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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Nov 14. 2022

가을, 월요일, 단정한 직선의 기록

횡으로 떨어지는 은행잎 사이를 직선으로 걸어간 하루였다.


많은 것을 덜어낸 요즘이다.

생각을, 사람을. 



아침 9시 즈음,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백수린의 책을 조금 뒤적여보았다. 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자주 배경으로 하는 그녀의 소설들은 화려하지만 정갈한 유럽식 아침식사 같은 맛이 있다. 꼭꼭 씹어 커피와 함께 마시면 딱이다.

활자 사이에서 또 금방 과거로 흐르려는 뇌를 붙잡을 겸 유튜브에서 시골 브이로그를 찾아보기도 했다. 시골이라 하기엔 맥북부터 카메라 세 대까지 너무 다 갖춰놓은 듯 하지만, 그날 먹을 도시락을 싸고 난로를 청소하며 소꿉놀이하듯 사는 저 멀리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대도시의 소란함에서 잠시 멀어진다. 


일요일을 함께 보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 어제 말한 영화 리뷰

그녀가 영화보다도 좋다고 했던 리뷰의 전문이 담긴 링크였다. 그 리뷰보다도 어제 그녀와의 대화가 더 좋았다. 그녀는 장장 7년 동안 이어진 장기 연애를 막 마무리한 참이었다. 가족을 잃은 것 같다는 말에 나까지 마음이 아파져 오지랖을 부리며 그녀의 마음을 살폈다. 고맙다며 웃던 그녀가 곧 말했다.

- 근데 그냥, 끝날만해서 끝난 것 같아. 특별할 것 없이 보편적인 이별이지 뭐. 

나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특수하고 좁은 - 혹은 그렇다고 믿는 -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많은 사람들을 무색하게 하는 말이었다. 평범해지는 것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말간 문장. 그것은 그녀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직선이라는 단어를 제일 좋아한다는 그녀가 묵묵히 나아가는 것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답장했다.

- 잘 읽었어 너무 좋다


에곤 쉴레 도록에 실린 펜 드로잉 중 가장 간단한 풍경을 오려 벽에 붙였다. 흡사 먹을 칠하지 않은 수묵화 같은 풍경을 들여다보며 오늘은 보다 더 단정한 나이기를 바랐다.




좋아하는 카페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음악도 듣고 싶지 않은 청명한 가을 오후 풍경이 스쳐갔다. 

햇빛을 옹골차게 쥐어맨 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날씨가 오락가락해서인지 단풍 색이 얼룩덜룩했다. 마치 노란 모자나 빨간 모자를 되는대로 주워 쓴 채 서핑하는 초록 인간들 마냥 엉망으로 즐거워 보였다.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쏟아지는 푸른색은 눈이 시릴 정도였다. 


카페에 도착해서는 (마침내) 일을 시작했다. 라떼 한 잔, 이어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집중해서 몇 시간을 일하고 하늘이 어둑해질 때쯤 나왔다. 

하루의 마무리 일과로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꼿꼿하게 서서 바를 잡고 거울을 응시하며 중심을 잡는 시간은 묘하게 수련 혹은 명상 행위와 비슷하다. 원래는 나를 풀어지게 만드는 음악이 이곳에서는 엄격한 박자의 기준이 된다. 흐물거리거나 도취되는 법 없이 몸의 움직임을 미세하게 조절해야 한다. 

무릎을 펴고, 직선으로, 직선으로.


샐러드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 촛불을 켜놓고 샤워를 하는 동안 머리는 기분 좋게 멍했다. 

마침내 침대에 누워 글을 쓰는 지금, 소탈했던 하루와 그것을 영위한 나 스스로에 옅은 만족감을 느낀다.

가을, 월요일, 단정한 직선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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