람을 잊으려고 할 때
목표를 위해 타임라인을 두고 노력할 때 (예: 앨범 내기)


위 경우들과 같이 지향하는 방향을 향해 달려갈 때면 나의 무의식, 의식, 기분, 말 그리고 이 제각각 다른 속도로 움직여 나의 원활한 작동을 저해한다. 일체화되어 움직여야 할 자아의 하위 요소들 간에 시차가 있는 것이다. 다소 어안이 벙벙한 일이다. '앨범을 내고 싶다'는 나의 지향점을 예시로 들어보자.



현재의 시차 지도

지향점을 구체화하는 강력한 무기이며 가장 앞서간다. 예를 들어 [나는 2020년 5월에 작업실을 얻고 2020년 9월에 앨범을 내고 2020년 12월에 공연을 할 것이다.]라고 글로 쓰고, 심지어 어딘가에 포스팅까지 한다면 그 이상으로 공식적인 선언은 없다. 무언가 잘 풀리지 않고 약해질 때마다 들여다보는 경전 같은 것이 된다.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내 지향점을 말로 옮기며 설득하는 매개체이다. 이는 글만큼 구체적일 필요는 없고 때문에 구체성으로 속박하지(binding) 않지만, 자꾸만 입에 올려 지향점을 친숙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머리나 가슴으로 완벽하게 믿지 않는 신념이더라도 말로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진짜로 믿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식

휘몰아치는 일상 속에서 그래도 간간히 생각해내는 중요한 조각이다. 예를 들어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겨우 끝내고 집에 들어왔을 때, 바로 넷플릭스를 켜지 않고 한 곡이라도 더 쓰게 만드는 의지가 이 의식에서 나온다. 내가 이러이러한 지향점이 있다,라고 염주 차듯 뇌의 한쪽에 걸어놓는 팻말. 내가 어떤 사람이기로 다짐했는지, 어떤 결정을 왜 내렸고 어떻게 지킬 것이며 어디로 향해가는지는 모두 의식에서 나온다. 책 읽기, 마음이 맞는 사람과 대화하기, 혼자 침착히 글쓰기 등의 행위가 의식을 건강하게 살찌운다.


무의식

갈수록 비대해지는 내 안의 블랙박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즉 실패와 상처와 두려움이 쌓임에 따라 무의식은 몸집을 키우고 가끔은 의식과 기분을 잡아먹는다. 애를 써서 가야 하는 지향점보다는 익숙한 절망에 웅크리고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 사람들은 악몽에 물들지 않은 시간들을 방패 삼아 열심히 생각하고 말하고 글 쓰면서 매일 같이 무의식과 전쟁을 치른다. 적어도 나는 그런다. 이제는 무의식이 곧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휘발성이 큰 감정들에 무작정 휘말리기에는 내 결심들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래도록 의식의 끈을 붙잡고서 믿음을 지켜나가면 무의식도 언젠가는 그 비대한 몸을 움직여 나를 따라와 준다. 내가 과연 가치 있는 음악을 하는 걸까, 나는 사실 그저 망상증 환자일 뿐이야, 실패하면 난 인생에서 다신 즐거운 걸 찾을 수 없을 거야 - 하는 두려움과 불신의 영역에서, 

음악은 즐겁고 난 뭐든 해보기로 했어, 나는 모두가 예술가이자 뮤즈라고 생각해, 그러니 나의 도전은 유의미해 - 라는 긍정의 영역으로, 아주 느릿하게. 물론 아직도 청중에게 조롱당하는 악몽에 가끔 시달리지만, 때때로 난 꿈에서 신나게 공연을 하기도 한다.


기분

도대체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잘 모르겠는 내 안의 마나님. 한껏 산뜻한 기분이 되어 작사를 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트리거에 몸집을 키운 무의식에게 허망하게 조종 스틱을 내주기도 한다. 올해에는 기분이 부디 내 의식과 의지를 따라와 주기를 바라본다.


내 안의 요소들 간의 시차가 부쩍 커졌다

초등학생 때는 일기장에 '규란이랑 화해하기'라고 써뒀으면 다음 날 도경이에게 "나 규란이랑 화해할 거야"라고 금세 말을 했고, 그 날 하루 종일 규란이와 풀고 나면 같이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했다. 그러면 내 무의식도 금방 규란이를 다시 좋아하며 그 아이와 공기놀이를 하는 꿈을 그려내곤 했는데. '외교관 되기'와 같은 꿈을 꾸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쓴 것을 철석같이 믿었고, 내 의식과 무의식은 큰 격차 없이 내 말과 글을 따라와 주곤 했다.


요새는 좀 달라졌다. 이젠 글로 쓰고 말로 읊는 것들이 규란이와의 관계나 어릴 적의 꿈같은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슈들이기 때문일까? 그것들을 내가 진짜로 믿고 지켜내려면 예전에 비해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일까? 도통 내 뜻대로 안 되는 의지와 기분에 맘이 상하고,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재발되는 악몽과 불면증에 내 안의 시차가 선연히 느껴질 때면 이렇게나 쉬이 삐그덕거리는 내가 한심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차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무의식과 의식이 시간을 먹고 무거워졌기 때문에. 그에 비해 글과 말은 여전히 가볍고, 오히려 빨라졌기 때문에.


우린 많은 순간을 그저 흘려보낸 후 '무의식'이 그것을 알아서 분류하고 치료하기를 기대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달래주는 시간을 갖는 일은 아주 드물다. 명상해야지, 혼자 글을 써봐야지, 상담을 받아봐야지 하다가도 아침이 되어 마주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일상에 그저 굴러가기를 반복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동안 제대로 취급받지 못한 '무의식'은 세월과 아픔을 삼키고 상처투성이 코끼리처럼 우리 안에 앉아있을 것이다. 




'의식'도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는 인터넷과 다양한 책에서, 직접적으로는 본인과 타인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의견과 담론을 접한다. 그 안에서 최적의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감내하는 역할을 맡은 '의식'은 자주 실수하고, 의식의 주인은 자주 그를 탓하며 방어기제를 건드린다. 이러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고집과 방어가 강해지는 '의식'이 예전처럼 툭툭 던지는 글과 말을 금방 따라오길 바라는 것은 큰 실수이다. 


우린 시간 흐름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내부 시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시차를 인지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서툴게나마 다룰 줄 알게 되면 사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해지는 듯하다.


이다음엔 한 사람을 잊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시차를 겪어내는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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